[시사비평 - 이수태]

지난 한 달 사이에는 참으로 권력의 정의로움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통합진보당 사건이 터지면서 국정원의 선거개입 문제가 흐지부지 덮이는가 하더니 채동욱 검찰총장이 사생활을 빌미로 권력에 의해 축출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했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인터넷 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무심히 올라오는 글들과 사진들, 히히덕거리는 농담들이 보기 싫어졌다. 물론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사둔 주식 값만 떨어지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사실 매우 암담했다. 기억 속에 구겨져 있던 70년대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느낌은 정말 70년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상태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감정도 이성도 평정을 되찾고 싶은 것은 본능인 것 같다. 더구나 추석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마음은 정처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던 것 같다. 이 판국에 종편 방송들은 온갖 선정적인 보도로 사람들의 감각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저 정도면 시청자들이 야바위꾼들의 현란한 손놀림 아래에서 동전이 담긴 통이 어디로 갔는지 헷갈리고야 마는 구경꾼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전자 검사라도 받겠다고 단호하게 외칠 때만 해도 전형적인 정의와 불의의 대결 같던 구도도 채 총장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이어지면서 ‘그러면 사실인가?’하는 생각들도 조금씩 하게 된 것 같다. 이미 몰래 유전자 검사까지 해보았으니까 대통령까지 저렇게 여유만만하게 나오는 것이겠지 하는 생각들도 퍼지고 있는 것 같다.

따져보면 변한 것은 없다. 김한길 대표가 ‘혼외자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 말이 궁극적으로 보면 맞다. 혼외자를 두었건 혼내자를 두었건 그것은 채 총장의 부인이 고민할 일이지 나 같은 국민이 고민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검찰의 숙원을 6개월간 꿋꿋하게 지켜오던 총장이 권력의 명시적 악의에 의해 축출되었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기묘하게도 통진당 사건이나 채 총장 사건이나 모두 명(名)이 실(實)을 제압하고 있는 형국이다. 주역을 모르니 소개할 재주는 없지만 이 형국은 어떤 괘에 해당할까? 절대 좋은 괘는 아니다. 불길한 괘인 것만은 분명하다. 최근 읽은 어떤 칼럼에서는 바둑에서 “묘수를 3번 거듭 쓰면 바둑은 진다”는 격언을 들어 이번 사건을 설명하고 있었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통진당 사건이나 채 총장 사건이나 과연 절묘한 데가 있었다. 풀 죽은 표정으로 청와대를 나오는 김한길 대표와 달리 박근혜 대통령이나 새누리당 대표의 표정은 득의만만했다. 그러나 바둑은 정수로 두어야 오래 가고 정치는 정도로 해야 국민이 마음을 편다. ‘정이불휼’(正而不譎)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춘추오패 중 첫 패자였던 제환공(齊桓公)을 공자가 평가한 말이다. 정도를 쓰고 사술을 쓰지 않으면서 패자가 되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반대로 두번째 패자였던 진문공(晉文公)에 대해서는 ‘휼이부정’(譎而不正)이라고 했다. 패자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사술에 의존했음을 비판한 불명예스러운 평가였다.

나는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주겠다고 한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공약을 종종 생각한다. 나는 그 공약이 그녀의 진심에서 나왔고 아직도 그 진심은 변함이 없다고 믿는다. 왜 그녀인들 권력을 잡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국가와 민족에게 진심으로 도움이 되고, 역사에 그 공적이 길이 남는 기회로 삼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러려면 명실상부한 정의로움을 갖추어야 한다. 지금처럼 명(名)으로써 실(實)을 제압하는 재미에 맛을 들이면 결과는 국민에게 희망보다는 혼란과 실망만 안겨줄 것이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정국을 니편과 내편의 대결구도로 바라보면 안 된다. 3자 회담에서 김한길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임기 중에 민주주의를 확고히 지켜나가겠다는 약속만이라도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듯 매달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냉소로 거절했다. 왜 그녀가 그 원칙적인 요구마저 거절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백번 천번이라도 약속해 주었을 것이다. 야당 대표의 요구가 없더라도 그것은 매일 아침 스스로 맹세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회동이 끝나자마자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금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과잉이 문제라고 외치고 나왔다. 아마도 박근혜 대통령의 말을 전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조만간 그 과잉되었다고 생각되는 민주주의를 회수하는 조치가 나올 것이다. 생각이 그렇다면 일부러 의도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실로 끔찍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아직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갈 길은 멀었다고 하는 판국에 과잉이라니!

모처럼 안철수 의원이 일리 있는 말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통치를 하려하고 있다는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은 사려 깊은 다수 국민들의 생각과 너무나도 괴리되어 있다. 그녀의 특수한, 나쁘게 말하면 비정상적인 성장 환경이 그녀의 생각을 상식에서 벗어난 방향으로 이끌고 있을 가능성을 많은 사람들은 우려하고 있다. ‘공주님’이라는 별명이 좋은 뜻에서 붙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 것이다.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을는지 몰라도 그녀는 유신의 어둠이 음산하게 짙어져가고 있던 70년대 말, 국민의 정신을 개조하겠다고 이른바 ‘새마음 운동’이라는 것을 벌이고 그 조직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유교의 묘혈에 죽어 잠자던 충효를 다시 일깨워 정신을 개조하겠다는 그 발상은 시대착오적이다 못해 실로 그로테스크했다. 철없던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면 차라리 좋겠다. 그러나 20대 말이라면 한 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굳어질 때다. 그런 시기에 신흥종교 영생교의 교주이기도 했던 문제의 목사 최태민과 함께 그런 시대착오적 정신 운동을 진행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왜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런 문제가 철저히 논의되고 검증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대통령은 국민의 의혹을 풀어주고 불안감을 해소시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한 대통령이라면 더더구나 그렇다. 그러나 한 번도 시원하게 나서서 국민에게 희망 찬 방향을 제시해 주지 않았다. 이석기를 잡아넣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로 국정원 문제를 덮을 의향은 없고, 앞으로 국정원이 다시는 선거 등에 개입할 수 없는 확실한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말을 국민에게 들려주어 국민을 안심시켰어야 했다. 개혁안을 만들겠다고는 했지만 모두 회의석상에서 발언한 것이고 그나마 의지가 읽혀지지 않는 발언이었다.

채 총장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관심은 채 총장의 사생활이나 거취에 있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이 했어야 할 일은 채 총장 문제가 어떻게 귀결되든 검찰은 앞으로도 독립적으로 법과 정의에 따라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본연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철저히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런 것이 정치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검찰이나 국민이 보기에는 앞으로는 알아서 하라는 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국민에게 희망이 주어질까?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은 혼란스럽다. 명과 실이 따로 움직이는 묘수들이 횡행하는 상태에서 국민은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생각해도 찝찝하기만 할 뿐 마음이 흔쾌하지가 않다. 정치 판도의 괴기스러움에서 오는 현상이다. 그 위에 민주주의가 과잉되어 있다는 난데없는 판단이 어두운 구름처럼 덮여오고 있다. 앞으로 무엇이 또 전개될지 불안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다. 매서운 눈매와 꼭 다문 입술이 예측 가능한 정치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잊혀 가고 있지만 그녀는 주변의 온갖 손사래를 물리치고 문제투성이의 인물 윤창중을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은 불안하게 생각했다. 두 달 만에 그 불안은 현실화되고 말았다. 김기춘 비서실장을 임명할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온갖 구태를 두루 갖춘 사람, 우리가 극복해야 할 요소들을 거의 다 갖춘 저런 사람을 왜 구태여 측근으로 앉힐까 불안해했다. 이번에는 두 달 만에 무언가가 나타날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이미 정국은 괴기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오죽하면 까마득히 잊혀 있던 유신 말기의 최태민이 생각나고 그 음산한 기운이 느껴질까?

정치에는 종교적인 측면이 있다. 태고로 가면 정치는 종교와 아예 결합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정치에는 지금도 종교적 성결(聖潔)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되면 니편 내편이 없어야 한다. 오직 국민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요구되는 진실과 정의만이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그것처럼 쉽고 간단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제발 우리나라 정치에도 진실과 정의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괴기스러워져 가고 있는 정치의 기상을 저 가을하늘처럼 청명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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