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원주민주화운동의 산증인 최기식 신부

▲ 원로사목자로 활동 중인 최기식 신부
원주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사에서 거점 역할을 한 곳이며,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협동운동, 생명운동, 풀뿌리운동 태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원주에는 60·7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끈 1세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2세대, 그리고 90년대 이후 다양한 형태로 협동운동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는 3세대 운동가들이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아울러 원주가 갖고 있는 운동사적 의미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

2005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지역민주화운동사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사업'을 실시했으나 현황기초 조사에 그쳤고, 초점도 60년대에서 80년대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의 징검다리 역할에 맞춰져 21세기형 협동운동, 대안운동의 모델 지역으로서 원주가 가지는 맥락과 뿌리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원주를 중심으로 벌어진 이 같은 운동은 원주에 국한된 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운동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60, 70년대 시대적 상황에서 원주 협동조합운동은 정부 주도의 새마을운동, 근대화운동은 물론이고 주류 민주화운동의 흐름과도 다른 경로를 걸어왔지만 현재 문서화된 자료가 많지 않아 안타깝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지원으로 구술사업 '원주지역의 협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통해 원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과 협동운동과 관련, 당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1세대 운동가들의 삶과 사상, 활동 내용 등에 대한 구술이 진행됐다.

본지는 42년간의 사목활동을 마치고 최근 퇴임한 1세대 운동가 최기식 신부를 만나 그의 삶과 원주의 민주화운동 역사에 대해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진행됐다.

▲ 1971년 최 신부가 사제 서품식 신품을 받고 부모님과 기념찰영을 하고 있다.

유년시절과 신학교에 들어간 이야기

최 신부는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풍수원이 고향이다. 풍수원은 신유박해(1801)와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으로 탄압받던 천주교 신도들이 피난 온 곳으로 고종 27년(1890) 프랑스인 르메르 이 신부가 초가사랑방에 초대신부로 부임한 한국의 네 번째 천주교회이기도 하다.(지금의 교회는 제2대 정규하(아우구스띠노 1863~1943) 신부가 설계해 고종 광무 10년(1906)에 착공, 이듬해 완공됐다.)

최 신부는 한국의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와 그의 아버지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최경환 성인의 후순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순교했고 부모님(아버지 최관수, 어머니 송기순)은 구교신자였다. 부모님을 따라 매일 기도를 했고, 여섯 살 때부터 6㎞ 떨어진 풍수원 성당까지 걸어 다니며 성체를 영했다.

최 신부는 "중학교에 올라갈 때까지 빠짐없이 기도했고 기도 안 하고 자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인식했다"며 "당시 신부를 대통령보다 높은 존재로 여겼다"고 말했다.

풍수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 있는 소신학교(성소 배양을 위해 인문 및 과학 교육과 함께 특별 종교 교육을 전수하도록 마련된 중등 교육 과정)에 입학했다. 최 신부는 "당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동네에서는 출세한 셈이고 교회에서 생활비와 학비가 지원됐다"며 "엄격한 신학교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신부에 대한 꿈과 가난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원주로 오게 된 배경과 본당 신부 경험

최 신부는 1971년 9월 16일 사제서품을 받고 10월 1일 학성동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2년 동안 97명을 영세할 정도로 노력했다. 하지만 불행이 닥쳤다. 세례식이 끝난 후 휴가차 부산에 있는 수녀원에 거주할 당시 어머니가 중풍에 걸려 누워 계신다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최 신부는 학성동 성당에 어머니를 모셨다. 최 신부는 "성당에 어머니를 모신 일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일이었지만 신부이기 이전에 피를 나눈 부모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병간호를 하던 중 유학을 가야하는 인사발령도 받았다. 당시 유학을 떠나게 되면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집에 오지 못했기 때문에 최 신부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최 신부는 "병든 노모를 두고 유학을 가야한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감도는데… 교회는 순종하라니까, 죽음까지도 순종했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이상한 소식이 들리는 거야. 바로 지 주교님(지학순 주교) 사건이었어"라고 말했다.

지학순 주교 구속과 민주화운동

지학순 주교가 진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하면서 인재 육성사업을 시작할 당시였다. 지역사회 문화운동, 신용협동조합운동, 수재민 구호활동, 노동자 교육, 반독재 및 부정부패 척결운동, 양심수 석방 및 민주화 운동, 결핵퇴치운동, 인권보호운동에 앞장섰다.

1974년 7월 6일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연행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풀려난 뒤 7월 23일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최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소식을 접하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활동하게 된다.

최 신부는 "지 주교님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야 사회정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석방을 위해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기도회를 통해 인혁당 사건의 진실과 원주 MBC 부정부패에 맞서 싸웠다. 당시 기도회가 끝나면 신도들과 거리로 나가 거리집회를 개최했다. 최 신부는 "그때 내 나이 31살이었어. 원동성당에서 데모를 할 때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의문이 들었지만 '정의와 평화'에 대해 강론을 펼치며 거리로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원동 본당 주임신부 생활과 범양 노조 사건의 전말

신형봉 신부는 1976년 3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하게 된다. 선언문 내용은 '우리나라는 1인 독재로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제도가 말살됐다'는 내용이었고 이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게 된다. 냉혹했던 유신 시절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이 유신독재에 대해 침묵을 지킬 때 천주교 원주교구 주보 '들빛'을 통해 양심의 소리를 담은 것이었다. 이 일로 최 신부도 서울 중수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 최 신부는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3.1 사건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명단에 들어가 있지 않았는지 나를 그냥 내보내 줬다"고 말했다.

원주에서 활동하는 민주투사들이 하나 둘 감옥으로 들어가자 원주에서는 더 이상 민주화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최 신부는 4월 1일자로 원동본당 신부로 왔고 장일순, 김영주와 지역사회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후 원풍모방, 범양산업과 관련된 노동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최 신부는 "정의구현 사제단은 사실 1975년 개운동 한살림, 교회원 지하에서 정식으로 결성을 할 계획이었어. 사제단이 문밖으로 나간 거는 원주가 시작인 셈이지"라고 말했다.

김현장과의 만남,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 최 신부는 1982년 미문화원 방화사건 당시 주범자를 은닉한 죄로 구속수감됐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를 기점으로 정치적 발언을 삼가고 있던 한국천주교회는 1982년 4월 전 국민의 관심을 받게 된다. 최 신부가 광주민중항쟁과 관련돼 수배중이던 김현장과 부산미국문화원 방화범 문부식을 숨겨준 혐의를 받고 '범인 은닉죄'로 구속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광주항쟁으로 드러난 미국의 실체가 웅변적으로 폭로된 사건이다. 광주항쟁 직후 1980년 8월 주한 미군 사령관 위컴은 로스앤젤로스 타임스지와의 회견 중에서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 지도자를 따라갈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지 않다"고 망언했다. 이에 1982년 3월 18일 고려신학교 학생 신은숙, 문부식과 부산대 최인순, 김지희 등이 부산 미문화원 현관에 불을 질렀다.

최 신부는 "정인재 씨가 어느날 사람 하나를 데리고 오는 거야, 나는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전두환 살인마, 전두환 살육 작전' 이라는 유인물을 썼다는 거야. 이 후에 또 한사람을 데리고 와. 할 수 없이 문길환이한테 단속을 하고 부엌에 아줌마 둘이니까 단속을 하고 공개적으로 밥도 같이 먹고 탁구도 치고 놀면서 그러다가 누가 오면 골방으로 숨겨줬지"라고 말했다.

최 신부는 김은숙과 문부식을 숨겨주고 있었지만 미문화원 방화범이 그들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최 신부는 "그들이 주범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미치겠는거야. 내가 숨겨주지 않으면 이놈들은 곧 죽게 돼 있었어"라고 말하면서 "이놈들이 서로 결혼을 시켜달라는 거야. 하지만 결혼은 안 된다, 이게 말이 되냐? 애들 장난도 아니고, 너희들 마음이 그렇다면 약혼식이라도 하자고 해서 백년가약을 맺어줬지"라고 말했다.

독일 해외 선진지 견학과 원주 사회복지

감옥에 있을 당시 최 신부는 사회복지에 눈을 뜨게 된다. 최 신부는 "감옥에 있을 때 생각한 게 교회가 앞으로 사회복지 아니면 빛이 없을 것 같아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최 신부는 "수녀원을 만든 하이디 수녀의 도움으로 독일 까리따스(Caritas)에다가 양로원을 하나 만들게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돈이 왔어. 당시 감옥에 있었기에 주교님이 돈을 들고 찾아 왔지. 감옥에서 나갈 때까지 그 돈을 하이디 수녀가 가지고 있다가 설립하게 된 거야"라고 말했다.

이후 지역사회복지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고 선진화된 독일사회복지는 격차가 있어 홍콩 사회복지를 원주지역에 맞게 도입하게 된다. 또한 소비조합 결성과 한살림을 설립하고 축성했다. 이후 활발한 협동운동, 신용운동, 노동자·농민 운동을 전개했다. 최 신부는 "강원도 사회개발의 주역은 지학순 주교 못지않게 장일순 선생과 김영주를 뽑고 싶다"고 말했다.

▲ 학교 설립차 아프리카 수단을 방문한 모습.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 사회복지에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 한국희망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퇴임 후 계획

원주 가톨릭사회복지회장 겸 천사들의 집 원장인 최 신부는 지난 42년간의 사목활동을 접고 원로사목자의 길을 걷게 됐다. 최 신부는 현재 '한국희망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방글라데시 등을 방문하고 지역개발, 교육, 인권, 국제 교류 등의 활발한 활동을 준비 중이다.

최 신부는 신부가 되기 전 상본에다 세긴 성서구절이 있다. "썩는 밀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이다. 하지만 최 신부는 은퇴를 하면서 "썩으면 많은 밀알이 될 수 있지만 썩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문구를 수정했다. 그동안 썩으면 발효가 되는 법을 알았고 남은 삶은 썩는 것보단 발효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것. 최 신부는 "한국희망재단이 더욱더 커져 지구촌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게 내 과제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기사 제공 / 원주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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