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만 가톨릭대 연구원 ‘한국인의 영성과 평신도 그리스도인’ 강연해
바야흐로 ‘영성’의 시대다. 교회와 관련된 강연이나 피정 제목에는 ‘영성’이 들어가야 흥행에 성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영성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고, 자신의 영성 혹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영성을 발견하기를 갈구한다는 뜻일 거다.
한국철학자 이향만 연구원(가톨릭대학교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 전임수석연구원)은 24일 우리신학연구소와 신앙인아카데미 주최로 열린 ‘평신도 영성 기획 강좌’ 마지막 강연에서 ‘한국의 평신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영성을 연구해 발표했다. 이 연구원은 ‘단군 신화’에서 출발해 한국인의 의식을 형성한 철학에서 한국인의 영성을 찾았고, 천주교 수용 과정 초기에 평신도들이 보여준 다양한 영성에 주목했다.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섞여 조화 이룬 한국인의 영성
이 연구원은 단군 신화에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을 찾았다. 고대 한국인들이 ‘이상적 인간’으로 여긴 단군은 환인의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환웅의 재세이화(在世理化), 웅(熊)의 고통을 감내하는 원화위인(願化爲人)의 염원이 결합해 나타났다.
“단군은 인간과 다른 존재가 아닌,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델이었습니다.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고, 진리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 진정 그럼으로써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죠.”
이 연구원에 따르면, 단군 신화가 상징하는 의미는 “사람과 세계의 변화에 참여하는 가운데 인간다움이 나타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신이 인간이 되고 곰이 사람이 되는,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 세상의 조화를 이루는 ‘변화’다. 이 연구원은 이러한 ‘변화의 영성’이 이후 한국인들의 인식에 바탕이 되었다고 봤다.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에서 “유교와 불교, 도교를 받아들이고 회통시키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영향력”으로 이를 표현했다.
“살아있는 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대단한 능력입니다. 우리의 고유한 풍류도에는 유교, 불교, 도교를 회통시키는 접화군생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이 추구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본래 종교적 갈등이 없었죠. 다른 종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각자의 장점을 받아들였습니다.”
오랜 역사에 걸쳐 한국에 들어온 다양한 종교와 사상은 한국인의 영성이 조화를 이루며 원만하게 발전하는 바탕이 됐다. 이 연구원은 신라 시대의 정토종과 화엄종, 고려시대의 교종과 선종 등 다양한 불교 사상이 한국인을 깊은 차원의 영성으로 인도했다고 평가했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의 근거가 됐던 유교 사상은 오히려 학자들이 천주교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하기도 했다. 중국의 진덕수가 편찬한 <심경>은 한국에 전해져 여러 학자들이 깊이 연구했는데, 나중에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정약용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받아들이는 배경이 된다.
“정약용은 유교를 유신론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천주교가 우리와 다르지 않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가진 종교적 심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한 거죠.”
정약용은 <심경>을 주석한 <심경밀험>에서 신(神)과 형(形)이 오묘하게 합해진 ‘허령지각’의 마음을 사람이 태어날 때 갖게 됨을 밝히면서, 이를 ‘심(心)’ 혹은 ‘신(神)’, ‘영(靈)’, ‘혼(魂)’으로 표현했다. 중용의 ‘구즉징’(久則徵)을 해석하면서는 “하늘과 삶이 서로 일치할 때 반드시 자기 마음속에 묵묵히 허할 수 있으니 이를 ‘징(懲)’이라 한다”고 했다. 이 연구원은 “<논어>에서 공자가 ‘징(懲)’을 문화계승적인 측면에서 문화적 체험의 증거와 고증의 의미로 사용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산은 종교적인 체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몸으로 영성 살았다는 점이 중요
유학자들의 서학 연구가 토착신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 아쉬워
이러한 영성은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온 초기에 형성된 신자들의 생활공동체를 통해 한국 천주교인의 영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 연구원은 조선의 천주교회 초기 수용 과정을 두 시기로 나눴다. 남인 친서파 유학자들이 서학에 학문적 관심을 갖고 천주교를 수용하던 시기가 있었고, 이후 신해박해로 유학자 층의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중인과 여성들에 의해 주문모 신부가 입국해 천주교가 실질적인 교계체계를 갖춘 시기다. 유학자들이 많은 활동 없이 학문으로 천주교에 접근한 것에 비해, 중인과 여성들은 평신도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행했다. 현재의 명동성당 자리는 조선시대에 중인들이 일궈놓은 터이기도 하다.
“대원군이 천주교 신자들이 잘하는 것 세 가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장사를 잘 지내고 의례를 잘 지킨다. 순교자들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를 말합니다. 둘째, 언문을 잘한다. 언문은 여성들의 언어입니다. 셋째, 초를 잘 만든다. 즉, 천주교 신자들이 생활공동체를 이뤘다는 거죠.”
이 연구원에 따르면, 중인과 여성들이 중심이 된 초기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은 생활공동체를 유지하며 영성을 키워나갔다. 사회 계층에서 약자인 중인과 가부장적 유교 규범에서 주변화된 여성들은 천주교를 유교 이데올로기를 대신할 새로운 사회규범으로 받아들였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빠르게 반응하고 전문 지식을 갖춘 중인들은 세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고 새로운 가치와 신념체계의 필요성을 알렸다. 여성들은 양반집 부인들과 규수들이 하인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공동체를 이루는 가히 혁명적인 신앙 활동을 펼쳤다.
이 연구원은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몸을 부대끼며 영성을 살았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들이 앞서 철학자들이 연구한 작업에 깊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선교사가 전한 교리와 생활공동체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은 “철학자들의 연구가 이어졌다면 토착신학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주목해야할 공동체 구성원 중 하나는, 동정을 선택한 평신도들이다. 이 연구원은 당시 유교의 결혼 문화가 여성들에게 사회적 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음을 지적하면서, 동정을 선택한 여성 신자들은 “동정을 통해 전통의 관습으로부터 탈출하고 자신의 신념을 고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원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이상적 사회를 향한 여성들에게서 ‘저항의 영성’을 발견했다.
이후 박해시대에 신자들이 온몸으로 신앙을 고백한 순교는 저항의 영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연구원은 “순교는 강요된 신념체계를 거부하고 자유롭게 선택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장 소중한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다하는 인간 실존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순교자의 죽음은 개인이 사회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순교를 강요하는 사회의 가치관과 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의이자 새로운 사회개혁의 요청을 의미한다.
이 연구원은 “(역사 속에서) 저항의 영성을 가진 인물들의 삶을 거룩한 장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면서, 개인의 지평을 뛰어넘어 사회적 지평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혁명의 영성’이 오늘날의 평신도들에게도 요구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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