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 - 이미영]

얼마 전 천주교 여성운동의 20년 역사를 기념하며 앞으로의 과제를 모색해 보는 심포지엄에 초대받아 발제 준비를 하며, 요즘의 여성 현실과 교회 여성 신자들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여러 자료뿐 아니라 나 자신이 여성으로서 체감하는 현실을 보더라도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과 민주화 과정 안에서 여성의 삶은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만큼 많이 변했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어려움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우리의 자녀는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구박받거나, 여자여서 교육받지 못하거나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어려움은 과거보다 훨씬 덜해졌다고 본다. 그러나 세상 안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해방감은 교회의 문 앞에서 멈춰버리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심포지엄 발제를 통해 제안했던 내용을 이 자리에서 함께 나누고 싶다.

새로운 복음화의 출발, 여성신학

사실 18세기 말 천주교가 한국 사회에서 싹트던 당시의 교회 모습은 여성들에게 있어 당시 유교적 전통 가치관을 전복하는 해방의 복음 그 자체였다. 이름 없는 여성들에게 주어진 천주교 세례명은 여성의 정체성을 되찾게 했고, 신분차별이나 남녀차별 없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교우’로 나누는 친교는 평등의 실현이었으며, 가계계승과 조상의 제사를 위해, 아들을 낳기 위해 축첩을 당연시하던 유교주의 가족관을 거부하고,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강조했으며, 신앙을 위해 동정(童貞)이나 불혼(不婚)을 미덕으로 받아들여 결혼제도 자체를 상대화하는 등 사회 안에 뿌리 깊은 계급제도, 가부장제, 남존여비사상을 타파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현대 세계에서 등장한 여성신학 역시 가부장제 문화로 왜곡된 사회 현실과 교회 전통을 쇄신하는 노력을 꾸준히 전개해 오고 있다. 죽음의 문화가 아니라 생명의 문화를 일궈가는 살림의 영성, 경쟁과 승리가 아닌 돌봄과 치유의 영성, 차별을 넘어서서 약자의 처지에서 연대하려는 정의의 영성, 어머니 하느님의 자비심으로 세상과 연대하려는 연민의 영성은 모두 여성신학의 가치로 복원해 낸 교회의 고귀한 전통들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나 신자들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은 바로 그러한 영성이 충만한 교회다. 이러한 영성으로 교회 문화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을 때, 그 새로움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 한국 교회 안에서는 여성신학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신앙에 대한 질문보다는 확고한 믿음만을 요구하는 교회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여성신학은 너무나 위험하고 불순한 의도로 보이는 듯하다. 여성의 눈으로 복음을 새롭게 해석한 여성들은 그 안에서 교회를 새롭게 할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했으나, 그들의 선한 의도가 끊임없이 의심받고 배척당하면서 이제는 말문을 닫아버린 느낌이다.

그렇게 변화하지 못하는 교회는 젊은 여성들에게서 외면당하고 있다. 20~30대 젊은 여성 세례자의 수는 지난 10년 사이에 큰 폭으로 줄어들었고, 교회를 떠나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30~40대 여성 신자 수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새로운 복음화를 고민하는 ‘신앙의 해’에 한국 천주교회는 우선 젊은 여성 신자들의 이러한 변화를 눈여겨보고 이들에게 응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성신학은 이 젊은 여성들과 대화할 수 있는 훌륭한 언어가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여성신학은 한국 천주교회의 현실에 맞춰 좀 더 깊고 다양해질 필요가 있고, 교회 구성원들은 그런 여성신학의 논의가 풍요로워지도록 지원하고 그 열매를 모두가 접해야 할 것이다.

▲ “천주교 여성 단체들의 사회복음화 노력은 교회 안 모든 여성에게 확장될 필요가 있다. 현재 본당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여성들의 깊고 헌신적인 신앙이 세상을 위한 봉사가 될 수 있는 길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사진은 작년 6월 6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주한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서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원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게 꽃을 선물하고 있는 모습 ⓒ한수진 기자

‘가정사목’에 여성 신자 가둬서야

한국 천주교 여성운동이 초창기부터 교회에 요청해 온 주요한 과제는 주교회의 산하에 여성사목 전담기구를 설치하는 것과 본당 의사결정 과정에 여성이 참여하는 문제였다. 이에 따라 2001년 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 산하에 여성사목 전담기구인 여성소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교구나 본당 차원에서 여성사목을 실행하고 주교회의에 정책을 건의할 실질적인 조직이 구성되지 않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숨통은 열린 상태다.

또 하나 중요한 건의사항이었던 본당 사목회 구성에서 여성비례할당제의 필요성은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여러 본당에서 여성 부회장과 여성 총구역장 등 여성 사목위원이 자연스럽게 늘어나고 있고, 여성 사목회장도 등장하고 있다. 이제 그 다음으로 한국 천주교 여성운동이 목표로 해야 하는 과제를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오늘날 여성이 직면한 다양한 현실에 응답할 수 있는 여성사목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는 여성사목을 가정사목의 범주 내에서만 이해하는 인식이 팽배하다. 이러한 한계는 가톨릭교회의 여성에 대한 가르침이 주로 가정 안에서의 여성 역할에 치우치고, 성모 마리아와 같은 순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는 가정의 개념 자체가 변하고 있고, 여성들의 삶 역시 가정의 틀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비혼 여성이 늘어나고, 일과 가정의 가치를 모두 아우르려고 하는 한국의 여성들에게는 가정사목의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여성에 대한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사목활동을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성찰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의 여성정책은 최근 여성차별을 극복하는 정책을 넘어서 양성평등정책으로 변화되었다. 1995년 세계여성대회 때 도출된 이 전략은 모든 정책 및 프로그램을 통합적 차원에서 기획, 실행, 감시 및 평가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혜택을 누리고 불평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사목활동 안에서도 여성을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불평등을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일례로 여성들만의 주방 봉사를 당연시하는 주일학교 자모회나 본당 행사 등 교회 내 생활문화에 대해서도 대안이 필요하다. 또한 여성들은, 사제서품은 논외로 하더라도, 성체분배나 성인 복사 등의 협조적인 전례에서도 배제되는 일이 허다한데, 이러한 관습이 과연 정당한지 검토하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천주교 여성운동, 고통 받는 여성들과 손잡자

그동안 한국의 천주교 여성운동 단체들은 교회 내부의 여성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안의 여성 문제에도 깊이 연대해 왔다. 성매매 여성을 위한 복지 활동, 가정폭력과 성폭력에 대한 상담 활동, 이주여성을 위한 활동 등 고통받는 여성들과 연대하는 사회 참여뿐만 아니라, 2001년부터 2005년까지는 ‘호주제폐지를 위한 천주교 연대’라는 기구를 만들어 사회제도를 바꾸는 활동에도 동참했다.

이러한 여성 단체들의 사회복음화 노력은 교회 안 모든 여성에게 확장될 필요가 있다. 현재 본당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여성들은 그 신앙이 사회적으로 확장되지 않고 본당 봉사에만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깊고 헌신적인 신앙이 세상을 위한 봉사가 될 수 있는 길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기존의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등의 여성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쟁에 따라 몸을 상품화하며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에 내몰리는 여성들, 비정규직으로 일터에서 차별받고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들, 빈곤에 내몰린 노년 여성들, 낯선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이주 여성 등 더욱 다양하고 심화된 사회적 억압으로 고통 받는 여성이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의 여성운동은 이러한 새로운 도전에 응답하고 그러한 고통 속에 있는 여성들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미영 (발비나,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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