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의 영성과 가톨릭일꾼운동의 한국적 적용-4]

도로시 데이는 여러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톨릭일꾼의 집을 방문하고, 대공황으로 일어난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기록하고, 집회에서 강연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일으킨 연좌농성에서 캘리포니아의 떠돌이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도로시는 노동문제가 발생하거나 부당한 조건에 항거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들을 도울 방도를 찾았다. 이러한 가톨릭일꾼운동의 활동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전통적인 본당 차원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제 세상만사가 가톨릭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인간체험의 중심에 있는 정의와 자유,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했다.

▲ 기도하는 도로시 데이. (사진출처/유튜브 동영상 'Sainthood cause for Dorothy Day' 갈무리)

“마음의 무장해제가 일어나야 한다”

가톨릭일꾼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활동 중에 하나는 ‘평화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가 제일 먼저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한 기적이었으며, 배고픈 군중들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이었다. 그리고 예수가 마지막으로 행한 기적은, 예수를 체포하려는 사람들에게 맞서서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입힌 상처를 치유하신 것이다. 예수는 날카롭게 명령하셨다. “칼을 치워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은 그 말씀이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으로 알아듣는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이 세상의 군인이 되지 않겠소. 나는 그리스도의 군인이기 때문이오”라고 말하며 순교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제국과 합세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교황은 군대를 지휘하며 성전(聖戰)을 선포하곤 했다. 그러나 복음 앞에서 ‘거룩한’ 전쟁이란 없다. 그리고 전쟁은 애국심과 교묘하게 결합되어 신앙을 위한 것으로 선전되고 왜곡되었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도로시 데이의 평화주의는 시험을 받았다. 거의 모든 미국 주교들과 가톨릭계 언론이 반공적이고 ‘친가톨릭’이라는 이유로 프랑코를 지지했다. 도로시 데이는 신문에서 사설을 통해 말했다. “우리 모두는 스페인에서 무서운 종교탄압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래도) 우리는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방법에는 반대한다.”

도로시 데이는 교회의 순교자가 된 신부, 수녀가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쓰기를 거부했던 무기를 그 사람들의 이름으로 잡음으로써 그 사람들을 명예롭게 할 것인가? 물었다. 그것은 순교를 허사로 돌리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 물었다. “오늘날 전 세계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이다. 우리 모두는 그 와중에 살고 있다. 솔직하게 우리는 성인을 찾고 있다.” 도로시는 우리 하나하나도 스페인의 신부, 수녀처럼 무장을 하지 않고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음의 무장해제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야 우리의 사랑과 기도가 악을 이겨낼 힘이 생긴다고 전했다.

도로시 데이의 철저한 평화주의 때문에, <가톨릭일꾼> 신문은 많은 독자를 잃었다. 몇몇 교구에선 주교들이 교구 안에 있는 모든 교회와 교구학교에서 신문구독을 금지시켰다. 결국 스페인 전쟁은 1939년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고,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2년 후 참전하였다.

▲ 사진출처/유튜브 동상 Dorothy Day Documentary: Don't Call Me a Saint 갈무리

“전쟁 중이라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무를 버릴 수 없다”

가톨릭일꾼운동의 평화주의는 중립노선을 달리지 않았다. 유태인을 탄압하는 히틀러에 반대하여 뉴욕의 가톨릭일꾼들은 1935년 부둣가로 달려가 독일의 정기여객선인 브레멘호 앞에 모인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자 한 명이 돛대를 타고 올라가 나치의 깃발을 떼어내려다가 배 위에 있던 경찰의 총탄에 다리를 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독일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호소문을 통하여 “미국의 환대를 원하는 유태인들에게는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나라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는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고,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만 입국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은 유태인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인종차별과 나치운동의 사악함을 알고 있었으나 도로시 데이는 전쟁을 수단으로 하여 악과 싸운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전쟁은 계속되는 수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변호하러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전쟁을 선포했을 때, <가톨릭일꾼> 신문은 헤드라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평화주의를 고수한다’는 사설을 실었다.

“우리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찍어낼 것이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시오.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며......’ 우리는 아직도 평화주의자다. 우리의 선언서는 산상설교인데, 그 뜻은 우리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양심적인 반대자를 대신하여 말하거니와, 우리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고 화약을 만드는 데 참가하지도 않을 것이며, 전쟁 수행을 위한 정부의 공채도 사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권유하지도 않을 것이다.”

▲ 사진출처/유튜브 동영상 Dorothy Day Documentary: Don't Call Me a Saint 갈무리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고 나서도 가톨릭일꾼운동은 전쟁에 줄기차게 반대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은 전쟁 교도소나 시골의 노동단지에서 일을 했다. 어떤 사람은 무장을 하지 않는 위생병으로 군복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톨릭일꾼> 신문은 성프란치스코가 길을 들인 늑대 옆에 서 있는 그림과 함께 ‘승리 없는 평화’라는 말을 곁들여 계속 실었다. <가톨릭 양심적 반대자>란 신문도 발간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애국적인 사람들에게는 배신자처럼 느껴졌고, 많은 주교들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도로시는 전쟁중이라고 해서 우리의 적을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도로시는 거듭 말했다. “우리의 생활의 법칙은 자비의 일을 하는 것이다.”

마침내 종전이 되었으나 도로시는 기뻐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죽었지만 군국주의는 살아 있었고, 파시즘도 숨어서 존재할 것이다. 전쟁 때문에 원자탄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가 생겨났다. 그리고 섬광과 함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파괴되었다. 도로시는 이번 전쟁에서 연합군이 이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승자는 전쟁과 죽음이며, 이제 죽음은 인류를 말살시킬 수 있는 무기로 무장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쟁 때에도 가톨릭일꾼운동은 더욱 완강히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1965년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전쟁이 확대되면서 3년 안에 미군의 숫자가 51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였다. 방어능력이 없는 외딴 마을들이 전투기와 헬리콥터로 파괴되었다. 예수회 신부인 다니엘 베리간은 신문에 베트남을 ‘불타는 아이들의 땅’이라고 썼다. 유니온 광장에선 가톨릭일꾼 봉사자들이 시민불복종 행위로 징집 등록증을 불태웠고, 이 자리에서 도로시 데이는 전쟁의 부도덕성을 알리고 항거의 몸짓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전쟁을 지지하는 자들은 이들을 ‘모스크바 메리!’라고 야유하며 “징집 등록증을 태우지 말고 너희들이나 분신하라!”고 외쳤는데, 몇 주 뒤에 이 자리에 참여했으며 가톨릭일꾼 봉사자였던 로저 르포트가 미국공관 앞에서 정말 분신하였다. 로저는 자신의 몸을 벽 삼아 미국 전체에 들릴 수 있게 ‘아니오’라는 메시지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주교들은 초기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예 뉴욕대교구의 스펠만 추기경은 베트남전쟁을 ‘문명을 위한 투쟁’으로 규정하고 바오로 6세 교황의 평화협상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전면승리를 요청했다.

가톨릭일꾼운동의 애덕활동은 평화운동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 도로시 데이의 생각이었다. 주변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놀라운 애덕활동을 평화주의로 더럽히지 말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도로시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데 반해 전쟁은 기아를 가져다주었고, 우리가 괴로워 우는 이들에게 위로를 가져다는데 반해 전쟁은 비참과 폐허를 가져왔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에게 해준 것은 무엇이든, 친절이든 폭력이든 그분께 직접 해드린 것과 마찬가지다.”

참고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도로시 데이, 바오로 딸, 1995
<잣대는 사랑>, 짐 포리스트, 분도출판사, 1991
<도로시 데이와 함께 하는 기도>, 제임스 알레어, 로즈메리 브로턴, 성바오로 1998.
<하느님, 나, 우리, 그리고 가난>, 참사람되어, 2000. 8
<야곱, 상처를 대면하다- 불안한 시대에 하느님을 찾아서>, 케리 월터스, 참사람되어, 2003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참사람되어, 2004. 2.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로버트 엘스버그, 참사람되어, 2005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참사람되어 200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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