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보만 남아서 싸운다

빨갱이 신부, 좌파 신부, 깡패 신부, 길 위의 신부, 그리고 울보 신부. 전주교구 원로사제 문정현 신부에게 붙는 수식어들이다. 죄다 거북스럽거나 하찮은 낱말들이다. 빨갱이라는 험악한 말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늘 눈물을 달고 산다. 기쁠 때도 울고 슬플 때도 울고 억울할 때도 그의 ‘언어’는 어김없이 눈물이다. 그 많은 눈물들이 도대체 저 작고 푸석한 몸속 어디서 저리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지 궁금할 정도다.

극히 주관적인 시선이겠지만 나는 그를 통해 요 몇 년간 한반도에서 넘쳐났던 아픔들과 고통들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용산의 시커먼 화염에 사라진 집 없는 자들의 구천을 떠돌만한 원통함, 강변들에 깃들어 살던 생명들의 소리 없는 비명들, 힘없는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를 영업행위 장소쯤으로 바꾸어 버린 교회의 병든 양심, 엄청난 국가 권력 앞에 살려 달라 몸부림치는 섬마을 사람들의 절규, 무더기로 직장에서 쫓겨나 삶을 달리한 노동자들의 한 많은 목숨들. 이 모든 아픔의 결들을 고스란히 몸으로 담아내고 눈물로 기록한 노사제 문정현, 그가 내게는 역사책이다.

▲ 24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제4차 범국민대회'에서 문정현 신부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여는발언을 듣던 중 눈물을 훔치고 있다. ⓒ민중의소리

미사 때를 제외하고는 사제복을 걸치고 있는 모습은 극히 드문, 후줄근한 잠바대기와 무릎이 부푼 솜바지를 주로 걸치고 있는 그는 아무리 일선에서 물러난 원로 사제라지만 볼품없다. 언 듯 보면 동네 어귀에서 폐지를 줍고 다니는 노인쯤으로 보이는 그에게 사제들의 검은 제복에서 풍기는 기품 따위를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나는 늘 그의 눈물 속에서 검은 제복의 위엄보다 더 깊고 고요한,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측은지심을 발견한다. 온갖 논란거리의 중심에서 편치 않은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그이지만 그가 건네 오는 축축한 눈자위에서 나는 자주 그 어떤 사제보다도 숭고한 예수의 마음을 만난다. 매 맞는 자, 굶주린 자, 갇힌 이의 곁을 차마 떠나지 못한 채 그저 주저앉아 울 줄만 아는 바보, 그가 문정현이다.

고통이 범람하여 들판과 도성, 골목 어귀까지 차올랐다. 엔간한 곡소리에는 이미 내성이 생긴 불감증의 시대, 돈이 기어코 신의 자리까지 찬탈해버린 약육강식의 야만의 시대. 이 끝자락에서 세상을 살릴 방도는 무엇일까? 제복과 눈물 사이 우리가 선택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해야할 시기이다. 지난 몇 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실정’이란 싱거운 단어로 담아낼 수 있을까? 쓰리고 아렸다. 지금까지 웬만한 세상의 소요와 격랑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던 교회의 어른들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성명을 내고 정부와 불편한 각을 세웠던 이례 없는 몇 년이다. 그만큼 아팠다. 그리고 또 우리는 선택의 시간을 맞았다. 누가 목소리 없는 이의 목소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누가 힘없는 자들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누가 이 야만의 시대를 끊고 사람의 시대를 열어 줄 수 있을까?

노구를 이끌고 지금도 길거리 힘없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문정현은 울보다. 힘없는 자들의 편이라 자처했던 많은 이들이 그들의 곁을 떠났어도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던 이들은 결국 우는 자들이었다. 역사가 증명하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 옛날 예수가 그랬고 울보 문정현이 그랬다. 그렇게 울보들만 남아서 싸웠다. 그들을 위해서 싸웠고 세상을 위해서 울었다.

제복과 눈물 사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누가 제복이 아닌 눈물을 입었는가? 묻고 또 물어 선택하자.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소식지 <정의평화> 68호에 실린 글입니다.

장동훈 신부 (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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