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신학자-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지난 번 폰 발타자 편에 대한 지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막걸리와 밤고구마가 웬말이냐. 기만이다. 너무 길고 장황하다. 체하겠다"더군요. 제가 좀 욕심이 과했나 봅니다. 반성하면서요. 이번 호부터는 조금 간결하게 이야기를 풀어 보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 2007년 2월, 강연 중인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여러분께 두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학자는, 아마도 많은 분들께 이미 친숙한 분일 듯 해요.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신학자들 중 한 분인,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Elisabeth Schüssler Fiorenza)입니다. 쉬슬러 피오렌자는 여성신학적 모델, 방법론, 메타포로 성서와 초기 기독교 역사를 재해석, 재구성한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입니다. 1938년 루마니아 태생으로 2차 대전 중 독일에 망명, 독일에서 신학 수업을 마친 후, 북미와 유럽 전역의 교회와 학교에서 활발한 저작 활동과 강연을 펼쳐 왔으며, 지금은 미국의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해방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 중에서도 저는 특별히 쉬슬러 피오렌자의 신학 방법론을 좋아합니다. 성서와 교회 전통을 거부하지 않고, 재해석과 재구성을 통해 그 이면을 보고자 한다는 점 때문이지요. 스스로 '그리스도인'라고 고백하는 이상, 어느 누구도 성서와 전통이 아로새기고 축적해 온 언어와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그 언어와 역사가 폭력과 억압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해도, 그리스도인인 이상, 우리는 그 부끄러운 구조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 몰라라 책임을 방기할 수도 없고, 전통을 아예 끊어 내는 급진적 유토피아를 꿈꿀 수도 없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쉬슬러 피오렌자가 제안합니다. 비틀어라!

쉬슬러 피오렌자는 우선, 성서와 교회 전통이 남성 중심적이며 성차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 생산된 텍스트이기 때문이죠. 이런 시대적 한계 안에서 쓰여진 텍스트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수천 년 묵은 차별의 구조를 우리 삶에 그대로 재현하게 되겠지요? 쉬슬러 피오렌자는 성서가 갖고 있는 억압의 구조를 단지 하느님의 말씀이니 맹목적으로 수용한다거나, 분노와 적개심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드러난 표면을 의심하고, 더 깊이 파고 들어가 그 속에 숨겨진 해방적 비전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성 중심적, 성차별적 요소 있는 성서와 교회 전통..
드러난 표면 의심하고, 그 속에 숨겨진 해방적 비전 찾아내야

쉬슬러 피오렌자에 의하면, 성서를 바라보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서를 '신화적 원형 (mythical archytype)'으로 바라보는 입장이고, 또 하나는 성서를 '역사적 모형(historical prototype)'으로 바라보는 것이죠.

성서를 '신화적 원형'으로 바라본다면, 성서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계시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선포하는 권위의 근거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성서의 진술들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사실이기에, 문자적, 교리적 수용으로 입증되고 지지되어야만 하죠.

하지만, 성서를 '역사적 모형'으로 바라본다면, 성서 또한 특수한 시대의 문화적 가치관과 질서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서와, 성서가 쓰여진 시대의 문화와 역사의 산물을 통전적인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지요. 성서는 시공간을 초월한 텍스트가 아니기에, 성서를 읽는 이가 누구인가, 읽는 이가 어떻게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가에 따라 의미 해석의 기준 또한 바뀌게 되죠. 나아가, 이러한 성서 해석의 역사를 통해 빚어진 교회 전통 또한 폐쇄적이거나 고착적일 수 없습니다. 전통은 언제나 변해 왔고 또 늘 변하고 있는 것이기에 개방적이고 역동적으로 묘사되어야 합니다.

쉬슬러 피오렌자는 성서를 '신화적 원형'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모형'으로 이해함으로써 다양하고 구체적인 역사의 장면들과 현실의 문제에 성서가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성서와 전통을 저술하고 구성해 온 남성들과 승자들의 시각이 아닌, 그 기록 속에 묻혀 있는 여성들과 약자들을 수면 위로 떠올리고 그들의 경험을 통해 성서와 교회의 전통을 바라본다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억압의 틀거리가 해방의 비전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죠. 쉬슬러 피오렌자는 특별히 여성의 경험을 강조하지만, 물론 이 모델은 성서와 전통에서 소외되어 온 많은 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겠죠.

▲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의 저서 '지혜의 길들: 여성주의적 성서해석'.
쉬슬러 피오렌자는 '역사적 모형'으로 성서를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해석학적 방법론들을 발전시켜 왔는데요. 2001년도에 출판된 <지혜의 길들: 여성주의적 성서해석>(Wisdom Ways: Introducing Feminist Biblical Interpretation)을 토대로, 쉬슬러 피오렌자의 해석학 모델을 간략하게 소개할게요. 이 책에서 쉬슬러 피오렌자는 일곱 가지 모델을 제시하는데요. 각각 '경험의 해석학', '지배적 힘과 사회적 정황을 분석하는 해석학', '의심의 해석학', '비판적 평가의 해석학', '창조적 상상의 해석학', '회상과 재구성의 해석학', 마지막으로 '변화를 향한 행동의 해석학'이라 이름 붙입니다. 이 해석학적 모델들은, 여성신학의 보편적 해방의 원리와 형식에 성서와 전통을 끼워 맞춘다기보다, 어떻게 성서와 전통의 기록들이 여성의 삶 속에서 기능했는가를 분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죠. 이 부분에서 쉬슬러 피오렌자가 추구하는 방법론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일곱 가지 해석학적 모델의 초석이자 기준이 되는 것은 구체적인 여성의 억압과 해방 경험입니다. 경험으로 성서를 읽어 낼 때에는, 그 경험을 배태한 시대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종교에 영향을 끼친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그 복합적인 요인들이 성서를 기록하고 구성하는데 어떻게 작용했는지 분석해 내는 작업 또한 중요합니다.

이 과정에 필요한 것은 "의심"입니다. 성서와 전통의 모든 기록이 여성의 삶에 이롭게 작용한다고 전제하지 않고, 그 안에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요인이 있을지 모른다고 일단 의심하는 거죠. "의심"이라는 말을 불온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학문과 사고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것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하니까요. 의심은 창조적 수용에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이렇게 의심을 통해, 성서와 전통의 기록 속에 하느님의 해방의 역사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고 판단이 되면, 그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비판적 평가가 필요한 단계죠. 신비화하거나, 좋으니 좋다, 아전인수격으로 해명하려 하면 안되죠.

경험과 의심과 비판을 통해 성서를 읽었다면, 그 이후에는 비판과 의심을 넘어서서, 여성의 관점으로 기존의 이야기들을 새롭게 말하고, 평등한 제자직의 관점에서 전통의 금기에 도전하는 몸짓이 필요하겠죠. 창조적 상상력, 회상과 재구성의 능력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는 성서와 전통 속에서 여성들이 겪었던 고통의 기억을 회상해 내는 작업뿐 아니라, 여성들의 참여와 투쟁의 역사 또한 되살리는 작업이 요구됩니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 운동에서 보여진 여성들의 참여와 지도력 같은 것이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서와 전통 안에 숨어 있는 "여성 문장들(women passages)", 즉 여성들이 주체로 섰던 사건의 기록을 발견하고 그 문장을 재구성의 지표와 실마리로 삼아야 합니다.

쉬슬러 피오렌자가 말하는 "에클레시아"..
삶과 현실의 언어로 하느님 이해하고, 자유롭게 의견 개진하는 남녀평등의 공동체

의심과 비판과 재구성을 통해 쉬슬러 피오렌자 해석학이 결국 지향하는 것은 변화를 추구하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성서를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결국 실천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말하는 것일까요? 쉬슬러 피오렌자는 "에클레시아(the ekklesia of wo/men)"를 구성하도록 제안합니다. 쉬슬러 피오렌자에게 있어 "에클레시아"는 종교적 개념이라기보다 시민적, 정치적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과 현실의 언어로 하느님을 이해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남녀평등의 공동체를 의미하죠. 그런 공동체는 소유와 욕망, 지배와 전쟁을 부추겨 온 지난 2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극복하고 화합과 생명 지향적 공동체로 나아갈 비전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런, 또다시 길어졌습니다. 이제 마무리해야겠네요. 어쩌면 어떤 분들에게 오늘의 이야기는 까칠하고 껄끄럽게 들렸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쉬슬러 피오렌자의 여성주의적인 시각과 상상력, 실천적 제안은 성서와 전통을 오히려 현실 속에서 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도 한번, 성서와 전통 속에서 주변부에 머물러 왔던 많은 인물들에게 직접 말을 걸어 보시면 어떨까요? 성서의 주연급들 못지 않게 하느님의 뜻을 바라고 예수를 사랑했지만 그들만큼 환한 조명을 받지 못했던 많은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주어, 그들이 풀어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보는 거죠. 선지자 미리암, 판관 드보라, 룻과 나오미, 백부장과 시종, 아리마태아 요셉, 초대 공동체에서 사도들과 바오로와 동역했던 많은 이들, 수많은 중세의 여성 영성가들, 근현대 변방의 설교가들과 저자들과 같은 이들 말입니다. 이들이 우리 공동체의 이야기 속에 살아 움직인다면, 우리 삶과 신앙의 여정이 훨씬 풍부해지고 흥미로워지지 않을까요?

국내에 번역된 피오렌자의 저서들 : <성서 소피아의 힘: 여성해방적 성서 해석학>(김호경 역, 다산글방 2002), <동등자제자직>(김상분 역, 분도출판사 1997), <돌이 아니라 빵을>(김윤옥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4),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김애영, 종로서적 1986).

 
조민아 교수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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