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홀리 네임즈 수녀회 박정은 수녀]

"삶은 다리(bridge)다." 

박정은 수녀 ⓒ문양효숙 기자

미국 홀리 네임즈 수녀회(Sisters of the Holy Names of Jesus and Mary)의 박정은 소피아 수녀는 15년 전, 한국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던 수녀원을 나와 미국으로 갔다. 여성주의 신학자 샌드라 슈나이더스 교수의 부름이 있었다.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이방인으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온 여성 신학자, 홀리 네임즈 대학 영성학 교수 박정은 수녀를 만났다.

박정은 수녀가 미국에서 다시 수도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홀리 네임즈 수녀회의 모토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Full Development of Human person' 즉, 모든 사람이 가진 잠재력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도록 있도록 돕고 헌신하는 것이 홀리 네임즈 수녀회의 목표다. 홀리 네임즈 수녀회는 국제연합(UN)에서 여성과 어린이의 인신매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는 한편, 교육 수도회로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아우르며 교육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박정은 수녀는 개인적으로 수녀회에 예술가들이 많은 것도 좋았다고 했다. 홀리 네임즈 수녀회에는 활동가와 학자들이 많은데, 활동과 학문은 예술과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게 박정은 수녀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가기 전 박정은 수녀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사회적 정의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큰 주제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가였다. 그는 1980년대 매일 거리에서 싸우며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아닌 분노가 너무 많다고 느꼈고, 애정을 갖고 활동했던 성소 모임, 주일학교 교사 연합회는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사랑'과 '자비'가 너무 나이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는 시편의 말씀처럼, 그 두 축을 분리되지 않은 하나로 온전히 가지고 살고 싶었다. 혁명을 하되, 방법론적으로 사랑과 아름다움을 가진, 혹은 최종적으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혁명을 꿈꿨다.

"환대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들"

그가 미국에서 첫 번째로 낸 책은 주로 '이주'에 관한 책이다.

"세상이 지구화되면서 많은 이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익숙하지 않은 문화로 이사를 가야 한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과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익명의 사람으로 살게 된다. 경험으로서의 위치 바뀜(Dislocation)에 대한 해석과 그에 대해 어떤 비전을 전달할 것인지에 관심을 뒀다. 많은 경우 이런 위치 바뀜을 경험하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떻게 힘을 줄 것인가 고민했고, 실마리를 찾은 것은 한국의 샤머니즘이었다."

그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여름 경기도 양주시 청향사에 들어가서 살았다. 무속인 공동체였다. 그는 "민중신학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소개되었던 것이 한국의 샤머니즘인데 주로 한(限), 정(情) 같이 개념만 가지고 온 경우가 많았다"며 인류학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무당도 양성과정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신내림을 받지만 굿을 포함해 무당이 해야 하는 모든 일은 배워야 한다. 새로 무당이 된 일명 '새끼 샤먼'들은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엄마 무당' 쪽으로 옮겨와 공동체를 이룬다. '이 사회에서 끊긴 자들'이 이룬 공동체였다."

박정은 수녀는 무당들의 공동체가 '부서진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애정이 매우 각별하다고 했다. 그는 무당의 공동체를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경계 지역(borderland)에 서 있는 주변인들의 공동체로 이해했고, 그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힘을 받을 수 있는가에 주목했다. 그는 이런 모델로 요한 복음서 8장의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해석했다.

경계에서 이름 없는 너와 이름 없는 내가 만나 진심으로 교류할 때 서로 고유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는데, 박정은 수녀는 이것을 하이브리드 정체성(Hybrid Identity)이라고 정의했다. 이 과정에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석학 하버드대 호미 바바 교수의 '혼성성'(hybridity)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호미 바바 교수는 서구 문화의 일방적인 확산이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날, 특정 세력의 일방적인 문화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이른바 '섞인 것들의 특성'으로서 혼성성을 설명하는데, 이는 식민지에서도 피지배자의 저항과 대립에 의해 '제3의 문화 공간'이 창출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경쟁적이고 위험천만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서로의 고향을 떠나 제3의 공간에서 낯선 이들끼리 만나 경계를 풀고 깊이 만나는, 데리다가 말하는 "그 어떤 선입견도 없는 환대"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박정은 수녀는 "환대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특권(privilege)이라고 부르고 싶다. 궁지에 처해 있을 때 열리는 새로운 지평이 있다. 데리다는 '환대'에 대한 개념을 성서에서 가져오지 않았는가.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낯선 나그네를 집으로 들여 정성껏 식사를 대접하는 행위에서 환대의 핵심을 찾는다. 나는 그것을 무당의 공동체에서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부서진 사람들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무당들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오랫동안 신병을 앓으면서도 사회적 금기 때문에 신내림을 받아들일 수가 없던 그들이 결국 받아들인 후에는 돈을 벌어 가족들을 돌본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 자라서 자리를 잡으면 그 무당들을 보지 않는다. 무속인 김금화 씨가 말하지 않는가.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했는데 결혼식장에 한번도 초대 받은 적이 없다'고. 그만큼 무당의 삶은 한국에서는 금기로 여겨진다."

박정은 수녀는 그런 관점으로 복음을 읽을 때 열리는 새로운 의미에 주목했다. 그는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혈연을 넘어서 진정한 우정에 입각한 새로운 공동체"라며 이런 의미가 현대 사회에서는 꼭 필요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문양효숙 기자

"몸이 나 자체다. … 동양인의 종교 전통들이 가톨릭 안에서 만날 수 있기를"

새로 준비하는 두 번째 책은 동양 종교의 '몸의 수행'에 대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몸과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박정은 수녀는 몸이 나 자체라고 말한다.

"동양 종교는 몸을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체, 공동체, 혹은 우주를 그대로 상징한다. 종교 의식에서도 드러나는데 특별히 불교의 '절'이 놀라웠다. 몸이 완전히 통로가 됨과 동시에 성전이 된다. 무당들에게도 몸이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몸을 통해 영을 만나고 채널링을 해서 소통을 하니 말이다."

몸을 나 자신이라 받아들이는 동양 종교의 수행법은, 몸을 넘어서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가톨릭 전통과 출발점이 많이 다를 수 있겠다 싶어서, 연결 지점이 생길 수 있겠는가 물었다. 박정은 수녀는 "결국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은 이 종교, 저 종교를 떠나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면서 "신학 하는 사람의 과제는 어디까지가 가톨릭인가, 아닌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종교성을 어떻게 회복하는가에 있다"고 답했다.

또한, 박정은 수녀는 동양인으로 존재 안에 이미 가지고 있는 좋은 종교적 전통들이 가톨릭 안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힐데가르트 같은 중세 신비주의 여성 영성가들을 통해, 가톨릭 전통에서도 몸에 대해 그런 접근이 가능한 영역이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중심에 둔 영성체도 몸을 중시한 의식(Body Ritual)이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박정은 수녀는 "다른 종교의 의식(Ritual)을 그대로 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단순히 매뉴얼이 될 뿐이어서 의미를 갖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삶의 자리를 해석하고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토착화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전례(Litergy)가 아닌 의식이라 말하는 것이다. 의식은 전례와는 다르게 소그룹 안에서 개인들이 새로운 의미를 찾는 것에 주목한다."

"'내일'이란 없다. 순간을 채워가는 것만이 삶이다."

박정은 수녀는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수녀회, 일터 등 그가 속한 공동체가 자신을 살게 했고, 공동체로부터 받는 힘이 컸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공동체는 장소가 아니라 공간(space)이다. 그는 두 문화가 섞이는 경계선에서 만들어지는 '떠돌이들의 공동체'에 주목하며 "여러 문화가 섞이는 공간에서는 무엇이 옳다고 주장할 수도 없고, 서로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글로리아 안줄다 교수의 설명을 인용해 이 경계 지역을 과정(process)으로 설명하고 "이 과정이 집(Home)"이라고 말한다. 과정에서 마주치는 많은 이들과 깊이 있게 만나면 그게 새로운 나의 홈, 새로운 정체성이 된다는 것이다.

고향을 잃은 많은 사람들의 외로움, '근원적으로 돌아갈 곳'에 대한 갈망, 흔들리지 않는 고향을 찾는 인간의 회귀 본능은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도 한다. 그러나 박정은 수녀는 "인생은 그저 과정일 뿐"이라고 말한다.

"힌두교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꼬마가 '엄마, 내일이 뭐야?' 하고 물었다. 엄마가 '자고 일어나면 그게 내일이야'라고 답한다. 꼬마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이게 내일이야?' 하고 물으니 엄마는 다시 '아니, 이건 오늘이고 자고 일어나면 그게 내일이야'라고 답한다. 꼬마가 말한다. '아, 내일은 없는 거구나'라고. 모든 이들이 길 위에, 과정에 있을 뿐이다. 순간을 채워가는 것만이 삶이다. 길 위가 집이고 고향이다."

그는 현재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 중에 특별히 주변부로 밀려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낸다고 했다. 성서 속 여성들을 다루는 성서학 수업을 통해 최소한 한 인격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가난하고 차별 받는 삶을 살아와 위축된 학생들에게 그들이 아름답고 똑똑하다는 것을 인식시켜주고 싶다고 했다. 나아가 그것이 사회 정의로 연결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지고 있다.

"'영성과 사회 정의'라는 과목을 강의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미시시피의 가난한 지역으로 가서 집을 지어 주었다. 다녀온 후 학생들이 자진해서 모금을 하기도 한다. 가능성을 본다. 학생들이 졸업 연설을 할 때 자신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보살펴 준 것에 대해 감사해 한다. 이것이 나의 소명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한국 여성들, 자기 목소리 내기 어려워 해 … '이기적이고, 자기 주장 하는, 나쁜 여자' 돼야"

한국에는 1년에 한 번 여름에 들어온다. 미국에서는 '여성의 원'(The Circle of Woman)이라는 제목으로 피정을 해 왔다. 박정은 수녀는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이 집합인 원의 개념이 좋다"면서 "어떤 공동체에 있느냐에 따라 피정의 흐름이 매우 다르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나르시시즘과 개인주의가 강한 나라여서 '이게 나야. 그게 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미국 여성들과 영성지도를 할 때는 '주변을 보라'고 이끈다. 그러나 한국 여성들은 아직도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 한다. 외부의 눈총이 많다. 그런 한국 여성들에게는 '이기적이 되라. 나쁜 여자가 되라. 네 주장을 하라'고 말한다."

박정은 수녀는 이와 같은 여성 피정을 한국에서도 해 보고자 계획 중이며, 올해 하반기에는 지도 교수였던 샌드라 슈나이더스의 <계시적 텍스트>(The Revelatory Text―Interpreting the New Testament as Scared Scripture)를 번역해서  가톨릭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