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부산 특강-서공석 신부] 오늘을 위한 그리스도신앙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신앙언어를 생각해보자. 하느님은 창조주, 최고로 높으신 분, 절대자, 전능, 전지, 전재하신 분,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이다. 그 분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라 부른다.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기적적으로 탄생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 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에게 전권을 주셨다. 베드로의 후계자가 교황이고, 교황이 임명한 사람들이 주교이며 주교들이 임명한 신부들이다. 그들은 다스리는 목자고 신자들은 순종해야 하는 양떼이다.

과거 사회에는 다스리는 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다스리는 자의 땅에서 황공하게 살았다. 그 다스리는 자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생존권을 잃게 하는 죄였다. 사람들은 그 최고 통치자를 대리하는 분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야 했다. 유럽 중세 사회가 11세기부터 공들여 세운 고딕 성당들의 모습이 그런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 성당에 사람이 들어서면, 위만 쳐다보게 되어 있다. 사람은 위를 쳐다보고,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왜소한지를 알고, 자기의 분수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윗사람을 섬기듯이 하느님을 섬기고, 윗사람의 성은이 망극하듯이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보내어 죽게 했다는 사실도 그저 망극하게 은혜로운 일이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과학적 사고를 하며 산다. 민주적 사고에서 사람은 모두 평등하고, 각자 자기의 자유 선택권을 행사하면서 인간의 품위를 보존하며 산다. 각자는 자기 나라에서 살고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도 국민이 뽑는다. 우리는 또한 과학적 사고를 한다. 천재지변은 하느님의 노여움이 아니다. 병고는 귀신을 불러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의료기관에 가서 좋은 의료인을 만나서 고친다. 현대인은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현대인의 과학적 감수성은 사물의 존재를 논하지 않고, 그 사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과정(過程)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1. 성서와 전통

신약성서와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복음 체험에 대한 시대적 증언이며 표현이다. 성서와 전통은 우리가 배워 익혀야 하는 진리 내용이 아니라, 신앙인이 해석해서 알아들어야 하는 문서다. 성서는 교회 안에 발생한 모든 신앙 언어의 해석을 위해 최종적 권위를 갖지만, 그 시대 특정 지역의 역사적 신앙 체험을 증언하는 문서다. 따라서 우리가 해석해야 하는 문서다. 전통은 성서가 전하는 신앙 체험으로 발생한 각 시대의 증언들이다. 성서나 전통의 문서 안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신앙인의 삶이고, 성서와 전통의 문서들은 과거의 삶을 문자화하여 전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모세 사건이나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사람들에게 삶의 변화를 일으켰다. 따라서 진리는 신앙인의 삶 안에 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그리스도인은 실천을 도외시하고 성서의 이론적 해석에 머물 수는 없다. 신앙은 실천보다 먼저 있는 이론이 아니다. 실천이 신앙의 장(場)으로 부각되면서 신앙 이해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신앙생활은 교리를 배우고, 계명을 지켜, 은총을 얻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이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간 삶의 시대적, 지역적 새로운 가능성들의 원동력이다.

신약성서 언어는 우리의 실천을 요구한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마태 7,21)라는 말씀을 비롯해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마태 7,24)는 말씀은 실천, 곧 인간의 삶이 믿음이며, 진리라고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요한 1,14)는 것은 하나의 삶이 발생하였다는 말이고, “그분은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셨다.”(요한 1,12)는 것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자녀의 실천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말로 이해된다.

2. 예수의 역사적 모습

우리가 가진 신약성서 중에 특히 네 개의 복음서들은 예수의 전기(傳記)를 기록하는 것 같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전기이기보다는 예수를 믿고 따랐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생한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예수에 대해 회상한 바와 그들이 하던 실천을 수록한 것이다. 오늘 신문의 사실보도(事實報道) 기사와는 전혀 다른 문서다. 요한복음서는 그 마지막에 “이런 일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한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20,31)라고 말한다. 복음서들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만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예수에 대한 증언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기원전 6년경부터 기원 후 30년 4월 7일까지 팔레스티나에 생존했다는 사실은 오늘 신학이 의심하지 않는다. 예수에 대한 객관적 전기는 쓸 수 없다. 예수의 용모와 자아의식에 대해서도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유년복음이라 부르는 마태오복음서(1-2장)와 루가복음서(1-2장)가 전기적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공동체가 구약성서의 인물들, 특히 모세의 이야기를 본 따서 서술하여, 예수가 그들의 믿음에 비추어 어떤 분인지를 말한다. 부활하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가 예수는 구약성서를 완성시키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기록한 신학적 작품이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과 유년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화해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초기교회의 해석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아야 한다. 예수가 일시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살아 있었다. 그들은 그 세례 사실을 들어 그들의 스승이 세례를 받은 예수보다 더 위대하다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복음 선포에 혼선을 빚을 수 있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세례자 요한을 “예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는” 인물이라고 언급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에 비하면 종도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루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예수가 세례 받았다는 사실은 언급하면서도,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복음서들이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그렇게 부담스러워 하는 것을 보면, 그 세례는 사실로 보아야 한다.

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렸다는 언급들도 사실로 보아야 한다. 당시 유대교 기득권자들인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예수가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려 음식을 든다고 비난하는 사실을 복음서(마르 2,16)가 전한다. 예수가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은 복음서들 안에 자주 나오는 비난이고, 유대인들이 지키던 정결례법(마르 7,1-23)을 폐기한다는 말도 예수 생애에 대한 확실한 증언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말들은 모두 유대인으로 된 초기 신앙 공동체에서 예수에게 불리하고, 불명예스러운 증언들이기에 역사적 사실로 보아야 한다.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보인다. 일부 사람들에게 예수는 감탄스런 예언자였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기성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거짓 예언자로 보였다. 그래서 예수는 처형된다. 예수의 설교 행각이 일부 사람들에게 성공을 거두지 않았다면, 그를 죽이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다.

한 인물이 어떤 실재였던가를 확실하게 알려면, 그 인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인물을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과 그 인물을 미워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보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며, 또한 그들이 밝히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을 그렇게 믿고 설교한 예수가 왜 비운의 죽음을 당해야 했던가 하는 문제다. 따라서 신약성서는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믿음뿐 아니라, 예수를 죽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미워한 동기도 담고 있다.

과거의 한 인물이 보여 준 사상과 실천을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그 인물이 어떤 전통 안에 살았으며, 그 전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평가를 하였는 지를 보아야 한다. 또 한 가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 인물 이후, 그 사람의 사상과 실천이 역사 안에 어떤 삶들을 발생시켰는지도 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신약성서다.

3. 예수 이전의 유대교 전승

유대교의 발생은 기원전 1250년 경 이집트 탈출이라는 일대 역사를 일으키는 모세와 하느님의 계약에서 볼 수 있다. 그 계약의 핵심은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고, 인간은 그 함께 계심을 존중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탈출기는 “나 너와 함께 있다.”(3,12)는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 그분이 함께 계신다는 동사에서 만들어진 이름을 말하면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사람의 실천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요약한 것이 십계명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시는 분이다. 함께 가셔야 한다는 모세의 기도에 “내가 친히 너를 데리고 가서 너를 편하게 하리라.”(탈출 33,14)고 답하신다. 모세의 기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하자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 “그러나 내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탈출 33,18-23).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하는 사람들 안에서 당신의 얼굴을 보라는 말씀이다. 결국 하느님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선하게 변한 사람들의 삶 안에서 확인된다는 말이다.

40년이 걸렸다는 에짚트 탈출 사건 중에 모세를 통한 각가지 기적들은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과 그분은 과연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해 주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제사가 있는 것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우리의 왕, 우리의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양식을 말한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람이 변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율법과 제사를 잘 지켜서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얻어내는, 자기 소원 성취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율법과 제사의 상징성(象徵性)은 사라지고, 하느님은 율법과 제사 의례 뒤에 은폐된다.

이스라엘 안에 맏아들, 혹은 맏물의 봉헌이 있는 것은 하느님에게 그런 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식이나 사물을 보겠다는 상징적 행위이다. 이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사는 길이다. 자식이든 자기 노동의 산물이든 사람은 자기의 이해(利害)를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에서 그 사물이 지니는 의미를 알고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을 표현하는 베풂이라는 것의 의미도 상실되고, 율법과 제사를 빙자하여, 인간은 재물과 지위와 권력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대상인 하느님이 되었다. 이런 사실에 반발해서 일어나는 것이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이스라엘이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를 외쳤다. 하느님을 자기 이득 추구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원초의 계약이 의미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외침이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 하러 이 많은 제물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수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1-17).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로하는 마음 개울같이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말이야?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다 나의 것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 소를 죽여 바치는 자가 사람도 죽여 바치고 양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가 개의 목을 꺾어 바치는구나”(이사 66,1-4).

수많은 예언자들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함께 계심’이라는 계약의 의미를 살지 못하였다.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삶의 모습은 퇴색되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기 위해, 율법 조항은 많아지고, 제사 의례의 준수는 엄격해졌다. 율법과 제사의례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상기시키지 않고, 사람을 차별하고, 단죄하는 수단이 되었다. 병자, 불구자를 비롯한 모든 불행한 사람들은 율법과 제사에 충실하지 못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은 것으로 인식되었다(요한 9,2). 율사들은 율법을 빙자하여 죄인을 만들고, 사제들은 제사를 빙자하여 죄인을 만든다. 이런 시기에 예수가 출현하였다.

4. 예수의 활동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하느님은 함께 계시고, 그 함께 계심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하느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가르치던 사람들, 곧 죄인들, 세리들, 버려진 사람들과 어울렸다. 하느님은 사람을 버리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고 율법은 그 ‘함께 계심’을 사는 실천을 위한 지침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마르 2,27). 예수는 병도 고치고, 죄도 용서한다(마르 2,1-12; 루가 7,36-50; 요한 8,1-11).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 발생하는 시비는 안식일이 하느님의 날이기에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예수의 행위 때문에 일어난다(루가 6,6-11; 13,10-17; 요한 5,1-18; 9,1-12). 하느님을 믿고, 그 함께 계심을 사는 사람은 그분의 선하심, 곧 자비와 용서를 실천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만 선포하였지, 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라는 그 시대 유대인 사회에서는 파격적인 호칭으로 불렀다(마르 14,36; 갈라 4,6; 로마 8,15). 아버지는 아들의 삶의 기원이고 권위와 가르침이다.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당연히 어머니의 역할도 들어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기준으로 산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루가 21,42; 마태 26,42; 요한 4,34; 5,30; 6,38)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를 반영한다.

예수의 메시지, 행위, 삶의 방식, 기적, 세리와 죄인들에 대한 예수의 자세, 율법과 성전에 대한 그분의 태도에서 초기 신앙인들은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일”(요한 9,3)을 본다. 하느님의 일,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김’을 실천한 것이 예수의 삶이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부합하는 삶이었다. 하느님은 그분과 함께 계셨고, 그분은 그 함께 계심을 철저하게 살았다. 초기교회가 아라메아어인 ‘아빠’라는 호칭을 그리스어 신약성서 안에 굳이 보존하여 전한 것은 예수의 삶이 지닌 특수성의 원천이 되는 체험을 담고 있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는 하나의 대조를 보고 있다. 인간 고통과 재해의 역사, 폭력과 불의의 역사 앞에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선하심은 대조를 이룬다. 아버지는 은혜롭고 악을 거스르는 분, 악이 마지막 말이 되지 않게 하시는 분, 미래를 주시는 분이다. 예수는 이 ‘아빠’체험으로 이 세상의 역사가 주지 못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예수는 하느님에 대한 자기의 체험이 독창적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가능성과 확신을 사람들 안에 심는다. 예수의 ‘아빠’체험은 사람들을 아끼고 자유롭게 하는 힘이신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다. “선하신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마르 10,17-18)는 말씀과, 이어서 나오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하느님은 무슨 일이나 다하실 수 있습니다.”(10,27)는 말씀은 예수가 어떤 체험의 장에서 살고 있는 지를 엿보게 해 준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인간이 변한다. 아버지에 준해서 아들이 변한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기에 사람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3-35).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기에 사람도 베풀어야 한다(마태 5,40-42; 루가 19,1-10; 마태 25,14-30; 25,31-46).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까지 가는 지를 보여 준다. 죽음을 앞두고도, 예수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실천을 중단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죽음 앞에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 예수를 포기한다. 그들은 게쎄마니에서 잠들고, 그들이 깨어났을 때는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다. 예수는 자기의 실패 앞에 하느님이 하시는 일만 가치 있다는 사실을 믿고, 하느님을 부르면서 자기가 변할 것을 받아들인다.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도, 예수가 믿었던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준한 예수의 실천은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라는 기도로써 예수의 생애를 끝맺는 루가복음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끝까지 간, 예수의 최후를 잘 요약한다. 예수의 부활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끝까지 충실하였던 삶의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5. 예수의 부활

부활, 승천, 성령강림을 시기적으로 분리한 것은 사도행전을 쓴 사람의 각색이다. 하느님은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분과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예수가 한 실천을 하는 사람들 안에도 그분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죽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부활사건은 우리 확인의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빈 무덤의 발견과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이라는, 복음서가 전하는 두 종류의 사화(史話)들은 죽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증언이 지배하고 있다. 증언은 증언하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담아서 전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 양식이다.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말은 하느님이 그를 거두셔서, 당신과 함께 계시게 했다는 말이다. 하느님과 부활하신 분은 우리가 관찰하거나 확인할 수 없고, 다만 우리의 삶 안에서 그분의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김’의 실천 곧 그분의 ‘뒷모습’(탈출 33,23)만 볼 수 있다. 부활하신 분에 대해서는 증언만 있다.

죽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신앙 증언에는 제자들의 변화된 삶이 포함된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그분은 내 것을 받아서 여러분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요한 16,13-14).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우리는 그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입니다.”(요한 14,23).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예수의 실천이 우리 안에서 발생하고 예수의 실천 안에는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말하는 의인화(擬人化) 경향에서 좀 벗어나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원(圓)인데 그 원의 중심은 곳곳에 있고, 그 원의 한계는 아무데도 없다고 상상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실천이 발생하는 곳에 그 원의 중심이 있다. 아버지도 예수도 성령도 하나가 되어 중심을 이룬다. 그런데 그 중심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있는 곳곳에 있고, 그 원의 한계는 없기에, 한계선을 긋기 위한 우리의 어떤 시도도 헛된 것이다. 우리의 척도로써 하느님에게 한계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승천은 예수의 개별성을 넘어서 하느님의 보편성 안에서 그분 실천의 의미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는 지도자로 이 세상에 군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도행전이 각색한 성령강림 장면은 그리스도 신앙은 이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데, 그것은 바벨탑의 이야기와 같이 모두가 하나의 언어를 말하게 통제된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고유한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4,24)고 표현할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는 인간적인 것보다 더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인간적인 것보다 더 있다는 말은 일상성(日常性)을 넘어서는 비범한 현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사필귀정(事必歸正) 등의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자비, 용서, 사랑 등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메시아로 일컬어진다.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인간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은 메시아다. 자기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 준 메시아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베푸심을 사는 실천이 발생한다. 예수는 왕이신 메시아인데, 그 왕국에서는 베풂의 실천이 계속 발생한다. 사람을 위해 하느님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람이 변하는 나라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진다. 예수를 지배한 ‘아빠’체험, 곧 하느님이 중심에 계신, 그분의 실천을 회상하면서 하는 신앙고백이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는 것은 그를 높이는 말이 아니다. 예수 안에 하느님의 자녀 되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인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후에 니체아공의회(325년)는 아버지와 아들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아리우스(Arius)의 위험 앞에 “아버지와 아들은 실체적(實體的)으로 동일하다.”고 표현할 것이다. 예수를 보면 실제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시대 철학의 언어를 빌려 표현한 것이다.

성서는 인간을 희생시켜 하느님이 혜택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살게 하기 위해 하느님이 스스로를 베푸셨다고 말한다. 최후만찬에서 예수는 당신의 죽음이 베풂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언설(言說) 안에 계시지 않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기 위해 이 세상의 악(惡)을 퇴치하는 노력을 진지하게 하는 삶 안에 살아 계신다. 인간을 위한 봉사를 하느님에게 바치는 가장 좋은 예배라고 생각하고, 침묵 가운데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고,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통속적이고 기복(祈福)적 언어가 틀렸음을 말한다.

6. 그리스도인

교회는 성찬(聖餐)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성찬에서 빵을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른다. 빵은 대자연의 산물이고 내 노동의 결정체다. 나는 그것을 나만을 위해 먹을 수 있지만, 우리는 성찬에서 그것을 하느님의 시선 안에 놓은 후부터,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른다.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진 몸이고, 자기 스스로를 죽기까지 내어준 몸이다.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그분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그분의 피라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우리 자신도 ‘내어주고 쏟는’ 삶을 살겠다는 상징성을 지닌 행위이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생명을 살았던 예수님을 배워 살겠다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자비하신 하느님, 용서하시는 하느님,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예수님을 만나 변한 자캐오의 이야기(루가 19,1-10)는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예수는 그 생애 중에 교회를 설립하지 않았다. 예수는 실패의 인물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도망갔다. 예수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죽기까지 변하였다. 예수의 수난사가 예수 한 사람이 겪는 고독한 과정으로 보이는 것은 예수가 홀로 여는 길이 있었다는 것이다. 죽음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교회 출현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교회는 성찬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 성찬은 바로 예수의 ‘내어줌과 쏟음’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수난의 과정은 교회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하고 교회를 정초(定礎)한다. 예수는 떠나고, 성찬을 거행하며, 예수가 겪은 과정을 자기 안에 실현하며 사는 사람들이 교회가 된다.

예수는 당신을 아버지께 내어 맡기고 죽음으로 나갔다. 제자들에게도 아버지께 내어 맡김이 당신의 길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제자들이 교회가 되면서 “아버지가 맡겨 주신 사람들”(요한 17,6)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아버지를 중심으로 살도록 아버지께 내어 맡겨 드려야 한다. 사도들은 자기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변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행사할 권한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이 목자이고, 신약성서에서는 예수가 목자이다.

나오면서

창세기 3장은 사람이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고 말한다. 선과 악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며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사람은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간다.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간다.”(창세 3,19)는 말이 나타났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역사도 시작한다.

계약의 하느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발생하는 실천을 요약하는 율법이었지만, 사람은 선악(善惡)을 아는 수단으로 율법을 전락시키고, 율법을 도구로 자기중심적 삶을 찾았다. 그러면서 율법을 구실로 사람을 소외시키고, 죄인으로 단죄하는 유대교의 비극이 시작한다.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김’은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자세가 아니다.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루가 10,29-37)는 어떤 자세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지를 말해 준다.

이 세상에는 불행과 악(惡)이 있다. 유대교 기득권층이 가르치듯이 불행과 악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선하신 하느님이 악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불행과 악은 우리가 그 원인을 논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퇴치하는 노력을 하기 위해 있다. 예수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분으로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악을 퇴치하는 노력을 하다가 자기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면, 우리도 예수가 한 실천을 해야 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주제로 ‘하느님과 함께 삶’이라는 실천을 가르쳤다. 율법만 보이고 하느님이 사라진 하늘에, 예수는 스스로 율법을 범하여 구멍을 뚫어 하느님을 보도록 하였다. 율법만 보지 말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보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 하느님을 보면서 그 분을 중심으로 살았다. 그것은 죽기까지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십자가는 말한다.

예수가 남긴 성찬은 예수의 실천을 우리 안에 재생시키는 성사(聖事)다. 성체는 모셔 놓고 공경하기 위함이 아니라, 먹고 마시기 위해 있다. 그 먹고 마심은 예수의 실천이 우리의 살과 피가 되게 한다. 성찬을 “새로운 계약”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성찬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사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우리도 ‘내어 주는 몸’, ‘쏟는 피’가 되어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화려함, 막강함, 풍요로움이 주어지지 않는다. 내어주고 쏟음이라는 실천이 나타난다.

기원 후 100년경에 기록된 요한복음서는 최후만찬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고, 예수가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이야기를 한다. 그 때 이미 교회 공동체들은 성찬을 하고 있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성찬이 먹고 마시는 허례허식이 될 것을 우려하여 성찬의례의 양식을 반복 보도하기보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이야기를 만들어 넣었다. “제 발만은 절대로 못 씻으십니다.”라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내가 당신을 씻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몫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13,8)라고 말한다. 예수와 같은 몫, 곧 예수로 말미암은 신앙은 발 씻김이 의미하는 종과 같은 봉사에 있다는 말이다. 발을 씻어주는 것은 종의 몫이다. 성찬은 그런 봉사로 사람들을 부른다.

복음이 퇴조하면 ‘믿어라, 지켜라, 바쳐라.’고 말하는 민속종교의 언어가 발생한다. 그리고 복음은 기쁜 소식도 아니고, 그 빛을 잃는다. 우리는 역사 안에, 또 사회 안에 살아가기에 그 시대, 그 사회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 그 시대에서 얻은 것을 청산해야 한다.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는 청산하지 못한 과거 유럽 중세의 것이 많아서 복음은 퇴색하고, 유럽 중세 사람들의 실천이 더 많이 보인다. 판공성사, 주일 의무, 봉사직무자들에 대한 신분적 개념, 순종의 강요 등을 들 수 있다. 유럽에서 신자들의 교회 이탈 현상이 일어난 것은 자유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되면서이다.

구약성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 안에 흐르고 있는 핵심적인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우리의 실천 안에 그 사실이 확인된다. 인류역사 안에 발생한 많은 민속 종교들이 인간을 위해 하느님을 변하게 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유대-그리스도 신앙은 전혀 다르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인간이 변하고, 하느님이 아버지이시면, 그 분을 기원으로 한 생명을 내가 사는 것이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고린 5,17).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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