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부산 특강-정양모 신부] 예수의 기도-우리의 기도

이 강의에서 먼저 예수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 예수님의 감사기도, 예수님의 게세마니 간구를 우선 차례로 살피겠다.

1. 주님의 기도(마태 6,9-13≒루가 11,2-4)

본문

풀이
주님의 기도는 마태 6,9-13과 루가 11,2-4에 나온다. 마태오와 루가는 예수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인 주님의 기도를 예수어록에서 베꼈는데, 마태오의 기도문은 길고 루가의 기도문은 짧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루가는 예수어록에 실린 주님의 기도를 비교적 충실히 옮겨 쓴데 비해서 마태오는 제법 가필했다는 게 통설이다. 우리는 마태오의 긴 형태에 따라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까닭에 마태오의 형태에 따라서 풀이코자 한다.

호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태오)/ “아버지”(루가)

유대인들은 예나 이제나 하느님께 기도할 때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한다. 마태오는 시리아 지방에 살던 유대계 그리스도교의 율사로서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신칭을 썼다. 그러나 예수어록을 충실히 베낀 루가복음에는 “아버지”라고 한다. 이것을 예수님 모국어 아람어로 되 번역 하면 “압바”이겠다(마르 14,36참조). “압바”는 어린이가 말을 배우면서 생부를 부르는 아가어(小兒語)이다. 아가가 어른이 되어서도 생부를 아빠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부자간의 관계가 매우 친밀할 때 그렇게 부른다. 예수께서 머나먼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을 얼마나 정겹게 느끼셨으면 “아빠”라고 부르셨을까?

하느님이 예수 당신의 아빠시라면, 당연히 예수 자신은 하느님 아빠 품에 안긴 아가로 의식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영성? 부자유친이다. 괴팅겐의 석학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평생 “아빠” 신칭을 연구해 보니, 이스라엘 역사상 하느님을 아빠로 부른 시조는 예수시고, 예수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다는(갈라 4,6; 로마 8,15)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예레미아스는 유대교 랍비 친구들을 찾아가서, 하느님을 압바라고 부르면 정답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랍비들은 한결 같이 손사래를 치면서 “어, 무엄한지고!”라고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간구 1: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직역하면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인데, 직역은 천부당만부당하다. 하느님을 단수 이인칭 “당신”이라고 하는 것은 무례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평소 속된 하느님이 도를 닦아서 거룩하게 탈바꿈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째 간구의 참 뜻인즉 이렇다.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의 정체다. 하느님 자신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은 꼭꼭 숨어계신 임이시라 세상에서 도통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오죽하면 당신의 존재조차 부인하는 무신론이 성할까. 지금 꼭꼭 숨어계신 지성 하느님의 정체가 신정(神政)이 도래해서 환히 드러나기를 비는 간구로 보면 무난하다.

간구 2: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직역하면 “당신의 왕정(王政)이 오소서”이다. 하느님께서 온누리의 임금으로 어서 오시어 선정(善政)을 펴시기를 비는 간구다. 비정한 인간들의 폭정은 물러가고 지선하신 하느님의 선정이 하루 빨리 도래하기를 비는 간구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묵시문학적 시대분위기에서 종말 신정의 도래를 비는 간구임에는 틀림없다. 묵시문학적 종말 기대가 사라진 우리의 입장에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네 인생을 지금도 종생에도 보살펴 주십사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좋겠다.

간구1-2와 흡사한 기도가 유대인들이 회당 예배 때 마다 바치는 아람어 기도문 까디쉬 인데 직역하면 이렇다. “당신 뜻에 따라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느님의 크신 이름이 더욱 크게 되고 거룩하게 되소서. 여러분의 생애에, 여러분이 살아 있을 때, 온 이스라엘 백성의 생애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왕정을 어서 빨리 펴소서.” 예수시대 사람들도 까디쉬 기도문을 바쳤다고 한다면 주님의기도 간구 1-2의 경우,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문을 따왔다고 하겠다.

간구 3: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마태오가 가필한 간구3을 직역하면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다. 간구 3에 있는 하느님의 뜻은? 우선,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뜻, 곧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가리킨다.(마태 18,14). 아울러, 예수께서 우리에게 밝히신 하느님의 뜻, 곧 하느님의 요구 의지를 가리키기도 한다(마태 7,21; 12,50; 21,28․31).

보다시피 주님의 기도 간구 1-3에선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을 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세상만사에 앞서 하느님을 앞세우셨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에서 주동자는 틀림없이 하느님이시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역할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겠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극진히 섬겨야만 하느님의 성스러운 정체가 세상에 빛날 것이다. 우리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극진히 닮아야만 하느님의 선하신 보살핌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요구 의지를 받들어야만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실현될 것이다.

간구 4: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리스어 “에피우시온”을 여기선 “일용할”이라고 번역했는데, 달리 다양하게 번역할 수도 있다(졸저《마태오복음 이야기》, 77-79쪽, 참조). 간구 4를 직역한다면 “오늘 저희에게 저희의 일용할 빵을 주소서”이다. 지중해 주변 여러 민족은 주식이 빵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품의 대표로, 아니 의식주의 대표로 빵을 간청한다. 부분으로 전체를 가리키는 히브리식 제유법이다. 우리가 함께 먹을 “빵을” 청한다지만, 실은 먹거리를 청하는 것이요, 나아가서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세 가지 물질적 조건인 의식주를 간청하는 것이다.

간구 4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걱정하지 말라”(마태 6,25-34=루가 12,22-32)고 하신 훈계와 썩 잘 어울린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진심으로 이 간구를 바친다면 혼자서만 독식하지 않고 빈자들의 의식주를 돌보는 삶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오로 6세 교황의 말씀이 생각난다. 자신이 먹고도 남는 음식은 빈자의 몫이다, 자신이 입고도 남는 옷은 빈자의 몫이다, 라는 명언을 새길 일이다.

간구 5: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직역하면 “저희에게 빚진 이들을 저희가 삭쳐주었듯이 저희 빛들을 삭쳐주소서.” 빚은 죄를 가리키는 은유다. 예수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 “호바”는 빚과 죄 두 가지 뜻을 다 지니고 있는 낱말이다. 남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만 자신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예수께서는 강조하시곤 했다(마태 5,23-24; 마태 6,14= 마르 11,25). 그렇지만 사람은 좁쌀만큼 협량해서 자기에게 손해를 보인 사람을 용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먼저 하느님의 크신 용서를 체험해야만,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기 쉬울 것이다(마태 18,23-35). 그럼 남의 죄를 무조건 용서할까? 그렇지는 않다. 남이 잘못을 뉘우치면 기꺼이 용서하라고 하셨다(루가 17,3-4=마태 18,15․21-22).

간구 6: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인생의 허구 많은 유혹 가운데서 어떤 유혹을 가리키는 간구인다? 네 가지 단상을 차례로 적어본다.

① 주님의 기도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다. 그러니 간구 6은, 제자들이 예수 추종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라고 보면 무난하겠다.

② 하느님의 이름․나라․뜻과 관련하여 풀이한다면, 하느님 없이도 세상이 너무 잘 돌아가는 판이다. 자신으로 만족하는 자만 자족의 유혹이라 하겠다.

③ 간구 4와 관련하여 풀이한다면, 혼자 먹으려는 독식의 유혹, 잔뜩 쌓아놓고 혼자서만 먹으려는 식탐의 유혹이라 하겠다. 불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탐진치의 유혹이겠다.

④ 간구 5와 관련하여 풀이한다면, 하느님과도 화해하지 않고 남과도 화해하지 않으려는 불목의 유혹이라 하겠다.

간구 7: “악에서 구하소서”

간구 7은 마태오의 가필이라, 루가복음서에는 없다. 이 간구에 나오는 명사를 남성명사(그리스어로 포네로스)로 보면 “악한자에게서 구하소서”라고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악한자”는 마귀들의 두목 사탄을 뜻한다(마태 13,19․38). 그러나 간구 7의 명사를 중성명사 (그리스어로 포네론)로 보면 “악에서 구하소서”가 된다.

주님의 기도 한 뜻

주님의 기도 짜임새를 보면 하느님의 이름․하느님의 뜻을 두고 비는 “하느님 간구”가 먼저 나온다. 이어서 우리 양식, 우리 사죄, 사탄의 유혹에서의 구출을 비는 “우리 간구”가 나온다. 주님의 기도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아빠의 돌보심에 힘입어 우리가 우리의 나날을 꾸려가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대짜배기 기도문이다. 어쩜, 예수님의 핵심 훈계인 사랑의 이중계명과 그렇게도 잘 어울릴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하느님은 자애로운 아빠시오, 우리는 그 품에 안겨 노니는 아가들이다.

우리는 우선 하느님 아빠께서 당신 이름과 나라와 뜻을 펴십사고 간구한다. 이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사고 간구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먹거리를 비롯해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간구한다. 그리고 용서받고 용서하고 또 용서받는 화해의 삶을 누리고 싶다고 아뢴다. 연이어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사고 빈다. 추종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 하느님 없이 자족자만하려는 유혹, 먹거리를 독식, 폭식하려는 유혹, 불목하려는 유혹을 이기는 힘을 주십사고 간구한다. 이 얼마나 진솔한 간구인가!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쉘비 스퐁은 우리시대의 교회개혁을 부르짖어 많은 자극을 주는 분이다. 그런데 이런 분이 주님의기도 무용론을 부르짖다니 아연 실색할 뿐이다(존 쉘비 스퐁 감독 지음, 김준우 옮김,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2001, 한국기독교연구소, 169-183쪽 참조).


2. 예수의 감사기도(마태 11,25-26=루가 10,21) 

예수의 감사기도 본문

“25그 때에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이것들을 감추시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이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아버지를 찬양하나이다. 26예,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처럼 이루어졌나이다.’” 

편집과 전승

마태오와 루가는 예수어록에서 예수의 감사기도를 옮겨 쓰면서 제각기 도입문을 가필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마태 11,25a). “같은 시간에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흥겨워하시며 말씀하셨다(루가 10,21a). 감사기도(마태 11,25-26=루가 10,21)에 이어서 이미 어록에, 하느님과 예수는 서로 잘 안다는 상호 이해 구절이 나온다(마태 11,25-26=루가 10,22). 상호 이해 구절은 전승자가 예수의 감사기도를 명상하고 풀이한 말씀이 아닐까 한다. 상호 이해 구절은 예수님의 말씀이기보다는 감사기도가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던 구전과정 중에 불어난 말씀인 것 같다. 따라서 여기선 감사기도 본문만(마태 11,25-26) 눈여겨 보겠다. 

예수의 감사기도 풀이

기도는 독백이 아니고 대화다. 기도하는 사람은 초월자를 의식하고 부르기 마련이다. 예수께서는 감사기도에서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라고 하신다. 예수의 하느님은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요 온누리를 보살피시는 섭리주시다. 창조주 섭리주는 아버지시기도 한데, 예수께서는 점잖게 아버지, 아버님이라 부르지 않고 아가 말(小兒語)을 빌려서 “아빠”라고 하셨다(마르 14,36). 우리에겐 머나먼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을 예수는 너무도 가깝게 너무도 정겹게 느끼셨기에 아빠라는 호칭을 쓰셨다.

유대교 역사상 예수께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고 그 영향으로 1세기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을 그렇게 불렀다(갈라 4,6; 로마 8,15). 요즘 여성신학계에선 수천 년 동안 하느님을 남성명사로 부르는 데에 반기를 들고, 이제 부터는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안 될 게 하나도 없다. 언어혼란만 방지한다면, 예수의 감사기도 내용은 간결하다.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이것들을 감추시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이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아버지를 찬양하나이다.” 기도문에 “찬양하다”라는 동사가 나오니까 찬양기도라고 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작은 성공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린다. 찬양기도와 감사기도는 형식과 내용이 많이 닮은 사실을 감안하면 좋겠다.

하느님께서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이것들을 감추셨다.”고 한다.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선민 가운데서 많이 배운 사람들, 곧 율사들이겠다. 사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계 율사들과 자주 대립하곤 하셨다(박태식,《예수의 논쟁사화》, 2009 늘봄). 그럼 “어리석은 사람들(그리스어로 네피오이, 히브리어로 페타임)”은 누구일까? 넓게 보면 어리석은 이들은 예수를 영접한 군중이겠다. 율법을 잘 알지도 못하고, 아는 것도 잘 지키지 못하던 군중, 그래서 저주받은 군중(요한 7,9)이 똑똑한 율사들이나 열심한 바리사이들보다 예수를 환호했다.

때로는 소경이 눈 밝은 사람보다 사물을 더 잘 보는 법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좁힌다면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열 두 제자들과 갈릴래아 출신 부인들이겠다.(루가 8,1-3). 하느님께서 어리석은 사람들, 곧 제자들에게는 계시하신 “이것들”,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 곧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감추신 “이것들”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 예수께서 이룩하신 구원을 가리키겠다. 곧, 똑똑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의 언행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무지렁이 제자들과 부인들이 그나마 예수 언행의 의미를 간파한 사실을 두고 예수께서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하겠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서 배척을 받으셨으니 크게 보면 실패하셨다. 그러나 성과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배우지 못한 쌍것들이 당신을 따랐으니 병아리 눈물만큼 성공을 거두신 셈이다. 이 하찮은 결실을 두고 예수께서는 감읍하신 나머지 이 감사기도를 드렸다. 

우리의 감사기도

일이 잘 풀리면 감사기도도 드리고 감사미사도 바친다. 그러나 일이 영 안 풀리면 남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기 일쑤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불행을 겪는 가운데서도 감사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재산을 잃었어도 건강하면 복이요, 건강을 잃었어도 명예를 지킨다면 이 또한 복이다. 세상을 다 잃어도 한결같이 신심을 지닌다면 큰 복락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고생을 많이 한 사도 바오로가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훈계한 말을 들어보라. “항상 기뻐하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시오(應常歡樂 不斷祈禱 事事感謝- 1데살 5,16-18).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1888-1948)가 쓴 영성소설《시골신부의 일기》의 주인공 불쌍한 시골신부가 객지에서 숨을 거두면서 한 마지막 말이 실로 오묘하다. “아무렴 어떤가, 세상만사 은총인 것을!” 내가 부천 성가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다가, 할머니와 피부병으로 얼굴이 아주 망가진 손녀 학생이 주고받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할머니: “약 잘 먹어야 병이 낫지”
손녀: “약 먹으면 졸려서 공부 못해”
할머니: “공부가 대수냐? 재수하면 되지. 피부암 아닌 것만도 감사해야지!”



3. 예수의 게세마니 간구(마르 14,32-36) 

게세마니 간구 본문

“32예수 일행은 게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않아있으시오〉라고 이르셨다. 33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몹시 놀라고 번민하기 시작하셨다. 34그러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영혼이 죽기까지 몹시 근심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시오.〉 35 그러고서는 조금 앞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가능하다면, 수난시간이 당신을 비켜가게 해주십사고 기도하셨다. 36그리하여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빠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빠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풀이

서기 30년 4월 6일 목요일 저녁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시내 친지 이층 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잡수시고 시편을 읊은 다음 키드론 골짜기를 북상하여 올리브 산기슭에 있는 게세마니 정원으로 가셨다. 특별히 총애하신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5,37-43; 9,2-10)을 따로 데리고서 당신의 비감한 심정을 토로하신 다음 조금 더 나아가서 이렇게 간구하셨다. “아빠, 아빠께는 모든 게 가능하오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빠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이 간구 내용을 뜯어보자.

예수께서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신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아가로서 간구한다. 하느님 아빠는 전능하시니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잔”)을 면케 해 주십사고 아빠께 매달린다. 나이 사십을 못 채우고 죽는 것은 인간적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죽고 만다면 예수께서 철석같이 믿고 추진한 하느님의 일은 어떻게 되나? 이 밤중에 고향 땅 갈릴래아로 달아나서라도 하느님의 일을 계속 추진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이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마침내 예수께서는 이렇게 간구를 마무리 한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빠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예수 당신의 뜻과 하느님 아빠의 뜻이 일치하면 간구를 들어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예수 당신의 뜻을 물리고 아빠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복신앙과 다른 자세인가. 기도에도 스며있는 이기주의적 독소를 없애는 해독제 기도가 있다면 게세마니 간구라 하겠다.

이렇게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인 예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화가가 엘 그레코(1541-1614)이다. 그의 걸작〈십자가를 안고 가는 예수〉(프라도 미술관)를 보면, 예수께서는 눈물이 잔뜩 머금은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 아름다운 손으로 십자가를 끌어안고 계시는 모습니다. 한 없이 슬프지만 아빠의 뜻을 따르겠다는 모습이다.

스리랑카 성공회 교우 날리니 자야수리야(2012년, 86세)가 80세에 그린〈게세마니의 예수〉, (개인 소장)도 인상 깊다. 땅에 엎드려 고개를 푹 숙이고 아빠께 간구하는 예수님 모습이 슬프고도 아름답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

예수의 기도 세 편에 이어, 교회사에서 돋보이는 기도 세 편을 소개하겠는데 우선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들겠다. 아프리카 히포 레기우스(Hippo Regius, 지금의 알제리 안나바 항도)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삼위일체론》,15권을 썼는데, 결론을 내리지 않고 여기 윤문하여 소개하는 기도로써 마무리 했다. 과연 학자의 기도답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

힘자라는 데까지
임께서 주신 힘자라는 데까지
임이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믿는 바를 이치로 알고 싶어서
따지고 따지느라 애썼습니다
임이시여 저의 주님이시여
제게는 둘도 없는 희망이시여
제 간청을 들어 주소서
임을 두고 묻는 데 지치지 않게 하소서
임의 모습 찾고자 늘 몸 달게 하소서
임을 두고 물을 힘을 주소서
임을 알아 뵙게 하신 임이옵기에
갈수록 더욱 알아 뵙게 되리라는
희망을 주신 임이옵기에
임 앞에 제 강함이 있사오니
임 앞에 제 약함이 있사오니
강함은 지켜주소서
약함은 거들어주소서
임 앞에 제 앎이 있사오니
임 앞에 제 모름이 있사오니
임께서 열어주신 곳에
제가 들어가거든 맞아주소서
임께서 닫아거신 곳에
제가 두드리거든 열어주소서
임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임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임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염원을 제 안에 키워주소서
임께서 저를 고쳐놓으실 때까지
고쳐서 완성하실 때까지
 


평화의 기도

흔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성인이 이 기도문을 지었다고 생각한다. 해 맑은 성인 프란치스코 말고 어느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기도문을 지을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에서 평화의 기도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작품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그러나 실은 19세기 말 어느 프랑스인이 만든 기도문인데 그 짜임새와 내용이 훌륭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기도는 전 후편으로 짜여 있다. 전편은 역 가치들이 있는 곳에 가치들을 이룩하도록 비는 간구이고, 후 편은 가치들을 내가 누리기보다는 남들이 누리기를 비는 간구다. 이 기도문의 유래를 좀 더 알고 싶은 분은 《생활성서》1989년 3월호 30-32쪽을 보라. 프랑스어 원문에서 평화의 기도를 다시금 번역한다.

주님, 저를 주님 평화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모욕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불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거짓이 있는 곳에 참됨을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주님,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잊음으로써 찾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써 영생으로 부활하는 까닭입니다.

6. 예지를 비는 기도

프랑스 예수회 사제 뤼시엥 뒤발(1918-1984)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여 년간 가수로서 명성을 떨친 분이다. 흔히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감성이 풍부해서 가수활동을 하면서 예수회로부터 지원을 받기보다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었다. 마음을 달래려고, 잠을 청하려고 한 잔 두 잔 술을 마시다가 그만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뒤발 신부는 술을 끊으려고 노력했지만 혼자서는 끊을 수가 없었다. 마침 단주 모임이 있다고 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참석했더니,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다 함께 〈예지를 비는 기도〉를 바치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고 이렇게 적었다.

“신자들이 이처럼 편안하고 무심하게 기도하는 것을 나는 한번도 본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비신자들 또한 저렇게 자유스런 모습으로 조용히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본 일도 없었다. 지금, 자유라는 낱말이 여러분에게 어떤 뜻으로 들리는가? 기도를 드린 다음 모두 일어섰다. 커피와 과일쥬스가 차려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대하는 새 친구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쉴 새 없이 되풀이 했다.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저는 이런 일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뤼시엥 뒤발, 《달과 놀던 아이》, 1990, 성바오로 출판사, 76쪽).

하느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주소서.
아울러 이 둘을 분별하는
예지를 주소서.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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