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의 복음과 세상 이야기]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물질적 조건 세 가지를 꼽으라면 누구나 의식주라고 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먹거리가 제일 중요하다. 그러기에 예수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서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했지 옷가지나 집을 청하라고 하지 않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우리 속담의 뜻도 매한가지다. 그러니 목숨을 이어주는 음식을 두고 깊은 성찰이 없을 수 없다.

예수시대의 식사기도

예수시대 유대인들은 회식할 때 전식, 본식, 후식 순서를 따랐다. 전식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본식을 시작할 때면 가장이나 주빈이 양손에 빵을 들고 찬양기도를 드린 다음에 손님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찬양기도문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하느님이시요, 세상의 임금님이시며,
땅에서 빵을 생산하시는 주님. 찬양받으소서”
(바빌론 탈무드 브라코트 35a).
  

또한 본식 때 손님이 포도주 잔을 받을 때마다 “우리 하느님이시요 세상의 임금님이시며 포도열매를 만드시는 주님, 찬양받으소서”라고 찬양기도를 드렸다. 후식으로는 가장이나 주빈이 큰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길게 바친 다음 손님들이 그 잔을 돌려가며 마셨다.

 

예수께서도 최후만찬 때 유대인들의 식사범절을 따르셨거니와 초세기 그리스도인들도 그랬다. 예로, 서기 100년경 시리아에 살던 어느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쓴 <열두 사도의 가르침> 9-10장에, 당시 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에 앞서 행한 애찬기도문 세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유대인들이 회식할 때 바치던 전식, 본식, 후식의 찬양기도를 본따 그리스도교적으로 창작한 것이다. 애찬기도문 세 편 가운데서 애찬 전식 때 포도주를 두고 바친 기도와 애찬 본식 때 빵을 두고 바친 기도문을 옮겨 적는다.(정양모 역주,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분도출판 1993, 9장 65-70쪽)

애찬 전작 감사기도

우리 아버지,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 대로
당신 종 다윗의 거룩한 포도나무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애찬 빵 감사기도

우리 아버지,
당신 종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
생명과 지식에 대해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히.
이 빵조각이 산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 여기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영광과 권능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식사기도 오관게

우리나라 스님들은 식사 전에 오관게(五觀偈)를 바치는데, 이는 중국 선종의 식사규범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오관게는 다음과 같다 (박선영, ‘우주적 차원과 함께하는 식사문화,’ <종교신학연구>, 제3집, 분도출판사 1990. 158쪽).

첫째, 이 음식이 되기까지, 여기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들이 드린 공을 생각하고     (一 計功多少 量彼來處)
둘째, 나의 덕행이 온전한가, 결함이 있는가를 살피면서 공양을 받는다.   (二 忖己德行 全缺應供)
셋째, 마음을 지키고 잘못을 멀리 하려면
무엇보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삼가야 한다.      (三 防心離過 貪等爲宗 )
넷째, 음식은 진실로 좋은 약으로서 형체가 말라버리는 것을 치료하게 되나니 (四 正事良藥 爲療形枯)
다섯째, 오직 참삶을 이루려고 이 음식을 받는다.       (五 爲成道業 故應受此食)

동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께서는 식사기도의 으뜸으로 오관게를 꼽았다. 선생은 도량 넒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오관게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는데, 그 말씀이 자못 간절하다(김흥호, <사색 10· 제소리·유영모 선생님의 말씀>, 도서출판 풍만 1983, 130-131쪽).

▲ 다석 유영모 만년의 유영모 선생이 구기동 자택을 거닐며 사색하고 있다. ⓒ 씨알재단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바쳤다. ‘바쳤다’는 말은 밥이 되었다는 것이다. 밥이 되었다는 말은 밥을 지을 수 있는 쌀이 되었다는 것이다. 밥을 지을 수 있는 쌀이 되었다는 말은 다 익은 것이다. 성숙하여 무르익은 열매가 된 것이다. 성숙하여 무르익었으니까 밥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제물이 되었다는 말은 무르익었다는 말이다. 인생은 무엇인가 무르익는 것이다. 제물이 되는 것이다. 밥이 되는 것이다. 밥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다. 그래서 오관게에서는 내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고 솔직히 사양한다. 사실 완전한 사람, 익은 사람이 아니고는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 밥은 덜된 사람 먹으라고 지어진 것이 아니라 정말 된 사람에게 공양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밥이 되기까지 하늘과 땅과 하나님과 사람들의 얼마나 많은 손이 가고 또 간 것일까. 한 알 한 알이 금싸라기 같이 익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손이, 정성이, 사랑이 들었을 것인가.

이렇게 알찬 쌀을 쭉정이 같은 내가 먹을 자격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부족한 중생인 우리로서는 떳떳하게 먹을 수가 없다. 참 미안하다. 그렇다고 안 먹을 수 없으니 먹는 것이다. 그런데 먹는 까닭은 구차한 인생의 생명을 연장하자고 먹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연장해서 무엇을 하느냐. 아까운 밥만 썩히지. 그보다는 이제라도 깨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정신을 깨우치는 약으로 먹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밥을 먹고 구차한 인생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무한한 힘의 원동력으로 먹는 것이다. 사람 되게 하는 원동력으로 먹는다. 사람이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먹는다. 그렇게 되면 조금이나마 쌀에 대하여 덜 미안하게 될 것이 아닌가. 내가 쌀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니 그곳에 욕심이 붙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爲成道業) 욕심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뜻을 위하여 깨는 약으로 먹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기 위하여 밥을 먹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기 위하여 밥을 먹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사람이 되려고 먹는 것이지 사람이 안 되려면 먹을 필요가 없다. 사람이 된다는 말을 도(道)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다. 도를 들었다는 말은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사람이 되면 언제나 죽을 수 있다. 알알이 익기만 하면 언제나 떨어질 수 있다. 사람이 되기만 하면 언제나 십자가에 달릴 수 있다. 사람이 되기만 하면 언제나 제물이 될 수 있다. 인생의 목적은 제물이 되는 것이다. 인생도 밥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밥이 되는 것이기에 인생은 밥을 먹는 것이다. 인생이 밥을 먹는 것은 자격이 있어서 먹는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수많은 사람의 덕으로, 대자연의 공로로 주어져서 먹는 것이다.

내가 밥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남이 밥을 지어주어서 먹는 것이다. 가격을 따질 수 없는 무한한 가치와 힘이 합쳐져서 밥이 된 것이다. 우리가 밥을 내 돈 내가 사먹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돈은 밥의 가치의 몇 억 분의 일도 안 된다. 사람들이 수고한 노동력의 대가의 일부를 지불하는 것뿐이다. 밥이 되기까지에는 태양빛과 하늘의 물과 그 밖에 갖은 신비가 총동원되어 지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순수하며 거저 받는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알아야 한다."

밥은 오두 서로 나눠 먹는 것

이제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간구를 다시 살펴보자. 나 혼자 먹을 양식이 아니라 우리가 다 같이 먹을 양식을 간구한다. 그러니 독식은 금물이다. 엄청나게 쌓아놓고 배터지게 먹을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간구한다. 그러니 과식은 금물이다. 이 간구 다음 다음 간구에서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라고 빈다. 여기 유혹의 한 가지 뜻인즉, 독식과 과식하려는 못된 생각을 가리킨다. 김지하 시인은 독식과 과식의 옳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시로 읊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영양섭취 실태를 살펴보면 양극화 현상이 뚜렷하다. 서구 사회는 포식을 넘어 과식이 보편화되었다. 북미와 유럽 어디를 가나 제 몸 하나 주체하지 못하는 영양과잉 뚱보 천지다. 그런가 하면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를 비롯해서 아프리카 거의 모든 나라는 영양실조로 피골이 상접한 몰골 천지다.

1994년 연말 서울 시내 42번 좌석버스를 타고 가다가, 아프리카 난민 돕기 모금을 하는 대학생들이, “단돈 백 원이면 한 명의 목숨을 구하고 담배 한 갑이면 열 명의 목숨을 구하고 커피 한 잔이면 스무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말을 듣고 나는 새삼스레 가슴이 뜨끔했다.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에 비해 아직까지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저지질섭취국(低脂質攝取國)이라니 천만 다행이나, 보건사회부(현재 보건복지부)에서 마련한 <국민생활지침>을 소홀히 한다면 머지않아 서구처럼 영양과잉 뚱보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니 독식·편식·포식·과식을 삼갈 일이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이 해마다 떨어지는 현상도 큰 문제다. 주요 식량 가운데서 쌀만 자국산일 뿐 밀, 콩, 옥수수 등 거의 대부분은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식품 생산자인 농민들을 지금처럼 곤경에 빠뜨리고서야 어찌 좋은 먹거리를 바랄 수 있으랴. 농촌과 농업을 홀대하는 정책이 계속되는 한 ‘신토불이’라는 신통한 구호도 구두선이 되고 말 것이다.

국민도 정부도 자세를 바로잡아야 한다. 농공병진(農工竝進), 말은 좋다. 그러나 실천이 문제다. 한겨레 전체의 젖줄인 농촌과 농업을 아끼자. 농촌에서 묵묵히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에게 감사하자.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이 음식이 되기까지, 여기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들이 드린 공을 생각하자. … 그리고 오직 참삶을 이루려고 이 음식을 받자.”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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