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훈 신부님 8주기 미사에 부쳐

자정이 다 되어서 명동성당에 무대시설과 음향을 실은 대형 트럭 석 대가 들어서자 우리 서너 명은 트럭에 올라 부지런히 장비를 내리고 무대를 쌓고 음향시설을 설치했다. 김승훈 신부님 얼굴이 담긴 대형 현수막을 걸고 플라스틱 의자 5백개를 명동성당 마당 가득히 펼치고 젖은 걸레로 의자 하나하나 정성스레 닦았다. 파랗게 아침이 밝아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한참을 넋놓고 울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 김승훈 신부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일을 시작하고 바로 신부님을 만났으니, 더도 덜도 아닌 딱 1년간의 인연만 주시고 예수님 곁으로 가셨다. 그 짧은 시간에 신부님께 명보성 굴짬뽕을 세 번, 평래옥 만두전골을 두 번이나 얻어먹었으니 나는 짧은 시간이지만 제법 신부님 가까이 있었지 싶다. 김승훈 신부님 장례를 시작으로 시대의 어른들 장례를 십수 번 모셨고 나도 마흔을 바라보고 있으니, 신부님께서 선종하신지 벌써 8년이다.

김승훈 신부님 장례미사와 시민사회장은 정말 대단했다. 5일장을 치루는 동안 명동성당 만남의 방이 좁아서 성모동산 가득, 천막을 치고 돗자리를 깔아 공간을 마련했는데 매일 조문객이 끊이질 않았다. 왜 박원순 변호사가 김승훈 신부님은 천주교만의 신부님이 아니라고 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할까?

천주교 사제들과 신자들을 비롯하여 타 종단 원로들은 물론이고 노동운동, 통일운동, 여성계, 인권운동, 시민사회 운동 진영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민가협, 유가협 어머니들은 두 세번씩 명동성당을 찾으셨고 장기수 선생님들은 며칠 밤을 우리와 함께 명동에서 보내셨다.

입관미사와 장례미사 두 차례 모두 김수환 추기경과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집전을 했고 신부님에 대한 기억을 나누고 존경을 표했다. 당시에서 몸이 불편하셨던 리영희 교수님께서도 한참을 계셨고, 이돈명 변호사, 고은 시인,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아버님 등 원로들을 시작으로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었던 문재인 변호사, 이창동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을 대신하여 국민훈장 모란장을 들고 조문을 왔고 민주당, 한나라당 가릴 것 없이 많은 정치인들이 다녀갔다.

짧지 않은 학생운동과 옥살이를 하면서 이름으로만 듣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만 보던 한국사회의 지도층들을 모두 지근거리에서 보게 된다는 설레임이 장례를 치루면서도 날 긴장시켰던 기억이 난다. 물론 유명하고 지체 높으신 분들만 오셨던 것이 아니다. 신부님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 신부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특히 신부님 영정 앞에서 10여 분을 통곡하셨던 명동성당 들머리 건너편 해장국집 사장님과 조문객 대접할 음식으로 매일 들통 두 개 가득 전복죽을 쑤어 오셨던 백병원 정문 맞은편 죽집 사장님이 기억난다.

▲2003년 9월 4일 명동성당에서 치뤄진 김승훈 신부의 장례식에서 시인 고은 씨가 추모시를 낭독하고 있다.

역사 한복에서도 스스로 꽃이 되고 과실이 되고자 하지 않는 사제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된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1987년 5․18 기념미사 중 사제단이 성명을 발표하여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의 조작을 밝힌 것인데 그 주인공이 김승훈 신부님이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인 1974년 인혁당 ․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전국의 열혈 사제들을 모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창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76년 3․1 구국선언, 79년 YWCA 위장결혼 사건,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82년 반미성명서 사건 등으로 체포와 구속을 반복하며 법정에 서야만 했다. 이후, 천주교인권위원회 고문으로 창립을 이끌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지학순주교기념사업회 회장, 박종철기념사업회 회장, 천주교조작간첩사건 진상규명위원장,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후원회장, 노동일보 이사 등 김승훈 신부님이 관여하지 않은 운동진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김승훈 신부님이 여러 단체에 관여하고 많은 직함을 가진 것을 보면 김승훈 신부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부님이 욕심이 많거나 이름 높이는 일을 좋아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간곡한 부탁에 대해 'NO'라고 한마디 하실 줄 모르는 당신의 성품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박노해 시인은 김승훈 신부님께 헌정한 시에서 "스스로 꽃이 되고 과실이 되고자 하지 않는 신부님"이라고 했겠는가?

종종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실에 들르시면 꼭 손님을 만나셨는데 그때마다 그 손님들은 신부님께 무슨 직책을 맡아 달라던가, 무슨 사업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부탁한다던가, 곤란한 사안에 중재를 해 달라던가 하는 어려운 부탁을 가지고 찾아왔었다. 그때마다 신부님께서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알겠다”라고 짧게 답하시며 굴짬뽕이나 만두전골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늘 자신 뒤에 우리들을 두시고

김승훈 신부님은 자신에게 거들어 달라고 내미는 손을 내치시지 않으셨다. 아니 못하셨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의 호소를 듣고 못 들은 척 지나칠 수가 없는 분이셨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실 오는 길에는 오랫동안 노상에서 좌판을 벌리시고 껌이나 초콜릿 등을 파시는 장애인 한 분이 계시다. 신부님은 그 길을 걸어오실 때면 우리 사무실 사람들의 숫자만큼 꼭 껌이든 초콜릿을 사오셨는데 그냥 돈만 지불하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쭈그리고 거기 앞에 앉으셔서는 “점심은 무얼 먹었느냐? 오늘은 몇 개나 팔았느냐? 다음에 굴짬뽕이나 한번 먹자.” 이렇게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시고 일어나시는 분이셨다.

밥을 사주겠다는 사람은 있어도 같이 밥을 먹어주는 사람은 없다는 한 노숙인 분의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신부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아마 평택 대추리에, 용산참사 현장에,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앞에, 4대강 삽질 현장에, 제주 강정마을에 함께 하셨을 것이 틀림없다. 특히 동일방직, 원풍모방 등 70년대 치열하게 투쟁했지만 기댈 곳 없던 여성노동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셨던 분이시니, 2011년에서 더 많은 차별과 인권 침해 속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 특히, 여성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의 문제에 앞장서시지 않으셨을까?

신부님은 늘 자신 뒤에 우리들을 두시고 어려운 일, 힘든 일을 먼저 감내하셨던 분이셨다.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이 되어 주시는 분이셨기에, 요즘처럼 부당한 공권력이, 썩어빠진 자본이, 시민들 협박하고 괴롭히는 시장이, 판치는 세상에서 김승훈 신부님이 더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의지할 곳, 기댈 곳, 하소연 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든든했을까? 김승훈 신부님의 8주기를 맞아 8월 29일(월) 12시 용인천주교공원묘지 성직자묘역에서 추모미사가 봉헌된다. 답답한 하루하루의 연속인 요즘, 교외로 나와 좋은 공기도 마시고 김승훈 신부님도 만나고 돌아간다면 기운이 좀 생기시지 않을까 싶다.

김덕진 /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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