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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신부님, 우리 신부님 김승훈
김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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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08.31  12: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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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9월 2일은 김승훈 (마티아) 신부의 기일입니다. 김승훈 신부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맏형으로 2003년에 선종했습니다. 이 분의 삶을 다룬 이 글은 민주화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시대의 불꽃> 2005.12월호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필자 김기선 씨의 허락을 받아 다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김승훈 신부
1963년 9월 25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였다. 서울 신당동성당 보좌신부 김승훈은 이날도 많은 사람을 만나며 분주히 돌아다니다 저녁 무렵 성당으로 돌아왔다. 비를 맞은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춥고 떨려서, 그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식사며 청소며 사제관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식복사 아주머니는 몸살기를 보이는 젊은 신부가 안쓰러워 그의 방 아궁이에 연탄불을 넣었다. 식복사 아주머니가 ‘좋은 마음’으로 넣어 준 그 연탄불이 화근이었다. 그 방은 일 년 내내 불을 넣어 본 적이 없는 온돌방이었다.

연탄가스 신부님

김승훈은 다음 날 아침 미사 때가 되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교우들이 사제관으로 달려왔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연탄가스를 마신 그의 몸에는 보라색 반점이 번져 있었고, 기역자로 굳은 다리는 뻣뻣하게 경직돼 있었다. 그는 영 깨어나질 못했고, 병원에서도 ‘못 산다’ 했다. 사제 서품을 받은지 채 1년도 안 된 젊은 신부가 사경을 헤맨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각지의 교회에서 그의 회복을 구하는 기도를 올렸다.  

김승훈의 어머니는 매우 열정적이고 투쟁적인 여성이었다. 그이는 ‘링거나 꽂고 앉아서 가망 없다고 하는’의사들이 영 못마땅했다. 아무리 의식이 없어도 ‘사람이 먹어야 살지 링거 맞고 살겠느냐.’는 게 그이의 생각이었다. 그이는 ‘내 아들 내가 살릴 테니 다른 사람은 상관 말라.’며 의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들에게 미음을 넣어 주었다. 그리고 안마사 두 명을 고용해서 교대로 안마를 시켰다.

교회와 가족의 정성이 하늘에 통했을까. 이 젊은 사제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일까. 의학적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던 김승훈은 이십여 일 만에 깨어났다. 다들 기적이라 했다. 당시 병실에서 김승훈의 회복 과정을 지켜본 동생 김승겸은 이렇게 말했다.

“의식이 깨어나고 나서 병원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는데, 그 과정이 어린애 짓하고 똑같아요. 걷는 것부터 말 배우는 것까지 하나씩 다 처음부터 시작했어요. 갓난애가 네 살이 되고 다섯 살, 열 살이 되고 이런 식으로 되살아나는 거예요.”

퇴원 후 김승훈은 순교복자수녀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면 뇌 손상을 입기 쉬운데, 그는 온전한 정신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회복 속도도 빨랐다. 12월 초에는 미사도 집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듬해인 1964년 정월에는 서울소신학교 라틴어 교사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김승훈의 시련은 이제부터였다. 사람들은 그를 도무지 정상인으로 봐 주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늘 가스 중독 사건과 연결되어 이상한 방향으로 곡해되었다. ‘연탄가스 신부님’이란 별칭에 따르는 이런 야릇한 눈총과 따돌림은 3년 동안의 교사 생활 내내 아니 그 이후까지도 끈질기게 그의 뒤를 쫓아다녔다. 김승훈은 훗날 회고록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에서, 젊은 날에 겪었던 이 같은 수모를 ‘건방지게 살지 못하도록 단련을 시키려’는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승훈 신부는 성신대학을 거쳐 23세에 최연소 사제가 되었다.
사실 김승훈은 겸손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워낙 말수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한두 마디씩 던지는 이북 출신 특유의 거칠면서도 투박한 말투는 호방하면서도 따뜻한 그의 진심을 가려놓기 일쑤였다. 게다가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나 중학교 때 영세를 받고 소신학교, 성신대학을 거쳐 23세에 최연소 신부가 된 김승훈은 이렇다 할 좌절이나 가난을 겪어 본 일이 없었다.  

대학 시절 부모의 사업 실패로 차비가 없어 쩔쩔매고 방학이면 갈 데가 없어 마음고생 한 일은 있었으나, 다소 거만하고 고압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스타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승훈의 ‘영원한 동지’이자 신학교 3년 후배인 함세웅(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제기동성당 주임신부)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렸을 때 3년 차이면 크잖아요. 우러러보는 선배지. 근데 너무 어른 행세를 해. 막 5년 10년 선배 행세를 하는 거야. 우리 대학생 때 소신학교 라틴어 교사로 오셨는데, 학교에서 만나면 ‘어, 자네들은 몇 학년이지?’, 엊그제 같이 학교생활 하고 한강 가서 수영하던 선밴데 아니꼽잖아. 근데 그게 신부님 스타일이야. 워낙 뚝뚝하고, 아무한테나 반말 비슷하게 해서 조금 교만하게 비쳐지는 분이에요. 그래서 처음에 만나는 사람들은 오해를 많이 해요. 정이 많은 사람의 독특한 표현인데 그걸 알기까지 시간이 걸리죠.”

낮은 곳에서 눈 뜨다

자기표현과 인간관계에 능하지 않은 김승훈의 반쪽에는 열정적인 외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외할아버지 이경모는 평안남도 진남포의 재력가로, 상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음은 물론 항일 운동가들의 망명과 연락 업무를 주도하다가 호된 곤욕을 치렀다.

어머니 이신덕은 성격이 대범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는 지나칠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대단한 열정가였다. 개신교 신자였던 김승훈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신학교에 들어간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물려받은 열정의 피는 아직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1962년 12월, 첫 미사를 집전하고 신당동성당 보좌신부로 임명받았을 때 김승훈은 세상을 다 가진듯한 희열을 느꼈다. 젊은 나이에 뭔가 혈기왕성하게 일을 벌이고 싶어, 수단을 입고 사방천지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현실의 두꺼운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신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기는 보수적인 교회 분위기, 가스 중독 사건 이후 그를 정신이상자로 보는 듯한 주변의 시선과 오해,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그의 성격과 경험 미숙 ……. 이 모든 것들은 자신만만하고 의욕이 넘쳤던 이 젊은 사제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서울 혜화동성당과 아현동성당, 경기도 동두천성당으로 부임지를 자주 옮기는 동안, 그는 점점 더 예민해지고 점점 더 과묵해졌다. 그는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했다. 마음이 아프니 몸에 병이 찾아들었다. 폐결핵이었다. 요양을 위해 찾아든 갈멜수녀원조차 그에게 호의와 안식을 베풀지 않았다. ‘이게 신부 생활인가.’ 김승훈에게 처음으로 영적 위기가 다가왔다. 병은 더욱 깊어졌고, 그는 다시 휴양 차 부산의 태종대 공소로 떠났다. 태종대는 김승훈이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사회 문제에 눈을 뜬 곳으로, 그 자신도 ‘내 인생에서 하나의 징검다리 같은 곳’이라 고백한 바 있다.

부산 바닷가 마을의 조그만 공소에는 가난한 신도들이 많았다. 김승훈은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인정을 잃지 않는 신도들의 모습, 때 묻지 않은 그들의 신심에 절로 마음이 이끌렸다. 그는 때로 주머니를 털어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수입을 나누기도 하고, 곤경에 처한 신도들의 삶을 함께 아파하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어 갔다. 신도들은 그를 ‘우리 신부님’이라고 불렀다. 어느 곳에서도 치유 받지 못했던 그의 마음은 차츰 건강과 활기를 되찾았다.

   
▲자기표현과 인간관계에 능하지 않았던 김승훈 신부에게도 외가 쪽의 열정적인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루는 태종대 공소 바로 아래 사는 할아버지가 깡패들에게 몰매를 맞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무렵 관광지로 유명해진 태종대에는 심심치 않게 깡패들이 출몰하였는데, 할머니와 함께 행락객에게 과자며 소주, 오징어 등을 팔다가 할아버지가 당한 모양이었다. 경찰은 백주대낮에 일어난 폭력 사건을 수수방관할 뿐 아니라 다친 노인을 병원에 데려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분개한 김승훈은 곧장 영도경찰서에 가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본당 주임신부를 찾아가 ‘태종대에 새파란 놈이 하나 와 있는데 누구냐?’며 캐묻고 돌아갔다.

김승훈이 연일 경찰서에 문제 해결을 요구하자 깡패들이 진단서를 떼어 가지고 와서 도리어 노인을 고소하였다. 결국 구속된 것은 할아버지였다. 분노로 끓던 김승훈의 마음이 불현듯 차가워지면서 원주의 싸움을 상기해 냈다.  

때마침 원주교구에서는 대대적인 부정부패 규탄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원주교구가 5·16장학회와 함께 설립한 원주 문화방송을 둘러싼 부정이 감사 과정에서 드러났는데, 5·16장학회와 원주 문화방송 측은 여러 차례의 시정 요구를 번번이 묵살하였다. 검찰 역시 사건 처리에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지학순 주교와 원주교구 성직자들은 1천여 명의 신도들과 함께 3일에 걸쳐 ‘사회정의 구현과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주교의 지도 아래 공개적, 대중적으로 사회악과 불의에 저항하고 나선 일대 사건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이를 지지하는 성명이 잇따라 발표되었고, 기도회와 규탄시위가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김승훈은 매일 저녁 태종대 공소에서 노인의 구속에 항의하는 기도회를 열었다.

그러나 ‘공연히 문제를 일으키는 신부’를 경찰이 구경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얼마 후 김승훈은 서울교구의 부름을 받았다.  

   
▲김승훈 신부는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인정을 잃지 않는 신자들의 때묻지 않은 모습에서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묵은 길 곁에 새 길

1972년 1월, 서울 신림동성당 주임신부가 된 김승훈은 비로소 제대로 된 사제 생활을 시작하였다. 사제서품을 받은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서울교구의 느닷없는 호출에 내막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별로 분하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태종대에서 건강을 되찾았고, 사제로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게 되었다. 묵은 길 곁에 새 길이 있었다. 그 길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도 합당한 것이었다.

1962년부터 3년간 계속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 교회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인간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하고 사회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가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장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공의회가 끝난 이듬해인 1966년 5월 ‘바티칸공의회와 한국 교회’라는 제목의 주교단 사목교서를 통해 이를 적극 지지하고 수용할 것임을 밝혔다. 이는 박정희의 유신 철권통치를 받게 된 1970년대 한국 교회에 엄청난 메시지를 던져 주는 것이었다.

김승훈이 신림동성당에서 민주적 사목행정을 모색하고, 지역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부제 시절부터 바티칸공의회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그로서는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신림동성당을 새로 짓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그는 더 크고 강력한 시대적 소명을 향해 늘 한쪽 귀를 열어 두고 있었다.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의 창립은 김승훈의 생애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뜻이 맞고 죽이 맞는 평생 동지들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이라는 새 길에 투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제단 결성을 촉발한 것은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이었다. 1971년 부정부패 규탄시위를 계기로 사회적 문제로 관심을 돌린 지학순 주교는 교회 안팎을 가리지 않고 힘없고 억눌린 자의 인권 옹호에 나섰다. 지 주교는 유신 정권의 폭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 가난한 민중들과 민주화 운동가, 수배자들을 감싸 안았다.

그는 결국 1974년 7월 6일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에 의해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된 김지하에게 돈을 주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주교단의 반발로 지 주교는 곧 석방되었지만, 7월 23일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다시 구속되었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71년 10월 17일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라는 지학순 주교의 메가톤급 발언은 ‘사회정의를 가르치고 실천할 자유는 종교 자유의 본질적 요구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지 주교의 양심선언을 지지하는 젊은 사제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1975년 2월 16일 지 주교가 풀려날 때까지 명동성당에서만 20차례 가까운 시국기도회가 개최되었고, 숱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서울·인천·전주·부산 등 전국을 돌며 기도회를 열던 이들은 좀 더 체계적인 대응을 위해 교구를 초월한 전국적인 사제 모임 결성에 합의하였다. 1974년 9월 23일 마침내 사제단이 공식 출범하였다.

김승훈은 사제단이 마련하는 시국기도회에 빠짐없이 참여하면서도 주변을 맴돌 뿐 곧장 그 중심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아직 그의 마음속에는 적극적인 활동을 방해하는 어떤 기제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1986년 계간 <민통선 >좌담회에서.
함세웅은 이때 김승훈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기도회 때마다 늘 신자석에 앉아서 지켜보시는 거예요. 앞으로 모시려고 해도 ‘괜찮아, 나 여기 있을 거야.’ 그러시고. 당시엔 잘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야 아, 신부님이 연탄가스 마신 뒤 교회에서 따돌림 당하고 손가락질 받은 일 때문에 (사제단 활동에 누가 될까 봐) 선뜻 나서지 못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75년은 너무 살벌했거든요.

월남이 멸망하고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면서 학생들은 계속 구속되고. 그래서 뭔가 계기를 마련하려고 76년에 명동에서 구속자 석방과 3·1 정신 실현을 위한 미사를 지내기로 했죠. 그 강론을 김승훈 신부님에게 부탁했어요. 사실 나는 신부님이 좀 머뭇거리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간에도 쭉 앞에 안 나서셨으니까. 근데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하지 뭐.’ 하면서 너무너무 선뜻 응하시는 거예요.”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는 3·1절 57주년 기념 미사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전국에서 올라온 20여 명의 사제단 신부들이 공동 집전한 이 날 미사의 분위기는 여느 때처럼 경건하고 장중했다. 가톨릭 신자로서 미사에 참석한 공화당 국회의장 서리 이효상은 잠시 장내를 둘러보았다. 신자석에 앉은 700여 명의 사람들 중에는 더러 개신교 신자, 비신자도 섞여 있었지만, 3·1절의 역사적 의미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인 명동성당의 위치를 돌아볼 때 이해하지 못할 풍경은 아니었다.

김승훈의 강론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효상은 이 미사에 대해 별다른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강론대에 선 김승훈은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앞둔 1975년 2월 3일 공개서한을 통해 자신과 같은 가톨릭 정치가들의 반성을 촉구한 맹랑한 신부였으나, 그의 입에서 ‘긴급조치 9호 철폐’, ‘유신정권 종식’과 같은 대담한 발언이 터져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승훈의 강론은 모든 이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것은 박정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었고, 함석헌·김대중·문동환 등 각계 지도자들이 민주구국선언을 통해 밝히고자 했던 핵심, 바로 그것이었다. 함세웅을 비롯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후배 사제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신부 투사

“그냥 편안하게 원론적인 얘기를 해 주시겠거니 했는데 유신헌법의 부당성, 구속자 석방, 언론의 허구성, 교회의 시대적 사명 등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해 주셨어요. 놀라운 것은 이 강론이 2부 순서의 문동환 목사님 설교나, 이우정 교수가 읽은 선언문의 내용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딱 맞아떨어졌다는 거예요. 너무 기쁘고 놀라웠죠. 아유, 신부님 진작 모실 걸 그랬구나…….”(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제기동 성당 주임신부)

신·구교 합동으로 이루어진 3·1절 기념 미사는 별다른 마찰 없이 조용히 끝났다. 구겨진 휴지처럼 앉아 있던 이효상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미사’라는 가장 종교적이고 온화한 형식에 담긴 이 날의 구국선언은 당국의 구미에는 맞지 않았겠지만 3·1절이나 광복절이면 으레 나오는 종교계의 시국선언쯤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서명자 명단에 김대중이 끼여 있는 것을 알고 노발대발했다. ‘명동 사건’은 졸지에 종교의 자유를 악용한 종교계와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음모’로 비화되었다. 함석헌, 김대중, 문동환 등 선언문에 서명한 10명과 문익환, 이해동, 이태영,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김승훈 등 관련자들이 줄줄이 정보부에 끌려갔다. 이들 중 11명이 구속 기소되었고, 김승훈을 포함한 7명은 직접 가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동생 김승겸에 의하면, 당시 김승훈의 어머니는 관계 요로에 있는 지인들에게 아들의 선처를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유야 어쨌든 김승훈의 불구속은 결과적으로 당사자와 사제단 모두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김승훈은 사제단의 최연장자 신현봉과 실질적 리더 함세웅의 구속으로 생긴 지도력의 공백을 메울 적임자였다. 그때까지 사제단 활동의 지지자요 참여자에 불과했던 김승훈은 자연스럽게 사제단 맨 앞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 당시 상황에서 사제단 맨 앞자리는 곧 운동의 맨 앞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이로써 사제단은 역량 있는 또 한 명의 ‘신부 투사’를 맞아들이게 된 셈이었다.

김승훈은 각종 시국기도회를 개최하고 구속자 석방을 위해 애쓰는 한편, 법정에서 김대중이나 개신교 인사들과 함께 재판을 받으면서 종교·재야·정치권 인사들과 교분을 쌓아 나갔다. 그는 자신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겸허하고 여유롭게 받아들였다. ‘괜찮아. 다 하느님이 하신 건데 뭐.’, ‘하느님께서 다 해 주실 거야.’라며 보수적인 교구와 정부의 압력에 의기소침해진 젊은 신부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권위적이며 ‘뚝뚝한’ 성격, 투박한 말투의 위력은 특히 정보부 기관원들을 대할 때 유감없이 발휘됐다.  

후배 사제들은 기꺼이 사제단의 ‘얼굴 마담’이자 ‘방패막이’가 돼 준 그를 종종 ‘단장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러면 그는 장단을 맞추기라도 하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몰라. 후배 사제들이 하라는 대로 한 것뿐이야!”

청동 같은 진정
과묵, 눌변. 그러나 청동 같은 진정
거리에서 미사 제단에서 아버지 같은 사람인데
돌아서면 어머니였습니다.
가죽으로는 오만불손인데 속살은 온통 낮고
낮은 연민의 울림으로 내내 떨리고 있었습니다.

2003년 김승훈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시인 고은이 지어 바친 추모시의 일부다. 이처럼 적절히 한 사람의 핵심을 묘파해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과묵, 눌변. 그러나 청동 같은 진정. 과연 그러하였다.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아니다, 저건 거짓이다!’라고 얘기할 수 없었던 시대에 김승훈은 참으로 귀한 존재였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누군가는 ‘아니오.’, ‘안 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바로 교회가 그것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예수님이 오신 이 세상은, 그 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고자 하는 우리가 그 속 깊숙이 들어가 변화시켜 나가야 할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2003년 9월 4일 명동성당에서 치뤄진 김승훈 신부의 장례식에서 시인 고은 씨가 추모시를 낭독하고 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을 때 공개수배 된 문부식·김은숙을 원주 교구에서 숨겨 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가톨릭교회 전체가 수세에 몰린 적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천주교가 종교를 앞세워 좌경분자를 숨겨주고 불순활동을 방조한다.’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가톨릭교회는 ‘교회법에 따라 범죄 혐의자라 해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언제나 도와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맞섰지만, 어용 언론의 악의적인 왜곡보도에 따라 사회 여론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을 뒤집고 당시 운동권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반미운동을 두둔하고 나선 것이 바로 김승훈이 위원장으로 있던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였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교회 이름을 내걸고 반미운동을 지지하고 나선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었죠. 그때 사회선교협의회 총무였던 나도 조사를 받았는데 전부 빨갱이로 몰아갔거든. 그때 ‘반미라고 해서 무조건 터부시하거나 빨갱이로 몰아서는 안 된다, 애국적인 차원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한 행위였다, 이번 기회에 미국의 행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성명서를 내고 여론의 역풍을 막은 장본인이 김승훈 신부님이세요.”(이창복, 열린우리당 강원도당위원장)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추모미사에서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쓰러지며 죽었다.”는 공안 당국의 발표가 거짓이었음을 만천하에 폭로하여 6월항쟁의 불씨를 던진 이도 김승훈이었다. 물론 이 사건엔 이부영, 김정남, 전병용 등 숨은 공헌자들이 많다. 87년 2월경, 5·3인천사태 배후조종 혐의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이부영의 옆방에 박종철을 죽였다는 두 경관이 들어왔다.

이 경관들을 통해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이 고위층의 치밀한 각본으로 은폐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부영은 이 내용을 화장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서 밖으로 내보냈다. 전직 교도관으로 수배 중이었던 전병용은 이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달하였고, 역시 수배 중이었던 김정남은 우여곡절 끝에 이것을 사제단에 전달했다.

   
김승훈 외에도 이 엄청난 사건의 진상을 전해들은 이는 많았다. 누군가는 이를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았다. 그러나 누가 할 것인가.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이 일이 김영삼에게 전해진 후, 신민당 국회의원들이 3, 4월경 국회에서 발표하기로 한 적도 있었다.  

“겁이 나니까 안 한 거야. 면책 특권 가진 국회의원도 안 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한테 왔길래 황연철 변호사하고 유현석 변호사하고 검토를 했는데 나도 좀 부담이 되잖아. 근데 마침 김수환 추기경이 무모한 짓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혁당 사건 못 봤냐 이거야, 전두환 정권이 조한경·강진규 같이 먼저 구속된 형사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거지. 핑계 김에 잘 된 거야. 나도 힘든데 뭐 목숨 걸고 할 필요 있냐…….”(함세웅)

그러나 김정남은 당시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을 통해 다시 함세웅에게 절절한 편지를 보내왔다. ‘이 정권이 망하느냐 민주화를 이룩하느냐가 신부님들한테 달려 있습니다…….’ 함세웅은 고민 끝에 김승훈에게 그 편지를 내보였고, 김승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영구의 부인은 김승훈의 폭로가 있었던 5·18 추모미사의 광경을 이렇게 전했다.

"김승훈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면서 예를 올리는데 어찌나 경건한지 장백의가 넘쳐 머리 위로 흐르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기도하는 심정으로 절을 하더라. 마침내 신부님들이 해냈다."(김정남,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신부님, 우리 신부님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 겁에 질린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는 시대에 김승훈이 보인 용기는 ‘눌림 받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응답’이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 그러나 누군가 간절히 원하는 일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그의 사랑이요 실천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김승훈이 누구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얘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고 한다. 반대로, 김승훈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베풀었다는 얘기도 들어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사랑은 지극하고도 은근해서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깜짝 놀랐던 게, 김 신부님이 돌아가시니까 신부님한테 도움 받았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더라고.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간에. 나도 서명이다 후원이다 수없이 도움을 받았죠. 특히, 70년대 노동자들이 집회 한번 하려면 장소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내가 가톨릭 노동청년회 전국회장이어서 가끔 성당을 집회 장소로 이용했는데, 빌려주는 신부님이 많지 않았죠. 성당을 내주면 왜 빌려줬냐고, 정보부나 경찰에서 얼마나 신부님을 괴롭히는지 몰라. 평신도 간부들 부추겨서 신부님한테 싫은 소리 하게 하고. 김 신부님은 ‘노동자들 위해서 장소를 내주는 게 좋은 일 아니냐.’하고 반대를 물리치며 아주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셨어요.”(이창복)

70년대 중후반부터 80년대까지 인천의 동일방직, 남영나일론, 태광산업, 한양섬유, 청계피복, 한국모방(원풍모방) 등의 노동자들은 집회만 열었다 하면 김승훈의 성당을 이용했다. 심지어 데모하다 쫓겨 다닐 때나, 인쇄물 제작비용이 없을 때도 김승훈을 찾아왔고, 서명이나 지지 성명 발표 등 사회적으로 유명한 누군가가 필요할 때도 제일 먼저 김승훈을 떠올렸다. 이 사정은 재야인사들이나 단체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살아 생전 민주화운동의 성지인 명동성당 주임신부가 되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많은 학생, 재야인사들의 마음에 '신부님, 우리 신부님'으로 남아 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이상하게도 그는 가난한 이들이 다니는 성당만 골라 다녔다. 신림동 성당이 그랬고, 동대문 성당이 그랬으며, 홍제동·왕십리 성당이 그러했다. 유일하게 부잣집 신도들이 많았던 여의도 성당에서는 사목위원들의 반발로 채 2년도 버티지 못하고 시흥동 성당으로 쫓겨 왔다. 그래도 사람들은 김승훈을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라 부르며, 동대문으로 왕십리로 줄기차게 그를 따라다녔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유복하고 기름질 까닭이 없었다.  

“74년경 신림동 성당에 계실 때 처음 신부님을 찾아갔어요. 사제관이 너무 추운 거야. 왜 이렇게 춥게 지내시냐고 했더니 가난한 교회에 왔는데 내가 어떻게 여유 있게 살 수 있냐고 그러시는 거예요. 가슴이 울컥 했죠.”(이창복)

“신부님들은 미사 예물이라는 걸 받으니까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죠. 근데 항상 수중에 돈이 없었어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와서 도와달라고 하니 남아나질 않는 거지. 돌아가시고 보니까 누구 보증 서 준 서류만 있고 아무것도 없더라고.”(동생 김승겸)

물론 다른 한쪽에서는 김승훈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정치적 성향과 신부로서의 권위의식, 종교운동의 한계, 그리고 3·1민주구국선언 당시부터 이어져 온 정치권 인사들과의 친분은 그의 활동 방식을 좀 더 정치적이고 타협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투쟁보다는 협상을 선호했다. 대화가 가능하다면 (적대적인) 정부와도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덕분에 그는 ‘거물급 재야인사’, ‘정치하는 신부’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88년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하다 출소한 안재구는 한 지면에서 이런 증언을 했다.

‘내보내려고 하니까 자기들이 뭔가 항복을 받았다는 것을 하나 만들어야 하겠는데…… (중략) …… 형을 다 살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분질러가지고 무기를 8년 살리고 내보내야 할 판이니까 반성문이든지 뭐든지 해야겠고 철저히 받으려고 하지. 그러나 나는 못 주겠다고 하도 버티니까 김승훈 신부를 보냈드만. “안 교수, 전향서가 아무것도 아닌데 써 내죠?” 하는 거야.’(김동춘,『분단과 한국사회』)

이창복은 이것을 성직자로서의 철학으로 해석한다.

“사제로서의 철학, 소신이었다고 봐요. 이데올로기보다 더 중요한 게 인권이다, 그 사람의 인권이 이데올로기에 묶여 구속된 상태로 놔두는 게 옳지 않다고 보시는 거예요. 그래서 교도소를 찾아다니면서 양심수들에게 전향을 권고하셨어요. ‘관을 너무 대변하시는 거 아니냐.’는 비판도 물론 있었죠. 그러나 신부님이 관을 대변해야 할 아쉬움은 없잖아. 정치신부란 것도 그래요. 사실 87년 대선 당시 신부님이 후보 단일화를 위한 김대중 후보 지지 성명을 발표한 것도 저하고 몇몇이 강권한 것이거든요. 처음엔 못하겠다고 하셨어요. 신부로서 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거든요. 결국 단일화는 단일화대로 못하고, 신부님은 정치신부 되고, 저는 죽일 놈 됐죠.”

김승훈과 함께 거리에서 늙어 간 사람들은 마땅히 그가 주교가 되는 날을 꿈꿨다. 하지만 그는 종종 지인들에게 명동성당의 주임을 해 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한국의 신부라면 한번쯤 민주화운동의 성지인 명동성당의 주임신부가 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김승훈은 주교도, 명동성당의 주임도 되지 못하고 훌훌 세상을 떠났다. 많은 노동자들과 학생, 재야인사들의 마음에 김승훈이라는 이름의 ‘작은 명동성당’ 한 채 남겨놓고는.

*사진제공 / 박용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출처/ 민주화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2005년 12월호

김기선 /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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