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빵과 장미(Bread And Roses), 감독 켄 로치, 2000년작

오월이 되니 날씨는 한참 포근해지고 꽃들이 만발하면서 푸르름이 더욱 짙어진다. 그렇게 어머니 대자연의 오월은 아름답다. 그러나 인간사의 오월은 힘겹기 그지없어 한국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나 역사의 반동에 맞선 피끓는 움직임이 가득했다. 인간이 인간임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처절했던 오월이다. 이 오월은 메이데이로 시작된다.

메이데이는 1886년 노예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미국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5월 1일 총파업에 들어간 것에 기원한다. 이때 경찰의 발포로 어린 소녀를 포함한 6명의 노동자가 살해되었다. 1889년 국제 노동운동,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창립총회에서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매년 5월 1일을 노동절로 정하였고, 이듬해 5월 1일 제1회 메이데이 대회를 치루었다. 이후 5월 1일은 전 세계 노동자들의 명절이 되었다. 미국의 총파업 당시 헤이마키트 사건으로 폭동죄를 뒤집어써 사형선고를 받은 노동운동 지도자 파슨스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최후진술을 하였다. 매우 역사적이고 주옥같은 구절이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단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는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이처럼 메이데이는 미국에서 기원하지만 정작 미국에는 메이데이가 없고, 9월 첫 번째 월요일이 노동절이다. 미국은 노동자가 파업을 했다가는 군이 투입되기도 하는 나라로, 노동상황은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다. 그 원인 중 하나를 이민에서 찾기도 하는데, 끊임없이 새로운 노동력을 받아들이기에 노동운동이 힘을 못 받는다는 것이다. 이민과 일자리와 관련해 어떤 인류학자의 재미있는 연구결과도 있다. 시기별로 잘나가는 권투선수의 나라 출신 분포도를 분석한 것으로, 이민 초기에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 헝그리 스포츠인 권투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챔피언도 많아지는데, 시기별로 챔피언이 많은 것과 이민 초기와 맞물린다는 주장이다. <파앤어웨이>의 톰 크루즈, <아일랜드의 열풍(The Quiet Man)>의 존 웨인이 아일랜드계 권투선수로 등장하는데, 영화의 배경이 대략적으로 아일랜드인의 이민 초기와 비슷하다.

<빵과 장미>는 열악한 미국의 노동환경과 이주 노동자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마야는 돈을 벌기 위해 멕시코에서 미국 국경을 겨우 넘어와 불법이민자가 된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노래 <Donde Voy(나는 어디로 가는가?)>도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처절한 내용이다. 이 예쁘고 발랄한 젊은 여인도 그처럼 험난한 길을 찾아 월경한 것이다.

마야는 LA로 먼저 건너온 친언니 로사의 도움으로 엔젤 클리닝 컴퍼니에 청소부로 취직한다. 마야는 매우 밝고 활기차게 일하는데, 어느 날 경비원에게 쫓기던 샘을 쓰레기통 속에 숨겨주게 된다. 샘은 열정적인 노동운동가다. 이렇게 둘은 만난다.

이 회사의 사장은 보통 악덕 기업주가 아닌데, 단지 한 번 지각했다는 이유만으로 동료가 해고되자 마야는 샘에게 도움을 청하고 투쟁을 시작한다. 언니 로사가 밀고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따지려는데 로사는 내가 몸을 팔아 네가 여기에 취직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가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아 살아온 언니의 삶이다. 비참한 언니의 삶에 직면해 마야는 고통스러웠지만 싸움을 멈출 수 없었다.

▲ 샘은 마야를 도와 투쟁한다. 샘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살해당한 동료를 언급하기 하는데, 미국에서는 노동운동이 그처럼 위험한 것이었을까.

이들의 싸움은 여러 방식으로 전개된다. 청소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진공청소기와 황금칠면조로 빌딩 사무실에 근무하는 변호사들의 성대한 파티장을 망쳐놓기도 하고, 거리로 나서기도 한다. 샘은 연설 중에 “우리는 빵을 원하지만 장미도 원합니다”라고 말한다. ‘빵’이 직접적인 생계와 관련된 임금을 뜻한다면, ‘장미’는 인권, 인간적 품위, 그것을 보장하는 노동상황 등을 뜻한다. 분명 노동자에게는 이 둘이 다 필요하다. 월급은 충분하게 줄지 몰라도 무노조 경영을 자랑하는 모 기업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빵과 장미’는 켄 로치의 전작 <땅과 자유>와 댓구를 이룬다. 인간에게는 물질적인 것과 아울러 인간적 존엄성의 가치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는 켄 로치의 주장과 어법이 이 두 편의 영화 제목 속에 녹아 있다. 그러고 보니 인간다운 품위와 너무도 멀리 있던 언니 로사(Rosa)의 이름도 ‘장미’라는 뜻이 아니던가. 결국 이 싸움은 승리하지만 마야는 불법이민자로 추방당한다. 마야는 언니와 샘과 이별하지만 표정은 어둡지 않다.

▲ ‘빵과 장미’는 미국의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이 시카고 여성 노동운동가들을 위하여 쓴 시의 제목으로, 로렌스 파업에서 일부 여성 노동자들이 그 시의 한 구절인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러나 장미도 원한다”라는 피켓을 들고 나온 게 그 효시라고 한다.
이 영화에는 실제 청소 노동자들이 출연했고, 영화 촬영 후 그들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자신의 권리를 찾아 나섰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2004년 탄핵정국 이후 치룬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였다. 그 축제 분위기 속에서 메이데이 행사가 열렸던 토요일 저녁 텔레비전에서 이 영화가 방영되었다. 장미는 민주노동당뿐만 아니라 서구 좌파정당의 상징이기도 하다. 뭐가 맞아들어가도 예쁘게 맞아들어갔던 시절이다.

노동의 문제는 간단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 전통적인 자본과 노동의 대립뿐만 아니라 다양한 노동의 형태가 존재하며 노동 안의 대립 또한 존재한다. 한 사업장의 식당과 버스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차별한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마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토록 강경하게 불복종운동을 전개하게 했던 흑백분리 정책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신들의 ‘빵과 장미’를 위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빵과 장미’를 빼앗을 수 있는가. 이 외에도 대학 청소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상황과 같은 슬픈 현실이 다시금 우리가 ‘빵과 장미’를 부르짖게 한다.

곧 한국에도 출간될 예정인데, 앙드레 고르는 <프롤레타리아여! 안녕!>(1980)에서 이미 지금 복잡하게 전개되는 노동상황을 예견하였다.(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가한 이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는 이미 생태주의적 전망, 일자리 나누기, 기본소득 등의 예언자적 식견을 보여주었다.) 그는 기존 노동계급보다는 실업자나 불완전 노동자, 즉 ‘비노동자, 비계급’이 진보혁명에서 주체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현재 진행되는 노동상황에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빵과 장미’ 그리고 ‘빵과 장미’를 위한 연대와 불편함마저 감내하며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지 않는 날카롭게 깨워 있는 의식이다. 우리 대부분은 노동자로 살아간다. 타인의 ‘빵과 장미’에 방관하다가 언젠가는 우리 자신의 ‘빵과 장미’도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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