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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성경이 세상을 박살냈다고 말했다[파블로의 필름창고] <일라이>, 알버트 · 알렌 휴즈 감독, 2010년작

   
▲ <일라이>(The Book of Eli), 알버트 · 알렌 휴즈 감독, 2010년작
때는 2043년. 하늘 빛깔이 심상치 않다. 전세계적 전쟁은 모든 문명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물은 물론 먹을거리도 구하기 힘들어졌다. 심상치 않은 이 남자, 일라이는 고양이를 사냥해 구워먹는데, 옆에 찍찍거리는 쥐에게 고양이 고기 몇 점을 던져준다. 세상은 극도의 야만상태에 빠져 인간들을 서로를 약탈하고 서로를 잡아먹기도 한다. 상대방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손을 내밀라고 한다. 인육을 먹으면 손이 덜덜 떨리는 증세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일라이는 어쩔 수 없을 때만 악당들과 싸우면서 자신의 목적에 따라 서쪽으로 끝없이 걸어간다. 엠피쓰리인지 시디플레이어인지 배터리가 떨어지니까 그나마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들러 충전도 하고 물도 구하려고 한다. 기존의 화폐 시스템은 붕괴되어 파국 이전 만들어졌던 장난감이나 물티슈 같은 잡다한 물자들이 화폐를 대체한다. 파국을 맞기 전에는 하찮게 여겼을 많은 것들이 이젠 귀중한 재화로 유통된다.

하여간 이 마을에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다 카네기를 만난다. 카네기는 지하수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고,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절대권력을 쥐고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전쟁 이전의 문명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전자는 대체로 글을 읽을 줄 알지만 이후 사람들은 문맹이다.

카네기는 일라이를 본 순간 자신의 밑에서 일해 볼 것을 권하면서 하룻밤 머물게 한다. 그리고 시각장애인 클라우디아의 어린 딸 솔라라를 일라이가 머문 방으로 보내 그를 회유하려고 한다. 일라이는 솔라라를 내보내지만 솔라라는 엄마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 그냥 방에 머물게 해달라고 한다.

일라이는 자신에게 제공된 음식을 솔라라와 나누는데, 그때 기도를 한다. 다음 날 카네기와 식사하면서 솔라라는 엄마와 일라이에게서 배운 대로 기도하는데, 그 모습을 본 카네기가 당장 일라이를 쫓아간다.

혹시나 지금까지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이 영화를 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글을 읽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기가 막힌 막판 반전은 영화를 직접 보고 확인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 일라이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솔라라의 손을 잡고 경건하게 기도한다. 솔라라에게는 무척 신비롭고 낯선 경험이다. 이 행위가 발단이 되어 영화는 복잡한 국면을 맞이한다.

   
▲ 카네기는 알고 보면 지식을 통해 마을 사람들을 지배한다. 저렇게 폼 잡고 <무솔리니>를 읽는다.

사람들은 전쟁 이후 그 책을 불살랐다

사실 이 영화는 하나의 책에 대한 이야기다. 카네기가 처음 나올 때 의미심장한 제목 <무솔리니>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책을 구해오게 한다. 글을 모르는 부하들은 그저 책이라면 무작정 들고 오지만 카네기가 원하는 책은 없다. 그가 기를 쓰고 찾던 책은 바로 성경인데, 그걸 일라이가 갖고 있으니 추적할 수밖에.

카네기는 성경만 있으면 사람들을 온전히 통치할 수 있다는 도구주의적 발상에서 그걸 손에 넣고자 한다. 이미 이 좁은 마을에 대한 물리적 지배를 완수했는데, 더욱 온전한, 즉 정신적 지배를 위해 성경이 필요했다. 이 마을을 국가로 비유하자면 경찰, 군사력, 법 제도 같은 물리적 국가기구와 종교, 언론, 교육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완비하고 싶은 욕망이랄까. 하여튼 대자본가(앤드류)이자 자기계발 이론가(데일)의 이름이기도 한 이 카네기라는 사람의 발상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인간의 문명을 초토화시킨 전쟁에 대해서는 그저 사람들이 싸우고, 큰 폭발,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온 세상은 불바다가 되었다는 정도에서 이야기하지만, 그 전쟁의 성격을 추측해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은 성경 때문에 서로 죽이고 싸우게 되었다고 생각해 전쟁 후에 보이는 대로 이 책을 태웠다는 것이다. (카네기가 전세계의 베스트셀러로 꽤 많았을 성경을 구하기 힘들었던 이유겠다.) 이 점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그 전쟁은 분명 종교, 그것도 그리스도교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전세계의 종교 중에서 유난히 사막의 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가 문제였다. 이 세 종교는 아브라함을 같은 믿음의 조상으로 받들면서도 서로 그리 살벌하게 싸움박질을 해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폭력과 살육으로 얼룩져 있는데, 수많은 종교전쟁, 정복전쟁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례가 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악행은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선포하는 희망으로 시작된 그리스도교를 배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과오는 그대로 인정하고 충분히 비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영화 속 성경을 태우는 행위처럼 그리스도교가 지닌 온전한 가치마저 부정된다면 ‘아이를 목욕시키고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마저 버리는’ 상황과 진배없다.

하여튼 카네기는 일라이로부터 책을 빼앗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그렇게 책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일라이는 솔라라를 구하기 위해 책을 내준다. 책을 내준 뒤 솔라라와 서쪽으로 향하면서 자신은 성경을 지키려고만 했지, 그것을 실천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세상을 파괴했던 책, 이젠 세상을 다시 세우리라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책을 내준 일라이와 책을 빼앗은 카네기의 엇갈린 행보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먼저 카네기는 성경을 펼치자마자 경악한다. 그러니까 일라이의 성경은 점자책이다. 생각해보니 앞 장면에서 일라이가 책을 읽을 때 한 손은 책을 더듬었지. 그러면서 또 하나의 트릭이 왜 밝은 곳에서 점자 성경을 읽었을까다. 하여튼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솔라라의 엄마 클라우디아는 책 읽기를 거부하고 사람들은 카네기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일라이가 바다 건너 도착한 그 서쪽은 바로 알카트라즈다. 여러 영화 속에도 가끔 나오는 바위섬에 세워진 악명 높은 감옥이 있는 곳으로, 이젠 관광명소가 되었다. 영화 속 그곳엔 이전 문명을 보존하는 곳으로 세상의 많은 책은 물론 인쇄소까지 마련되어 있다. 그러니까 성경은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카네기에게 성경을 내주어 없는데 어떻게 하지?

여기서 놀라운 장면이 연출된다. 일라이는 성경의 내용을 다 외웠던 것이다. 그가 또박또박 성경의 내용을 읊으면, 옆에서 그것을 받아 적는다. 원고지는 산더미처럼 쌓여간다. 원고지가 쌓여가는 만큼 상처 입은 일라이의 생명은 저물어간다.

모든 암송을 마친 다음 일라이는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가 남긴 암송은 다시 활자로 정리되어 알카트라즈판 성경이 완성된다. 한때는 구전이었을 성경, 그 내용이 여러 판본으로 문자화되고, 그러다가 영어로 번역되고, 그것이 또 점자화된 성경, 그걸 다시 구전하여 재문자화하는 참으로 기묘한 과정이다.

   
▲ 일라이는 성경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틈틈이 읽어나간 저 책이 점자책이었다니. 그리고 그걸 다 외우고 있었다니.

주인공 일라이는 알고 보니 시각장애인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소명을 다하기 전까지는 신의 보호가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악당들을 이겨내고 무사히 자신의 순례를 완수할 수 있었다. 영화의 원제목이 암시하듯 여기서 성경은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성경은 하느님의 책이자 주인공 일라이의 책이기도 하다. 또 세상을 파괴했던 책이자 다시 세상을 건설할 책이 된다.

결국 문제는 인간의 태도에 달려 있겠다. 맹목적인 문자적 추종이 불러일으키는 파국을 따를 것인가? 창조적 해석을 바탕으로 그 진의를 온전히 찾음으로써 평화와 공존의 길을 찾을 것인가? 액션의 탈을 쓴 이 영화가 이 세상의 종교문명에 대해 참으로 심각한 고민거리를 던지고 있다.
 

김지환 (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현재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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