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예수> 앨버트 놀런, 유정원 옮김, 분도출판사, 2011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대체로 우리는 예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간혹 특별한 예외가 있겠지만, 대개는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뺨을 돌려 대 주지도 않는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지도 않고 나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빌어 주지도 않는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 것을 나누어 주지도, 하느님께 모든 희망과 신뢰를 두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저마다 변명거리를 갖고 있다. 나는 성인(聖人)이 아니라고."

도미니코회 남아프리카 관구장을 맡고 있으며, 교회일치 잡지인 <도전: 교회와 사람들>의 편집인이기도 한 앨버트 놀런(Albert nolan). 한국교회에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를 지은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놀런이 그후 30년만에 집필한 책이 <오늘의 예수 Jesus Today>다. 그는 교회 창설 이전의 역사적 예수를 생생하게 다루고 나서, 훌쩍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처럼 귀한 '예수의 영성'을 전해준다. 그 영성을 놀런은 '근원적 자유의 영성'이라 이름 짓는다. 

진지한 그리스도인, 시대의 징표에 주목해야 

놀런은 즉시 예수처럼 먼저 '시대의 징표'를 읽으라고 권한다. 그가 읽은 우리시대는 먼저 '영성을 갈구하는 세대'다. 현실은 여전히 전쟁과 폭력, 가난과 환경파괴로 불안을 더해오는데, 교회는 추문으로 뒤흔들리고 권위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근본주의가 나타나 '과거로 돌아가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확신과 권위와 절대진리를 주장하며 사람들을 의존적 신앙으로 되돌리고 중세기처럼 신정정치를 꿈꾼다. 한편에선 신보수주의가 나타나  전통과 관습에 기대어 정체성을 되찾자고 나선다. 그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안정감을 주는 신앙전통을 훼손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편에선 비주류 종교전통 안에서 영성의 새로운 요소들을 발견하려는 시도도 일어나고 있다. 토머스 머튼이 대표적이다. 관상과 실천의 통합이다. 그리고 교회 안팎에서는, 자신의 삶과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신비주의가 등장하고 있다.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제도 종교는 매력을 잃어가지만, 영성을 향한 엄청난 갈망이 터져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갈망을 이용해 '영적 기술'을 가르쳐 돈을 버는 기업가들도 나타난다. 한편 놀런은 떼제공동체의 성공을 지적하며, 이들은 어떤 교리나 교의도 강제하지 않으면서 침묵과 전례 안에서 영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소개한다. 

한편 우리시대는 '남을 돌보지 않는' 개인주의가 득세해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을 지속시키고, 환경파괴와 지구온난화로 위기를 만들고 있다면서,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필요와 자기 만족만을 갈구하는 '이기적 에고'를 초월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연민과 공감이 결여된 에고는 타인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참에 세상의 뜻있는 개인과 단체들이 '신자유주의'에 맞서 아래로부터 연대하고 있으며, 신과학자들이 영성을 우주적 차원에서도 바라보도록 돕고 있다는 점을 희망적으로 지적한다.   

우리도 예수처럼, 신비가요 예언자가 되어야

우리시대를 바라보며, 앨버트 놀런은 예수가 '혁명적인 예언자요 신비가'였다고 말한다. 예수는 낡은 옷을 깁듯이 당대의 종교적 신조와 관습을 고쳐보자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 유다와 이방세계를 온통 뒤집어 놓았다. 정치혁명가처럼 단순히 힘없는 자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보다 더 급진적인 생각을 가졌다. 정치적 혁명보다는 깊은 영적 회심을 요청하는 '사회적' 혁명에 관심이 있었다. 이는 기존의 상식적인 '관계'를 뒤집는 것이다.

부자는 하느님이 재물로 축복해 주는 운이 좋은 사람으로 여겨졌으나, 예수는 축복받은 행운아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이 언젠가 부자가 되리라는 약속이 아니라 새로운 기쁨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리라는 다짐이다. 율법학자처럼 배운 자들이 진리를 독점할 수 없으며,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이 더 현명하다고 전한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여성을 벗으로 제자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창녀들도 복음을 듣는다. 예수는 황제처럼 군림하는 하느님 대신 방탕한 아들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풀어주는 사랑의 하느님 '아빠'와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가족'을 끌어모은다. 예수는 자신을 섬김을 받아야할 메시야로 선포하지 않고, 목숨마저 내어주는 고난받는 '종'으로 소개하고, 자신의 에고를 죽여야 얻는 새로운 삶(부활)을 제시한다.

예수는 신비-예언 전통에 서 있는 분이었다. 놀런은 이 전통에 서 있었던 사람으로 토머스 머튼과 도로시 데이, 오스카 로메로, 헬더 카마라, 도로테 죌레, 마하트마 간디 등을 소개하며, 정치와 영성 그리고 정의추구와 기도를 분리해서 보려는 태도를 비판한다.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 없이 정의와 사회변혁을 외치는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똑같은 맥락에서 시대의 불의를 거침없이 비판하지 않고도 바람직한 신비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어불성설이다."

놀런은 교회에 두 줄기 역사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교황을 둘러싼 권력투쟁, 분파, 갈등, 불일치, 이단 사냥, 관료주의를 아우르는 제도 역사이고, 이와 병행하여 모든 이와 모든 것을 향한 헌신적 기도, 겸손, 자기 희생, 자유, 기쁨, 담대함, 깊은 사랑을 보여 준 순교자와 성인과 신비가들의 역사가 다른 하나다. 이른바 제도적 권위의 역사와 신비-예언 전통이다.  

"예언자처럼 신비가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어떤 종교 제도하에서 임명받을 필요가 없다. 성인, 신비가, 예언자의 권위는 항상 자신의 거룩함이나 스스로 체험한 하느님과의 친밀에 뿌리를 두었기에, 제도적 권위는 늘 이러한 영적 자유를 다루기 어려워했다"

예수는 당시 유다교의 제도권 귄위를 소유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대사제와 원로, 사두가이와 산헤드린에 속하지 않고 일개 평신도였으며, 게다가 소작농으로 신비-예언 전통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진지하게 따르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언자와 신비가가 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놀런은 제시한다. 누구나 하늘을 보고 내일 날씨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듯이, 시대의 징표 역시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며, 오순절에 성령이 쏟아져 내려 모든 제자들이 예언을 하고 꿈을 꾸었듯이 "우리도 누구나 예언자처럼 용기를 내어 얼마든지 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예수에게만 하느님이 친밀한  '아빠'로 오시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도 '아빠'이듯이, 모두가 하느님을 '아빠'로 가깝게 체험한다면 이미 신비가다. 

인격의 변혁: 재물과 명성과 심지어 목숨에 대한 집착마저 버리고..      

▲ 도미니코회의 앨버트 놀런(사진출처/http://www.dominikaner.org/)
이어 놀런은 예수가 자기시대를 살았던 것처럼 우리가 우리시대를 사는데 필요한 실천적 덕목을 소개한다. 예수는 '자유를 향한' 하나의 길이었으며, 예수 추종자들도 자신의 환경과 역사적 사건에 창조적으로 응답함으로써 고유한 길을 간다.  

놀런은 참 자기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먼저 침묵과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우리의 문화와 종교와 사회가 낳은 죄의식에서 돌아서서, 그 상처까지 끌어 안은채, 삶이 안겨주는 숱한 선물을 참으로 고맙게 여기며 '이기심 없는 기도'를 바치고, 어린이처럼 겸손하게 '아빠 하느님'을 신뢰하고, 마침내 재물과 명성과 심지어 목숨에 대한 집착마저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삶이 주는 상처와 고통을 무릅쓰고 '두려움 없이' 들보 아래 묻혀 있는 참자기(true self)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헨리나웬처럼.

"상처를 생각하기 보다는 상처를  살아가는 것이 위대한 도전이다. 걱정하기보다는 우는 편이 낫고, 상처를 이해하려 들기보다는 깊이 느끼는 것이 나으며,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침묵 속에 놓아두는 것이 낫다. 상처를 머리로 가져갈지, 마음으로 가져갈지는 우리가 끊임없이 부딪히며 선택해야할 문제다. 머릿속으로 상처를 분석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으로는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상처가 마음 깊숙이 자리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면 우리는 상처를 통해 살아날 수 있고, 상처가 우리를 파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마음은 상처보다 위대하다."(나웬)

예수는 놀라우리만큼 자유로웠다

놀런은 마지막으로 '근원적 자유'를 찾아가는 길에서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와 가까우시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멀리 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하느님 바깥에 있다. 하느님은 집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집 밖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이미 그분은 나와 하나이며 너와도 하나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 신비의 일부이며, 그 신비 안에 내가 있으므로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하느님도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듯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전한다. 

여기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면, 이웃 역시 있는 그대로 사랑할 힘을 얻는다. 그러나 놀런은 '이웃사랑'을 거론하면서, "어떻게 사랑을 명령할 수 있는가?" 묻는다. 결국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이웃을 나의 확장으로, 더 큰 자기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곧 또 다른 자기인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여기서 요청되는 것이 '공감'이다. 이 공감은 곧 이웃에서, 다른 사람, 자연사물과 우주로까지 확장된다.  

"공감은 연민보다 넓다.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고통받지 않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공감할 수 있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행복한 사람과 함께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하며,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투쟁하는 사람과 함께 투쟁한다."

앨버트 놀런은 "예수는 놀라우리만큼 자유로웠다"라고 말한다. 예수는 사회-종교적인 어떤 권한도 없었으나 당대 사회의 억측과 관습과 문화규범에 이의를 제기하며 반박할 수 있었으며, 율법과 같은 종교적 관습을 대범하게 무시했다. 그는 어떤 누구의 생각이나 말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인격적 자유를 누렸다는 것이다. 이 근원적 자유의 기초는 신뢰이며, 예수가 그랬듯이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활동에 참여한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을 예수도 바라고, 예수가 바랐던 것을 우리도 바람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미리 얻어 누리는 것이다. 예언자와 신비가와 성인들이 그랬다. 

그러나 예언자와 신비가와 성인이 되는 것은 특별한 개인에게만 한정된 요청이 아니다. 칼 라너가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신비가가 되는 것이다. 실상 신비가가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라고 말했듯이, 우리 모두는 이 초대에 응해야 하며, 감당할 힘은 이미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분이 채워주실 것이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이가 하느님의 일을 행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하느님의 일에 함께하고 있지 않다면, 동참하라는 도전을 받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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