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욱종의 우리네 교회는]

프랑스 파리를 찾게 되면 대개가 루불 박물관, 개선문, 에펠탑, 오르쎄 미술관을 방문한다. 물론 몽마르뜨 성당과 노틀담 성당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노틀담 성당을 다른 관광지처럼 그저 구경만 하고 지나치기 마련이다. 요일을 잘못 택하면 그렇기 되기 십상이다.

 나는 마침, 토요일 저녁과 주일에 노틀담 성당을 찾게 되었다. 연이어 이틀을 노틀담 성당에서 보낸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미사전례에 참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주일 아침에, 나는 세 가지 전례에 연이어 참례할 수 있었다.

 첫미사는 전통적인 미사였다. 둘째 전례는 그레고리안으로 노래하는 아침기도였고, 셋째 전례는 관광객을 위한 인터내셔날 미사였다.

 각각 1시간씩 소요한다면 3시간을 넘게 전례에 참례한 셈이다. 3시간씩이나? 당장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루하게 시리! 그러나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오전 내내 성당에 앉아서 계속 달라지는 전례를 참례하는 재미를 알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전례가 재미있다는 말이다. 재미있는 전례? 이벤트의 연출로 오해하기 쉬우나 그건 정말 오해이다. 전례의 의미들을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전례는 풍성해져서 재미있기 까지 하고, 분명한 메시지로 다가오며, 더 나아가 새로운 충격으로 파견되어진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입당의 행렬이 장엄해기지 위해서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행렬에 참여하는 사제들이 많아서 긴 행렬이 이루어지면 저절로 장엄해 지는 것일까?

 아니다. 아무리 숫자가 적더라도 십자가를 앞세워 행렬한다면 전례의 시작점에서 본의미를 새겨주는 좋은 외침이 될 수 있다. 비록 행렬에 참가하는 사제가 혼자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와 더불어 입당한다면 절로 장엄해지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가 행렬의 출발과 마침, 행렬 중의 제대 인사 등을 성당의 구조에 맞게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다.

 또한 전례시기에 따라 다르게 구성할 수도 있다. 노틀담 성당에서의 세 번의 전례들이 제각각 다르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그러한 발견들이 만든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시작전례를 제대의 안쪽의 위치한 사제석에서, 말씀전례는 좀더 앞에 위치하고 있는 독경대에서 이루어지더니 드디어 성찬전례가 신자석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제단에서 이루어질 때 증언과 외침은 점증되어 온 성당 안을 채우게 된다. 그 벅참에서 장엄한 파견사가 선언될 때 세상에서 증거자로서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독서의 방식과 연습을 통한 훈련들은 성서를 다른 책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독서시간에 모든 신자가 성서를 보면서 함께 읽어나가는 금지된 행위들을 굳이 하지 않는다 하여도, 전례의 지침과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속에서도 얼마든지 전례의 의미를 살리면서 강조할 수 있는 다양한 상징적 표현들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성찬전례가 시작되기 전에 제단에 온갖 것들이 놓여진다는 것은 미사전례에 대한 불경이다.

 미리 제단에 놓여지는 것들을 열거해 보자. 미사경본, 경본대, 성체포, 성가책, 매일미사책 등이 놓여지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고, 심지어 안경과 손수건까지 놓여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사제의 책상이다.

 인류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이다. 사제의 사사로운 책상에서 감동을 받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노틀담 성당에서 세 차례 이어졌던 전례는 참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차라리 재미있기까지 하였다.

 물랑루즈의 재미를 미사전례에서의 재미와 같은 차원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결코 비교의 차원이 되지 못한다. 그 어디에서도 만들어낼 수 없는 재미와 감동으로 채워지는 전례, 그래서 삶의 지표를 새롭게 만들어주는 힘을 가진 전례, 그런 전례가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전례이다.

 그건 특별한 행사 때에만 이루어지는 전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인 매일의 미사전례 때마다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조욱종 (요한) 천주교 부산교구 부곡동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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