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일 주교 "지도층부터 풀뿌리 백성까지 경제 중심.. 경쟁사회가 자살 부추겨"
-인간이 될 생명은 처음부터 인간.. 태아생명도 존중해야.. 여성 인권도 강조

그동안 4대강 사업에 대해 강력히 반대해 온 강우일 주교가 지난 7월 9일부터 11일까지 음성 꽃동네에서 치러진 전국생명대회에서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기조강의를 했다. 생명대회에선 낙태문제와 장기기증운동, 미혼모 문제 등이 주로 거론되었으며, 강우일 주교는 인간존엄성을 기초로 집단학살과 노동문제 등 인간생명을 둘러싼 폭력의 문화, 죽음의 문화 전체에 대해 발언하면서, 경쟁 위주의 한국사회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 강우일 주교 (사진/고동주 기자)
이번에 우리는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와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가 공동주최하는 ‘생명대회’를 갖기 위해 모여왔다. 이번 대회를 갖게 된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최근 용기 있는 산부인과 의사들의 결연한 자아 고발과 성찰이 있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낙태는 현행법으로도 금지되어 있으면서도 법을 집행하는 사정기관에서도 눈감고 문제 삼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임신중절 수술을 해주었다. 모자보건법이 입법된 이후 해마다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이 채 세상 빛을 보기 전에 어머니 태속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뜻있는 산부인과 의료인들이 자신들의 이런 현실에 너무나 큰 자괴감을 가지고 더 이상 그런 생명을 죽이는 의료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천하에 밝히며 일어섰다. 그런 의료행위를 하는 동료 의료인들을 고발하는 것까지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가톨릭교회는 옛날부터 낙태를 반대하며 정부와 국회의 그릇된 정책에 강하게 항의하고 비판하였지만, 이 용기 있는 산부인과 의사들의 결단과 행동에 주교들도 놀라고 감사하였다. 그래서 이분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연대하며 인간 생명 청소를 무감각하게 반복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반생명적 행태에 경종을 울리고 생명 존중을 위한 새로운 결의와 각오를 다지기 위하여 이번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인간은 수단화될 수 없는 존엄한 존재이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무생물과 생물, 온갖 풀과 나무, 땅을 기는 것에서 하늘을 나는 것, 물속에 사는 것들 모두를 지어내시고 보시니 좋다고 축복하셨다. 그리고 그 모든 피조물의 정점에 인간을 만드시고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 창조의 완성이고 결정체이며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을 잇는 대표이기도 하다. 사람은 하느님의 입김, 하느님의 숨을 직접 받은 존재로 하느님 닮은 존재이며, 그래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마름으로 하느님께서 빚어주신 피조물들이 각각 창조주의 뜻에 따라 번성하도록 돌보는 책임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보다도 고귀한 존재이고 어떤 일이 있어도 훼손해서는 안 되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라도 수단화되거나 도구화될 수 없는 존엄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인간 스스로 하느님께 창조된 이후 처음부터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그 자유와 능력을 남용하고 왜곡하여 하느님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다른 인간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악을 저질렀다. 원죄 이후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저지른 최초의 죄악이 형제의 살인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역사를 살아 나가면서 온갖 구실을 붙이며 끊임없이 수많은 생명을 훼손하고 제거하였다.

왜 인간은 인간을 마구 짓밟았을까?

왜 그렇게 인간은 고귀한 생명을 아무렇게나 대하고 마구 짓밟았을까? 어떻게 같은 인간인데 그럴 수 있었을까?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저질러진 전쟁과 거기서 죽어간 생명들을 생각하면 정말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이 같은 인간을 그렇게도 무자비하게 짓밟은 것은 결국 인간이 얼마나 고귀하고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인간은 스스로가 자신을 창조한 것이 아니기에 인간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지 온전히 파악하지도 못했고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역사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인간이 다른 인간 생명을 아무렇게나 취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인간들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참극을 저지르면서 비로소 조금씩 생명의 존귀함을 깨달았고, 생명을 훼손하는데 따른 고통을 맛보면서 생명이란 그렇게 마구 짓밟아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시간과 더불어 아주 천천히 터득하기 시작하였다.

거룩한 전쟁(?), 당시 사람들의 의식수준일뿐

고대인들에게는 인간이라고 해도 모두가 같은 인간 생명으로 보이지 않았다. 특히 다른 종족, 다른 계층, 천민계층, 노예, 전쟁포로 등은 동급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정말 끔찍한 전투를 벌이고 가나안 땅 각 지역을 점령하면서 원주민들을 수도 없이, 그것도 거리낌 없이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판관들이 하느님의 명을 받고서 전투를 벌이고 적들을 잔인하게 도륙하는 구절을 읽으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을까? 이런 구절에서 많은 사람이 성서에 어떻게 이런 내용이 적혀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표현들은 하느님이 직접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다. 아직 그들의 의식 수준에선 같은 종족, 같은 부족에 속한 이들만이 훼손해서는 안 되는 인간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민족이나 타종족은 같은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윗도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이스라엘을 통일 왕국으로 평정하는 과정에서 수도 없는 전쟁을 치르며 적들을 엄청나게 죽였다. 그 시대에는 다른 종족을 쳐부수고 다른 신을 섬기는 부족을 죽여 없애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망하고 수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유배지로 끌려가고, 이민족의 지배 속에 여러 세기를 고통 속에서 살면서 그들은 인간이 갖는 인격의 품위와 가치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조금씩 터득하게 되었다.

▲ 생명대회 마지막 날에 4천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해 생명수호 파견미사를 봉헌했다. (사진/고동주 기자)

인간권리에 대한 깨달음

인간이 비록 적이라고 해도, 다른 민족이라고 해도, 비천한 노예라고 해도 그렇게 마구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는 주인의 사유재산으로 간주하는 것이 상식이었고 얼마든지 사고팔고 할 수 있었고, 주인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고 하여도 괜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노예처럼 팔려가고 끌려가고 종살이하면서 노예들도 결코 함부로 억압하거나 무시하거나 짓밟아서는 안 되는 고귀하고 동등한 인간임을 조금씩 깨달아 갔다. 인간은 인간이 얼마나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인지를 오랜 수난과 역경의 경험을 통해서 조금씩 배워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우리 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서 완전히 한 등급 아래의 존재요, 가장이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괜찮은 소유물 같은 존재로 인식했다. 그래서 20세기 전반,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여유가 좀 있으면 아내를 몇을 두던 조금도 흠이 되지 않는 사회였다. 여성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인간 대접을 받고 평등한 인권을 인정받게 된 것은 몇 년 안 되었다. 성폭행이나 성추행범죄에 대한 징벌의 수준이나 사정당국의 판단 기준이나 법체계가 선진국에 비하여 상당히 뒤쳐져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반증이다.

노동자의 인권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불과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들은 온전한 인간대접을 못 받았다. 기업주가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괜찮은 존재로 인식했고 비인간적인 노동환경과 처우를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하다 사고라도 생겨서 일 못하게 되면 내쫓아 버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이런 노동자들의 많은 고통과 아픔이 축적되고 폭발하면서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무리 비천한 일을 해도 똑같은 존엄한 인간임을 조금씩 겪어가면서 터득하였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같은 인간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어떤 의미로 참으로 우매한 존재들이었다. 오랜 세월과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상처와 아픔을 통해서 비로소 조금씩 눈이 열리고 깨달음을 얻어왔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다. 수 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아직 70년도 안 되었고, 그 후에도 6.25 전쟁, 월남 전쟁, 쿠웨이트, 아프간, 이락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고한 생명이 죽임을 당했고, 아직도 총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인간 생명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행위는 전쟁만이 아니다. 반드시 칼이나 총으로 목숨을 끊어야 살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인류는 아직 인간 생명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성숙되지 못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 생명을 훼손하고 절단 내고 있다.

온갖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는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다

▲ 사진/고동주 기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생명의 복음>에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지적하는 인간 생명에 관한 가르침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씀하였다.

“온갖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을 해치는 고문, 심리적 억압과 같이 인간의 온전함에 폭력을 자행하는 모든 행위;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불법 감금, 추방, 노예화, 매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 또한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이윤 추구의 단순한 도구로 취급당하는 굴욕적인 노동 조건; 이 모든 행위와 이 같은 다른 행위들은 참으로 치욕입니다. 이는 인간 문명을 부패시키는 한편,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도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을 더 더럽히며, 창조주의 영예를 극도로 모욕하는 것입니다.”(사목헌장 27항, 생명의 복음 3항)

그 밖에도 오늘날에는 과학이 발달함으로써 우리는 인간 생명의 새로운 지평과 새로운 전망을 인지하게 되었다.

임신한 여성이 아직 자신의 임신을 전혀 감지하지도 못하고 있을 때, 임신 5주째의 태아에는 이미 뇌파가 감지되고 눈이 생기고 손가락 다섯 개가 식별되는 것이 확인되고, 6주째에는 뼈대가 형성되고, 7주째에는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독자적인 생명으로 자라고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이 나라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어머니 태속의 어린 생명이 살해당하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태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니 뱃속에 아주 작은 사마귀 하나 정도 난 것으로 간주하고 간단히 떼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태아는 모체가 느끼지도 못하는 시기에 이미 얼마나 독자적인 생명을 빠르게 성장시키고 외부의 소리나 충격, 모체의 슬픔과 기쁨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모체와는 엄연히 독립된 생명체로 자라고 있는 이런 태아를 낙태하는 데 어떤 방법이 동원되는지 대부분의 산모나 주변 사람들, 낙태를 권장하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마치 2차 대전 시기에 독일 나치가 수백 만 명의 유대인들을 집단 수용소 가스실에서 독살하고 태워버리고 있을 때, 세계 여러 나라의 지도자나 백성들은 그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상한 소문을 듣기는 했어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또 더 이상 깊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이 오늘의 낙태를 시술, 묵인, 방조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 낙태의 진실에 대해 그냥 눈감고 더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가 그래도 시간이 갈수록 인간 생명의 존엄과 고귀함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고 그 존엄을 보호하고 지키는 역사 발전의 대열에 설 수 있으려면, 우리는 오늘날 저질러지고 있는 인간생명에 대한 엄청난 도전과 파괴 행위에 대해 이를 알리고 중단하도록 호소하고 행동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2차 대전 헤아릴 수 없는 유대인들이 죽어가는 데도 그냥 외면하고 침묵하던 수많은 대중의 대열에 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이 될 생명은 처음부터 인간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거론한다면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 생명의 또 하나의 새로운 지평이 알려지고 우리들의 관심과 선택을 요청하고 있다.

2008년 5월 국회는[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생명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체세포 복제배아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률이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은 결국 복제배아를 이용하여 불치병 환자의 치료에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아무리 다른 생명을 위한 것이라 하여도, 그대로 두면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생명을 인위적으로 훼손하거나 파괴하여 실험실의 자료로 소모적으로 사용하고 폐기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인간 배아는 당연히 생명을 지닌 인간 개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양보할 수 없는 확신이자 믿음입니다. 국제적인 협약과 조약 역시 배아를 인간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 배아에서부터 인간 생명의 모든 프로그램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 배아가 자율적인 유기체로 발달하여 하나의 완전한 태아로서 태어날 온전한 인간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될 생명은 처음부터 인간입니다. 그런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책무를 가진 정부와 입법기관이 이러한 인간 생명을 단순한 생물학적 재료로 전락시키려는 시도를 입법화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고 우려해야 할 사안입니다.

희귀병과 난치병 등의 치료를 위해 온전한 인간 생명인 배아를 만들고 또 희생시켜도 좋다는 발상은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는 약한 생명은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는 강자를 위해 희생되어도 좋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희귀병과 난치병 치료를 위한 생명과학 분야의 연구와 실험은 매우 절실하지만 그 연구와 실험이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이루어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개악된「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 대해 심각히 우려하며... 2008.5.16)

우리는 이 시대의 과학기술 발전으로 말미암아 인간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한 단계 더 높이 고양하고 더 넓게 확대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인류가 고대 사회에서는 아직 동등한 인간으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노예, 천민, 전쟁포로, 여성, 어린이, 이민족들도 오랜 역사적 체험을 통하여 똑같은 인간, 존엄한 인간임을 서서히 깨달아 왔듯이, 오늘날도 인류는 아직 세포 덩어리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 배아와 태아에게도 동등한 인간 존엄성이 내재된 존재임을 어서 빨리 깨닫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자살을 부추기는 사회, 경쟁사회가 문제다

인간 생명이 좀 더 전체적으로 포괄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우리의 의식은 단순히 출산 이전의 생명, 즉 태아나 배아에 대한 인간 존엄성의 인정에 국한될 것이 아니다. 인간 생명의 존엄함은 생명이 다 꺼져가는 마지막 상황, 질병이나 노쇠로 인해 신체적인 생명력이 극도로 감퇴된 장애인이나 육체적인 질병, 또는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병자나 노인에게 있어서도 똑같이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에서 최고의 자살율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의 어떤 조사에는 국민의 15%가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는 답변이 나왔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월등하게 높은 수치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병든 사회임을 입증하는 수치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살까지 생각하는가? 사회 전체가 지도층에서부터 풀뿌리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하고, 그래서 모두가 일렬종대로 경쟁 대열에 끼게 되고 그 대열에서 낙오되는 데 대한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지워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게 된다.

정말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사회 전체를 어둡게 뒤덮고 있다. 경쟁에 지는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 인생을 실패로 결정짓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경쟁에 이긴 사람도 결과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경주에 일조를 하였으므로, 하느님 대전에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에 어느 일간지에 보니 여고생이 제 엄마에게 유서를 남기고 베란다에서 투신했다. 유서는 단 네 글자였다. ‘이제 됐어?’ 엄마가 요구한 성적에 도달한 직후에 이 아이는 죽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다른 부모들이 부러워하는 외고에 다니고 있었고, 그 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이었다.

인간 생명은 뛰어난 성적, 잘 생긴 외모, 풍요한 부, 찬란한 명예, 그 어떤 가치와 비교해도 비교가 안 되는 더 높은 가치이며 존재 자체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함을 지닌다. 하느님의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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