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간이 다시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2021년 신한라이프 TV 광고에 등장해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가상인간 로지 이후 잠시 주춤했던 가상인간이 다시 여러 곳에 등장하고 있다. 최근 제주도는 정책을 소개하는 영상뉴스에 가상인간 아나운서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가상인간 아나운서 이름은 ‘제이나’로, 제주도청 대변인실 소속이다. 제이나는 프로그램 ‘위클리 제주’에 출연해 한 주간 제주도 주요 이슈를 소개한다. 가상인간은 사람과 달리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월 60만 원을 받고 사업주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수행한다. 제이나 같은 평범한 가상인간 말고 유명 가상인간도 있다. 넷마블 자회사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가 지난해 만든 4인조 가상 아이돌그룹 ‘메이브(Mave)’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지난 2월에는 버추얼 아이돌 '메이브' 데뷔 1주년 기념으로 채팅 서비스 행사를 했다.

물론 만들어진 모든 가상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작년 7월 롯데홈쇼핑이 론칭한 가상인간 루시는 온라인 채널에서 라이브 커머스 방송을 진행하며 여러 번 완판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지만, 최근 갑자기 사라졌다. 롯데홈쇼핑은 루시의 활용 방안을 다시 찾기 위해 리뉴얼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정확한 재등장 시기는 알 수 없다. 네이버와 자이언트스텝이 공동 개발한 이솔, 온마인드가 개발한 수아, 이스트소프트가 개발한 백하나, LG전자가 개발한 김래아도 점차 인기가 없어지면서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처럼 가상인간이 새로 출현하고 또 없어지거나 잠잠해지는 와중에도 가상인간 시장은 계속 커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마켓스앤마켓스는 글로벌 인플루언서(사람 + 가상인간 인플루언서) 시장을 2020년 10조 원에서 2025년 27조 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한다. 사람과 가상인간을 분리해 보면 사람 인플루언서 시장은 같은 기간 7조 6000억 원에서 13조 원으로 약 2배 성장하는 것으로 예측됐지만, 가상인간 인플루언서 시장은 2조 4000억 원에서 14조 원으로 약 6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글로벌 마켓에서는 사람보다 가상인간이 더 시장성이 좋다고 전망한 셈이다. 

물론 이런 예측은 시장의 낙관적 전망을 반영한 측면이 많지만 기술 발전 속도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가상인간이 처음 등장하던 시기에는 컴퓨터 그래픽의 한계와 높은 제작 비용 등 때문에 상업적 활용에 한계가 많았지만, 이제 AI 모션캡처, 딥보이스, 5G 통신 등 기반 기술 발전으로 실제 사람처럼 섬세하게 작동하고 데이터 전송이 원활해지면서 활용 영역이 확장되고, 결과적으로 사업 영역이 다양해졌다. 여기에 챗지피티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 도입으로 실시간 대화가 가능해지면서 가상인간은 실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로봇 기술까지 더해 이제는 가상인간이 아니라 로봇인간도 일상화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이렇게 가상인간의 지능이 높아져 정체성에 기반한 자기 자신 표현까지 가능해지면서 이제 화면 속 존재가 실제 사람인지 또는 가상인간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로지의 경우 처음 TV 광고 화면에 나왔을 때 가상인간이 아니라 실제 인물로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착각’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왼쪽) '위클리 제주' 아나운서 가상인간 제이나가 보도 전에 인사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 신한라이프 광고에 등장하는 로지가 'Fly So Higher' 리메이크 영상에서 격렬한 춤을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제주 위클리와 Chaosmos Space 유튜브 채널 동영상 갈무리)
(왼쪽) '위클리 제주' 아나운서 가상인간 제이나가 보도 전에 인사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 신한라이프 광고에 등장하는 로지가 'Fly So Higher' 리메이크 영상에서 격렬한 춤을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제주 위클리와 Chaosmos Space 유튜브 채널 동영상 갈무리)

TV 속 인물 또는 대화의 상대가 정말 사람인지 아니면 가상인간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지면서 다시 존재란 무엇인가에 본질적 질문을 하게 된다. 사람처럼 행동하고 사람처럼 대화하는 가상인간과 실제 인간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유기적 활동을 하는 신체 유무 여부가 판단의 한 기준이 될 수 있겠지만, 물리적 접촉을 할 수 없는 거리에 존재하는 지능의 신체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처음부터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가상인간이라는 사실이 공포되어 있다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 차이를 찾아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이고 철학적 담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공지능을 포함 인간이 만든 모든 컴퓨터 프로그램에서는 시간이 순차적으로 흐른다. 그리니치 표준시에 따라 컴퓨터 프로그램은 부팅되고 작동하고 오프된다. 크로노스라는 하나의 시간만 작동한다. 그러나 인간은 내세에 대한 믿음 여부를 떠나 본질적으로 두 개의 시간을 의식하며 살고 있다. 이런 의식은 신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내재된 호모 사피엔스의 본질이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며 시공간을 의식하게 되었고, 생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진화의 어느 단계에서 서서히 시공간을 의식하며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가 언젠가는 소멸된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영원을 희구하게 되었고, 호모 사피엔스는 치열한 자연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시공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성경이나 진화론 모두 인간의 어느 시기부터 두 개의 시간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그런 의식의 시작이 인간 본성에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 표현하고 있다.  

가상인간과 사람의 본질적 차이가 여기에 있다. 가상인간 또는 로봇인간 아니면 그 무엇이라 부르든 멀지 않은 시간에 인간 지능과 유사한 지능이 탑재된 존재가 등장해 사람과 자유롭게 대화할 날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시기가 가까워 올수록, 대화하는 당신이 정말 사람이 맞느냐는 질문 역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질문은 분명하다. 카이로스를 알고 있느냐고. 가상인간과 달리 인간은 현재를 살면서 과거에 살고 동시에 미래에 사는 존재다. 태초 전 카오스가 있었고 지금 여기에 실천하는 삶이 있고 언젠가는 가야 할 본향에 대한 소망이 있다. 인간 아닌 존재들에게는 이 중 어느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 개의 시간을 하나로 엮어 호흡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김홍열

연세대 졸업. 사회학 박사. 미래학회 편집위원.
저서 "축제의 사회사", "디지털 시대의 공간과 권력"
공저 "뉴사피엔스 챗GPT", "시그널 코리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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