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역사는 번역과 편집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맨 처음에 계셨던 말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셨던 그 말씀은(요한 1,1) 육화라는 인간적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시발이었던 말씀의 육화 이래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목격 증인인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복음서로 번역되고 편집되었다.

이후 교부들이 그리스도교의 삶과 사상을 이끌었다. 교부들은 히브리 성서의 고대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하느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했던 교부들은 칠십인역을 깊이 존중했다. 그들에게 칠십인역은 현대인들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거룩한 권위를 지니는 경전이었다.

칠십인역은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고 초기 라틴어역 성서들은 칠십인역 성서를 번역한 것들이었다. 그러다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역이 탄생했다. 불가타역 이전의 라틴어역 성서들은 여러 판본의 칠십인역에서 번역되었고 조야한 번역도 많았지만, 히브리어 성서에서 직접 번역된 불가타역은 훨씬 정제되고 통일성을 갖추었으며 결국 교회의 공식 성서로 인정받았다. 번역이 없었다면, 칠십인역과 불가타역이 없었다면, 저 숱한 무명의 번역자들과 편집자들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 역사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교회의 신학적 논쟁과 개혁도 번역과 깊은 관련이 있다. 멀리서는 동일 본질,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녀 등의 번역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고, 가까이에서는 대표적으로 하느님과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두고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은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혁을 통한 자국어 미사 등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교회의 긴 역사에서 성서 전권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 가톨릭 신학계에서 가톨릭의 성서 번역과 관련된 논의가 활발하지 않은 현실이 한편으로 아쉽기도 하다.

(왼쪽부터) 이집트에서 작성한 칠십인역 시편 88편 4-8절 내용이 담긴 파피루스 조각 . (이미지 출처 = The Duke Papyrus Archive) 하단 여백에 Johanneum 쉼표가 있는 8세기 불가타 사본.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왼쪽부터) 이집트에서 작성한 칠십인역 시편 88편 4-8절 내용이 담긴 파피루스 조각 . (이미지 출처 = The Duke Papyrus Archive) 하단 여백에 Johanneum 쉼표가 있는 8세기 불가타역 사본.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인공지능의 빠른 발달로 가까운 미래에 번역가와 통역가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예견하는 이들이 많다. 실로 인공지능의 번역 수준은 나날이 향상되고 있고 그 번역의 속도는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정도다. 미래에도 번역가는 책을 낼 수 있을까? 많이 줄기는 하겠지만 인공지능에 자신의 지성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번역하려는 사람들도 꾸준히 있을 것이다. 다중언어 가능자가 유례없이 증가하는 현상은 인간의 또 다른 욕구를 설명해 준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책들은 번역가와 편집자를 갈아 넣어서 나온 산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번역이나 편집으로는 먹고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20여 년 전 받던 번역료는 지금도 그대로이고, 많은 편집자의 연봉은 처참할 정도다. 나는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간간이 번역도 했고 인연이 닿아 지금은 출판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그래서 번역가와 편집자의 기쁨과 어려움을 조금은 알고 있다. 편집 일을 하기 전에는 잘 인식하지 못했던 번역가의 흔한 실수를 볼 수 있게 되었고, 편집자는 쉽게 알기 어려운 번역가의 고충도 어느 정도 이해한다.

좋은 번역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고, 훌륭한 편집자가 되려면 긴 양성기가 필요하다. 로마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여러 학자나 교수들의 글을 접했지만, 참으로 번역을 잘한다고 느꼈던 이들은 극소수다. 번역문을 원문과 비교해 보면 번역가의 성격이나 성향, 우리말에 대한 애정 등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꽤 있다. 어떻든 하나의 언어를 세상에 내놓는 일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일이다.

보통 외국에서 갓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의욕 충만한 젊은 학자들의 우리말이 좋지 않다. 특히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우리말이 좋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글쓰기 습성을 돌아보지 않아서 똑같은 실수를 계속 되풀이하거나 습관적으로 오역하는 이들도 있다. 번역가든 편집자든 시간을 들여 따로 우리말 공부를 해야 한다. 우리말 실력은 속성으로 마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끊임없이 노력하며 배워야 조금씩 늘 수 있다. 외국어에 쏟는 정성 이상으로 공을 들여야 한다. 우리말이 괜찮으면 외국어 실력이 떨어지고 외국어가 괜찮으면 우리말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번역하거나 글을 쓰면서 살아가길 원하는 이들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우리말에 대한 애정을 되새길 수 있길 바란다. 번역가와 편집자는 노고와 전문성에 비해 터무니없는 삯을 받는 직업이지만, 언어를 다루는 일이기에 가능한 한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염된 언어는 씻기 어렵기 때문이다.

번역가는 새로운 표현을 발견하는 데서 희열을 느낀다. 며칠을 단어 하나와 고심하다 적확한 우리말 표현을 발견했을 때 만나는 기쁨과 자부심은 뿌듯하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번역가에게 도전해 오는 단어와 맥락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웬만큼 실력을 쌓아도 모르는 부분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번역가의 자유는 언제나 원문에 제한된 자유다. 그러나 이 제한된 자유가 때로 번역가를 자유롭게 한다.

신앙인은 예수의 삶을 자기 삶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예수라는 원문에 제한되어 있지만, 그 제한 속에서 번역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좋은 번역가가 되려면 예수라는 원문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편집자는 뜻밖에 훌륭한 원고를 만날 때 가슴이 뛴다. 이 원고를 편집하고 독자들에게 멋진 모습으로 가닿을 생각에 가슴이 뛴다.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를 때 편집자는 자부심을 느낀다. 번역과 편집 속에 어려움이 적지 않지만, 거기에는 자유와 창조와 친교도 있다.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그리스도교는 이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삶과 언어로 번역하고 편집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의 삶과 언어는 어떠한가? 나의 번역과 편집은 어떠한가?

강창헌

신앙인아카데미에서 10여 년간 일했고,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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