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전례나 행사 중에 사제나 주교로부터 “형제자매 여러분”이나 “교형자매 여러분”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아름다운 호칭이다. 성직자나 수도자는 나를 형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신앙인들도 서로를 흔히 형제님이나 자매님이라고 부른다. “여러분의 선생은 한 분이요 여러분은 모두 형제들”(마태 23,8)이라는 예수의 말씀과도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관습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 인간의 언어에서 형제나 자매보다 아름다운 말이 얼마나 더 있겠는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으니 그 제자들이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형제들이라는 저 선언 다음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예수의 권고는 당황스럽고 불편할 정도다. “여러분은 땅에서 누구를 여러분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시오. 사실 여러분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마태 23,9) 물론 혈육의 아버지에게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시 아버지라고 불렸던 교역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역사와 맥락이 달라서 문자 그대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신부를 신부라고 부르지 말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성직자이거나 수도자인 당신이 형제라고 부르는 나는 당신을 형제라고 부르기가 쉽지 않다. 당신은 나에게 아버지(신부님)이거나 도를 닦는 분(수사님, 수녀님)으로 불린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교계의 직위가 올라갈수록 호칭은 더욱 찬란해진다. 아빠스(아버지/수도원장), 몬시뇰(나의 주인), 주교(각하), 추기경(전하), 교황(성하) 등.

내가 당신에게 신부님, 수사님, 수녀님, 아빠스님, 주교님, 추기경님, 교황님이라고 부르는 대신에, 당신이 나를 부르듯 형제님이라고 부르면 어떨 것 같은가. 형제애를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당신을 자매님이나 형제님이라고 부르면 당신은 그것을 충분히 공감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당신에게 형제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당신은 내게 형제가 아니다. 복음적으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제도나 관습이나 느낌이나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당신을 형제라고 불러 본 적도 없고 형제라고 부를 생각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샤를르 드 푸코의 후예인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와 예수의 작은 형제회의 수도자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 그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서로 ‘언니’와 ‘형’이라고 부른다. 샤를르 형제의 신앙과 영성을 잘 표현한 우리말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과 우애를 쌓으려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는 호칭이나 복장을 넘어서 발산하는 독특한 ‘우정’이 있다.

2022년 8월 프란치스코 교종과 바티칸 고위 성직자들 모습. (이미지 출처 = Goa Diocesan Centre For Social Communication Media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2022년 8월 프란치스코 교종과 바티칸 고위 성직자들 모습. (이미지 출처 = Goa Diocesan Centre For Social Communication Media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교회에서 호칭이나 복장으로 신분을 나타내는 것은 중세 봉건사회 권위주의가 박제화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고위성직자들의 울긋불긋한 복장이나 그들을 부르는 호칭을 예수는 어떻게 생각할까? 예수의 친구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성직자들의 복장도 한 시대의 언어다. 모든 옷은 우리의 육신과 더불어 언젠가는 벗을 수밖에 없는 물건이며 경건한 모든 호칭도 시대의 반영물이다. 당신은 나의 형이고 나는 당신의 형일 수 있을까. 당신은 나의 언니이고 나는 당신의 언니일 수 있을까.

예수는 평신도였고 교회를 설립한 인물도 아니다. 예수가 대사제이며 교회의 설립자라는 인식은 후대의 해석이다. 물론 교회의 기원에 예수 운동이 있었지만, 유대교와 빠르게 결별하며 조직된 교회는 예수 부활 이후 제자들이 봉사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모임이다. 예수는 바리사이 및 율사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그들을 향한 예수의 독설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죽했으면 “눈먼 길잡이”, “회칠한 무덤”, “위선자”,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했겠는가. 이 갈등의 이면에는 그가 아버지와 맺은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 이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었고, 그래서 다른 존재를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그에게는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었다. 아버지 칭호를 하늘 아버지에게만 한정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구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어떤 교구의 교구장이 사목교서를 통해 이렇게 인사한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이제부터 저를 주교님이라고 부르기보다는 형제님이라고 불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교구의 사제들에게도 가능한 한 형제님이라 부르시고 수도자들에게도 형제님이나 자매님으로 불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교의 관이나 지팡이나 복장도 이제는 착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으니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당연히 서로 형제자매라고 불러야 하겠습니다....”

신학의 난점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몸으로도 논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쓰고 있는가. 서공석 신부의 조언으로 글을 맺는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2천 년 동안 축적되고 경직된 조직과 제도의 유적이 많이 있습니다. 유적은 오늘의 사람들이 관람할 대상이지, 몸담고 살 현장은 아닙니다. 그 유적을 걷어 내고 실효성 있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을 위한 신앙 언어가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입니다.”(서공석, "오늘을 위한 신앙 언어", 도서출판 빅벨, 2014, 14쪽)

강창헌

신앙인아카데미에서 10여 년간 일했고,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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