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매달 네 번째 금요일에 '나를 향한 신학'을 한 해 동안 연재합니다.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비판적 신학 에세이로, 우선 '나'를 위한 구원적 글쓰기에서 '수많은 다른 나'에게도 조금이나마 생각거리를 던져 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강창헌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놀 만큼 놀았다. 먹을 만큼 먹었고 마실 만큼 마셨으며, 헤맬 만큼 헤맸고 아플 만큼 아파도 보았으니 이제 살 만큼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나이쯤 되면 노장이나 요한계 문헌, 또는 경지에 이른 영성가의 서적을 읽으면서 지나온 삶을 관조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자신을 그려 보곤 했다.

사실 이 나이쯤 되면 삶의 지혜와 체험이 무르익은 가운데 지긋이 속세를 바라보며 막걸리 한 잔에 시인 천상병과 더불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을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일몰을 눈앞에 두고 술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은 소박한(?) 꿈을 여러 차례 꾸었었다. 이 나이쯤 되면 원숙한 경지에서 삶을 돌아보면서 평화 속에서 고요히 죽음을 환대하는 그런 ‘나’를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알고 있다. 갈 길이 멀고 아직도 꽤 남아 있다는 것을. 젊은 시절부터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을 철석같이 믿고 막 지내다 보니 준비 없는 불안한 여생이 길게 펼쳐 있고, 눈을 떠 보니 전보다 삶이 더욱 혼란스러워진 느낌이 든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인생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더욱 헝클어져 버린 느낌이 들 때가 적지 않다. 삶의 속알이 빠졌거나 사라져 버렸다는 이 암울한 기분을 표현하기조차 쉽지 않다. 과연 인생 말년에 여유롭게 성찰하고 죽음을 환대할 수 있는 선택은 내게 가능한 것인가?

현대의 뛰어난 영성가로 알려진 리처드 로어 신부는 그의 묵상 선집에서 틱낫한 스님이 토머스 머튼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대목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젊은 수도승들에게 명상을 가르치지 않아요. 그들은 먼저 쾅 소리 나게 문 닫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설명을 이어 간다. “영적 스승은 말할 것이다, ‘먼저, 소리 나게 문 닫기를 그쳐라. 그러면 영성 유치원에 들어갈 수 있다.’ 너무나도 많은 신부, 주교, 목사들이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있다. 그러면서 어떻게 평신도들이 나아지기를 기대한단 말인가? 하느님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에고는 저 자신을 애무하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나르시시즘의 거의 완벽한 껍질로 저를 보호한다. 내가 이를 아는 건 직접 해 보았기 때문이다.”(이현주 옮김, "리처드 로어 묵상 선집", 300-301쪽, 분도출판사)

나는 무지막지한 정치 지도자들과 사회의 기득권층을 보면서, 그리고 교회 교도권의 이해 못 할 행태를 보면서 너무도 자주 분개한다. 그리고 나를 거스르는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도 여전히 분노한다. 의분은 때로 눈물을 쏟게 하지만,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게 하는 것은 다스리지 못한 내 안의 분노다. 고대 그리스도교의 수도승들에게도 분노는 가장 경계해야 할 정념 중 하나였다. 분노가 일어 그것을 다른 이들 앞에서 표출하면 소위 도가 덜 닦였다는 방증이었다.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은 후 짧지만 깊은 그 정적 속으로 아프게 걸어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쾅 소리와 함께 신뢰와 사랑도 무너졌고 우주도 무너졌다는 것을.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문을 소리 나게 닫아야 할 일은 없겠지만, 쾅 소리가 나는 순간은 분명 중요한 무엇이 닫히고 무너지는 순간이다.

여태까지 살면서 이런저런 일을 해 보았고 여러 곳을 떠돌며 하고 싶은 일도 충분히 했지만, 문득문득 후회로 다가오는 작은 순간들이 있다. 아, 그때 그 순간에 왜 그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했던가, 그때 그 시절 왜 더 큰 사랑에 열정을 더 바치지 못했나. 돌이켜 보면 충분히 하지 못한 것은 사랑이었다. 모든 것을 다 이루더라도 단 하나 이것이 없으면 실패한 인생이 되는 것, 바로 사랑이었다.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살고 보니 원수는 고사하고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결코 쉽지 않았다. 이 뒤늦은 깨우침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이제 와서 무엇을 어쩌자는 말이냐.

소크라테스 이래 여러 위대한 성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텍스트는 ‘나’, 곧 ‘자기 자신’이었다. 나 밖에서 구원을 만나지 못한 많은 성인은 결국 나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했다. 많이 늦었고 여러 좋은 기회도 놓쳤지만, 그들을 따라 나 역시 나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헝클어져 버린 삶,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삶, 갈피를 잡기 힘든 삶, 열심히 살았는데 정답을 잃어버린 삶, 골을 넣기 위해 볼을 잡고 골대를 향해 질주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골대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난감한 삶을 마주하게 된 그런 ‘나’가 갈 곳은 나 밖에 있을 것 같지 않다는 통감 속에서.

그러니 세상 속에 살면서 의로운 분노를 잃지 않고, 쾅 소리 나게 문 닫지 않으려는 노력을 함께 안으며 남은 생을 살아 보면 어떨까 싶다. 적어도 살아서 유치원에나마 입학은 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설마 사랑하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 따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제대로 이순을 맞이한다면, 타자의 말이나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문을 쾅 닫지 않을 수 있는 정도는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어 본다. 조용히 문을 닫을 수 있는 시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세상 밖에 구원이 없다면, 나 밖에서 그것을 구하는 것도 여의치 않을 것이다. 내가 경험하고 아는 세상과 나는 분리될 수 없으니.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강창헌

신앙인아카데미에서 10여 년간 일했고,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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