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 창고] 왕가위 감독 '동사서독'(1994)

영화제목에서 동사(東邪)는 황약사(양가휘)를 서독(西毒)은 구양봉(장국영)을 일컫는다. 큰 뜻을 품고 사랑하는 이도 등지고 고향 백타산을 떠난 구양봉은 살인청부 중개인 역할을 하면서 살아간다. 구양봉은 꽤 자조적이고 시니컬하다. 예전에 신앙인아카데미에서 있었던 민중신학자 김진호 선생의 <역사와 반역사, 인물로 보는 성서>라는 강의에서 이 영화의 구양봉에 관한 구절은 실로 의미심장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세월이 낳은 긴장의 발전 경로를 전복시킬 역진의 행보를 선택하지 못한 그는 끝내 돌아갈 고향을 상실한다.”

이 영화를 보았던 한 친구는 사랑을 놓진 이의 상처가 얼마나 그 한 사람을 이상한 쪽으로 변화시키는지 설명하기도 했다. 하여튼 서독 구양봉은 이도저도 아니다. 갈 수 없는 고향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향을 상실하고, 자신이 발붙이고 사는 사막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영화 후반부의 대사에서 한 인간의 참으로 안쓰러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양구봉과 대비되는 홍칠(장학우)의 모습은 어떠한 해방감마저 느끼게 한다. 꽤 단순한 이 인간은 중개인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 한판하다 손가락도 잃지만, 크게 후회하는 것 같지 않다. 당신을 닮아가는 것이 두려웠다며 양구봉을 향해 살며시 쏘아대듯 말할 때, 양구봉의 멍한 듯 야릇한 표정은 왜 그리 슬퍼보이던지.

영화 속에서 황약사가 가져온 술 취생몽사가 인상적이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것은 기억력 때문이다.” 그 번뇌의 근원인 기억을 잊게 해주는 술이 취생몽사인데, 그런 술이 정말로 있다면 가끔 땡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취생몽사는 본질적 해결책이라기보다 하나의 도피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이 가끔 웬수 같기는 해도 대놓고 말해 기억이 뭐가 잘못일까. 그 기억을 간직한 존재의 문제겠지. 탈 대로 다 태워버린다면 쓰라리고 힘들었던 기억도 어찌 못 견디리.

하여튼 처음에 거절했다가 막판에 그 술을 들이키는 양구봉이다.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잘 풀어내지 못한 이가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방법이다. 영화대사 중 기억과 관련된 것이 몇 개 있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갖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자.”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 삶을 적극적이고 힘차게 풀지 못한 한 사람의 비극적 모습의 전형으로 비쳐지는 양구봉이다. 영화 속 양구봉을 바라보노라면 루쉰 선생 말대로 “독사처럼 칭칭 감겨라”나 커트 코베인의 유서처럼 “점점 소멸되는 것보다 한꺼번에 타버리는 쪽이 훨씬 좋다”처럼 한 번 주어지는 인생에 대한 치열함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들은 삶 앞에 놓인 문제에 얼마나 힘차고 과감하게 맞붙으려 할까. 어쩌면 많은 경우 ‘우회’와 ‘주저함’으로 도피할진대, ‘우회와 주저의 길’이 그때그때엔 편할지 몰라도 끊임없이, 정말로 가야 할 길과 멀어지게 할 뿐이다. 황량한 벌판에서 멍하게 놓여 있다가 결국에는 취생몽사를 들이키는 구양봉의 모습을 보자면 구양봉이 되고 싶지 않게 할 것이다. 적어도 자신에게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에 대한 사랑과 예의를 생각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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