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의 필름창고] 어윈 윙클러 감독의 <사랑이 머무는 풍경>(1999)

 

한참 슬럼프에 빠진 전형적인 캐리어 우먼 에이미(미라 소르비노)는 머리를 식힐 겸, 한 마을을 찾는다. 거기서 맹인 안마사 버질(발 킬머)에게 안마를 받게 되는데, 버질에게서 생기와 위안을 얻는다. 버질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이 멀었는데, 세상을 이해하고 감지하는 방식이 남다르고 독특하였다. 에이미는 이런 버질에게 신비감도 느끼고 마음도 끌리어 사랑하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에이미는 버질의 시력을 찾아주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본다. 버질은 앞을 못 보고도 사는 데 큰 지장을 느끼지 않고, 지금 상태에 너무 익숙하기도 해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에이미가 원하는 바이기에 수술을 받고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버질이 시력을 찾았지만 이 둘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둘 사이의 크고 작은 불화가 버질의 개안 이후에 찾아온다. 버질은 세상을 못 볼 때보다 더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무언가 보는 것이 너무 힘들다. 심지어 글자를 배우기도 너무 힘들다. 어찌 보면 이도 당연한 것이 버질은 시력을 대신하여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느끼는 방식을 터득했기에 이른바 자칭 정상인에게 익숙한 감각기관이 그에게도 꼭 적절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버질은 이미 온몸의 감각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해왔던 터다. 이런 버질의 특성은 학회에도 보고될 정도로 독특한 것이었다.

게다가 눈에 보이는 것에는 수많은 오해투성이다. 에이미가 전 남자와 이야기 나누는 것에 질투심을 느끼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안 보아도 되는 못 볼 것을 보는 형국이 지속된다. 기실 전체를 못 보고 부분을 보고 그것을 전체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왜곡된 부분은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던 이 남자에게 주어진 보통사람들의 감각기관은 유사한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터다. 

그래도 사랑으로 극복하고 이겨내려 한다. 버질은 배우기 힘들었던 글도 배우고, 조금씩 적응해간다. 그런데 참으로 하늘은 무심하기도 하지. 오 헨리의 단편 <개심 뒤에 오는 것>처럼 이제 마음 잡으려냐 했더니 그때에 남자의 눈이 흐릿해진다. 의사는 말한다. 조만간에 다시 시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남자는 여자를 잠시 떠나 다시는 못 볼 세상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마을 도서실에서 화보집 같은 책을 잔뜩 빌려 무언가를 열심히 본다. 이미 시력이 자신의 감각으로 자리잡아갔기에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모습도 이제는 그에게 소중하게 느껴졌으리라. 그리고 어느 경기장에서 한 아이가 들고 있는 솜사탕을 보고서야 시력을 잃기 전 어렸을 적 아버지와의 환상적 기억의 그 무엇이 솜사탕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남자는 이제 다시 시력을 잃는다. 눈이 멀었지만, 사랑에 눈떠 재회하는 두 사람. 눈떴다가 사랑에 눈멀다가, 다시 눈먼 뒤에 사랑에 눈뜬다. 현란하게 눈에 보이는 것에만 혹해서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헷갈리는 우리가 마음으로 사물을 볼 수 있을까? 정말 우리는 사랑에 눈뜰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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