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민화위, 한반도평화나눔포럼 개최 1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부설 평화나눔연구소 주관으로 ‘2023 한반도평화나눔포럼’을 열었다. 이 포럼은 분단 상황에서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교회의 역할을 모색하기 위해 매년 마련되고 있다. 

올해 포럼은 18일 가톨릭대학교에서 '한반도 화해와 평화에 이르는 길'을 주제로 진행했다. 모두 3개 섹션으로 각각 '화해와 평화에 이르는 가톨릭의 가르침과 걸어온 길', '세계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화해의 길',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가톨릭교회의 과제'를 다루었다.

이날 발표는 박동호 신부(전 서울대교구 정평위원장), 김선필 선임연구원(서강대 신학연구소), 하승훈 교수(리츠메이칸 아시아 태평양대), 김지은 교수(이스턴 메노나이트대), 메리앤 러브 교수(미국 가톨릭대)가 나섰다. 토론에는 박문수 이사(팍스크리스티코리아), 강인철 교수(한신대), 김헌준 교수(고려대), 차승주 연구위원(평화나눔연구소), 최아진 교수(연세대), 마상윤 교수(가톨릭대), 이은형 신부(전 의정부교구 민화위원장)가 맡았다.

서울대교구 민화위는 "이번 포럼의 특징은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국내외 움직임 속에 가톨릭교회가 지켜온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면서, 무력이 아닌 대화를 통한 평화와 화해 가능성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고 의의를 밝혔다.

11월 18일 서울대교구 민족회해위원회가 평화나눔연구소 주관으로 '한반도평화나눔포럼을 열었다. (사진 출처 =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11월 18일 서울대교구 민족회해위원회가 평화나눔연구소 주관으로 '한반도평화나눔포럼을 열었다. (사진 출처 =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교회 가르침은 시대 흐름과 역사 경험 통해 발전, 계승, 축적되어 왔다

평화와 화해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역사와 한국 교회 민족화해 사목 역사를 살펴본 첫 세션에서 박동호 신부는 가톨릭교리, 사목헌장, '지상의 평화'에서 '모든 형제들'에 이르는 교종 문헌의 흐름을 살폈다. 그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교회의 가르침은 시대 흐름과 역사 경험을 통해 발전, 계승, 축적되어 왔다면서, “평화를 구축하는 여정 속에서 교리와 가르침은 갱신된다”고 강조했다.

사회 현안을 전제로 하는 사회교리는 한 국가, 지역 또는 전 세계를 한 사회로 보면서, 사회 현안에 대해 성경, 교회 전승을 토대로 철학적 방법론, 사회 과학, 사회 경험과 지혜를 동원해, 사회 현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성찰하며,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가를 제안한다.

이런 사회교리는 계승, 발전, 축적된다. 1891년 반포한 '새로운 사태'를 예로 들면, 당시 사회 문제로 부각한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성찰했고, 100년 뒤, '노동하는 인간'에서 노동이 지닌 주관적 의미, 인격적 가치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며, 어떻게 황폐화 됐는가를 다시 진단한다. 이어 프란치스코 교종은 더 직접적으로 노동을 배제하는 경제, 사람을 배제하는 자본, 금융체제에 단호한 태도를 밝힌다. 평화에 대한 가르침 역시, 교종은 '지상의 평화' 이후 시대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고, 가르침은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보이고 있다.

박동호 신부는 이렇게 가르침을 계승, 발전, 축적하기 위한 사회교리 방법론은 “관찰, 판단, 실천”으로 시대 징표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성찰하며, 인류가 나아갈 길을 제안, 그 모범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이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역사적 경험상, 힘없고 약한 이들, 사회의 약한 부분부터 고통으로 내몰린다”고 말했다.

“2차 대전 이후, 국제 사회는 인간 존엄, 권리, 의무에 있어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의무가 따르지 않고, 힘의 균형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의 권리 신장은 기존 약한 이들의 권리를 오히려 심각하게 침해한다. 사회교리는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인정하지만 반드시 타인에 대한 책임, 공동선에 책임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박 신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에서 특히 2부 5장 ‘평화 증진과 평화공동체’에서는 현실적으로 국제 질서 안에서, 세계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교회가 어떻게 헌신할 것인가, 평화 건설에 교회의 임무는 무엇인가를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교회는 평화를 위한 힘의 균형, 무력의 균형 논리가 오히려 새로운 분쟁을 낳는다고 본다. 그 실례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무력의 균형이 담보하는 평화는 거짓 평화라고 이른다. 교종은 그런 거짓 평화는 두려움과 공포라는 정신 구조로 유지되는 안전지대라고 고발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촉구한다.”

박동호 신부는 평화는 진리에서 출발해야 하며, 진리란 역사적 사실로, 분쟁이 사람들에게 어떤 아픔을 주었는지 대면하는 것이라며, “평화 문제는 가장 약한 존재에서 그리고 그 현장에서 출발해야 하며, 치유와 화해는 그렇게 시작돼야 한다. 그런 평화를 구축하는 일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리가 평화의 일꾼으로 불림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이것이 교회가 헌신해야 할 몫이라면서, “특히 정치인과 경제인들은 평화 구축에 반하는 유혹에 빠지기 쉬우므로 그들의 절제와 억제를 위해 보통 사람들의 운동이 필요하다. 건강한 압력 행사를 위해서 한국 교회가 평화의 일꾼으로서 시민, 교우들에게 의식을 불어넣어야 한다. 한반도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평화운동이 구체적이고 실효적으로 구조화되기를 바란다”고 제안했다.

11월 18일 서울대교구 민족회해위원회가 평화나눔연구소 주관으로 '한반도평화나눔포럼을 열었다. (사진 출처 =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반공주의에 매몰됐던 교회, 시대 변화와 함께 대북관 변해

이어진 발표에서 김선필 선임연구원은 민족화해위원회를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 민족화해운동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펴보고, 그 과제와 역할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 교회 반공주의 역사, 교회 반공주의가 민족화해운동으로 어떻게 전환되었는지, 그 이후 어떤 방식으로 민족화해 운동으로 자리잡았는지 살폈다.

일제강점기, 해방 정국, 한국전쟁까지, 한국 교회는 공산주의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스도교를 지배계급에 종사하는 허위 의식으로 규정한 공산주의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교황청은 “공산주의는 전염병”(교종 비오11세)이라는 태도를 유지했고, 보편 교회의 반공주의는 한국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일제의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고, 이는 다시 식민주의를 강화했다. 1945년 해방 정국, 소련의 북한 지배로 북한 지역 교회가 위기를 맞았다. 남한은 친그리스도교 정책을 쓰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남한 교회는 공산주의와 더욱 대립하고 반공주의는 강화된다. 남한 교회는 조선시대 박해의 트라우마가 더해져 미군정, 우익과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1946년 3월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북한 교회가 사실상 파산하고, 교회 구성원들이 목숨을 잃게 되면서 남한 교회는 공산주의를 악마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은 ‘십자군 전쟁’이었고, “공산주의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는 교종 비오12세의 메시지는 더욱 이런 인식을 부추겼다.

분단 뒤, 남한 교회는 북한 교회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북한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시복운동도 전개한다. 북에 대한 적개심을 계승한 남한 교회는 심지어 반공주의를 내세운 군부 쿠데타를 지지한다.

북한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점점 약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대 들어서다. 김선필 연구원은 “1960년대 이후, 반공주의가 약화된 것은 전후 복구와 급증한 신자 관리,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계제도 정비가 급선무였기 때문”이라며, “교회는 박정희 정권 시기 산업화로 인한 노동자 착취, 부정부패 등의 문제로 국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남한 사회의 쇄신이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한 길이라는 인식 때문에 전면적 사회 참여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는 북한을 악마에서 선교 대상으로 인식 전환이 일어난다. 한국 천주교회 설립 200주년 기념사업과 교종 방한 등이 계기였으며, 이 당시 북한 교회에 대한 교종 요한바오로 2세의 물음에 답해야 하는 필요로, 한국 교회는 북한과 북한 지역 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후 한반도 정세가 변화하면서, 분단 극복을 위한 논의 시작됐다. 통일 방안에 대한 남북간 상호 제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고종욱 신부의 북한 방문으로 교회는 1985년 주교회의 산하에 북한선교위원회를 설치했다. 교종 방한 이후, 교황청은 비공식적으로 북한 교류를 시작했고, 1988년 조선천주교인협회가 결성, 장충 성당 설립이 이뤄졌다.

1987년 민주화운동, 서울올림픽, 세계성체대회 서울 개최, 교종 방한 등으로 교회 안팎의 정세가 바뀌면서, 한국 교회에는 대북 교류 과제가 생겼다. 이에 1988년 한국천주교 통일사목연구소 설립했고, 1992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정하면서, 북한 문제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의 관점으로 전환됐다. 1995년에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해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교회의 활동은 서울 민화위와 북한의 직접 교류, 최창무 주교 방북, 북한돕기 나눔운동, 교육과 기도운동으로 변화 했다.

민족화해위원회 활동이 전국화된 것은 1997년 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를 설치하면서다. 북한선교, 통일사목 등의 이름은 '민족화해'로 통일됐고, 각 교구와 수도회에 민족화해위원회를 설치했다. 대북교류협력사업과 함께 북한이탈주민 지원사업 또한 활성화 됐는데, 이는 남한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북한 주민을 지원하는 사회복지 사업과도 연관됐다.

김선필 연구원은 이련 과정을 겪어 온 한국 교회의 민족화해운동의 과제는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교회의 민족화해운동이 자율성을 확보해야 하며, 교회 민족화해운동의 전국화와 지속가능성 확보, 대북 인식차에 따른 교회 내 갈등 해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속적이고 일관적이며, 전국 교회 차원에서 민족화해운동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각 시기에 주어진 조건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면서, 특히 “적에서 형제로 북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지만, 모든 구성원들의 인식은 아니므로, 교회의 인식과 활동에 공감할 수 있도록 전달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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