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총기 난사 사고가 발생하는 미국은 총기를 상품으로 자유롭게 사들일 수 있는 나라다. 다만 사용에 허가가 필요하다는데, 허가 취득이 그리 까다롭지 않은 모양이다. 그 때문에 총기 사고가 많은 건 아니다. 미국처럼 구입이 자유로워도 대부분의 나라는 사고가 빈번하지 않다.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는 불평등을 주목한다. 세계 평화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미국에 만연한 불안과 불평등이 총기사고 빈발의 원인으로 분석한다.

코스타리카는 군대가 없는 국가다. 침략에서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 특수 경찰이 있지만 이웃 국가의 군대와 비교할 규모가 아니다. 그럼에도 침략받지 않는 건 빼앗을 자원이 없어서가 아니다. 국제사회의 신뢰다. 군대 없는 국가를 침탈하는 행위는 비겁하지 않은가. 코스타리카는 동물원을 없애려 한다. 열대우림이 가득한 코스타리카는 동물원은 불필요하다고 믿는다. 제국주의 산물이 아닌가. 어울리지 않는 생태 공간이나 비좁은 공간에 외래 동물을 가둬 구경거리로 삼는 행동은 정의롭지 않다. 평화롭게 살 동물의 권리를 위협한다.

미국의 지극정성으로 보호받는 이스라엘은 울타리 안에서 억압받으며 빈궁하게 사는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중이다. 나치의 말살 책동으로 600만 명이 희생되었어도 살아남은 유대인이 눈물겹게 설립한 국가인 이스라엘은 여전히 평화를 찾지 못하는가? 평화를 위해 가자 지구를 공격한다고 말한다. 공격을 고집하는 자는 나치 히틀러를 닮았다. 예고 없는 하마스의 공격으로 적지 않은 이스라엘 희생이 먼저였다지만, 현재 가자 지구의 희생은 일방적이다.

외국인이 포함된 이스라엘 민간인을 공격한 하마스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마스는 무턱댄 테러 집단인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민족이 갈등에 휘말린 역사의 비극과 고통은 간단하지 않을 텐데, 우리나라를 포함한 국제사회는 미국 중심의 여론에 귀 기울일 따름이다. 한데 이번 전쟁으로 해묵은 갈등은 해소될까?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압도적인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제물로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수 있을 거라 믿을까? 이스라엘 국민은 자국군의 승리를 확신하며 전쟁에 찬성하고 있을까?

저명한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전쟁이 없는 상황을 평화로 생각하지 않았다. 군사력 또는 경제력으로 억누르기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거나 멈춘 상황은 갈퉁이 보기에 평화가 아니다. 갈퉁은 전쟁이 일어날 수 없는 구조적 상황이 지속되어야 비로소 평화라고 인식했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라야 평화라고 주장한다. 전쟁으로 이어지는 갈등은 국가 사이에 한정하는 건 아니다.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까지 감안해야 한다. 요한 갈퉁이 생각하는 평화는 어떻게 가능해질까? 힘의 균형이 아니다. 상대의 처지와 생각을 옹호하면서 배려하거나 양보해야 평화가 비로소 깃들 수 있다.

이스라엘군이 병원을 공격한 데&nbsp;국제 사회의 공분이 일자, 대변인 하가리 씨가 외신 기자들에게 병원이 하마스 소굴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병원 지하를 공개하며 이곳에 여러 하마스의 무기와 인질의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들을 다량 발견했다고 했다. (이미지 출처 = SBS뉴스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br>
이스라엘군이 병원을 공격한 데 국제 사회의 공분이 일자, 대변인 하가리 씨가 외신 기자들에게 병원이 하마스 소굴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병원 지하를 공개하며 이곳에 여러 하마스의 무기와 인질의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들을 다량 발견했다고 했다. (이미지 출처 = SBS뉴스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난민촌과 병원, 그리고 구급차까지 피습된 가자 지구는 날로 처참해진다. 파괴되는 콘크리트 먼지를 뒤집어쓴 아기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뛰는 아버지, 목숨 잃은 아기를 끌어안고 시선을 잃은 엄마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무너지게 한다. 음식과 석유는 물론이고 마실 물조차 없는 상황에 놓은 팔레스타인 주민의 고통은 말로 헤아리기 어려운데, 전쟁이 마무리되면 가라앉을까? 더욱 좁아질 울타리로 밀어넣고 억압된 삶을 강요한다면 양국의 갈등은 사라질 리 없다. 팔레스타인을 몰살시켜도 소용없다. 저항 세력은 극렬하게 다시 나타난다. 나치가 말살하려 했던 유대인이 사라지지 않았듯.

기후변화와 기상이변이 빗발치는 요즘, 인류에게 보장된 안전공간은 점점 협소해진다. 갈등 요인은 전에 없이 늘었고 규모가 커졌으며 자칫 심각해질 것이다. 에너지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는 지역은 외부 지원이 줄어들면서 갈등이 커지며 공포는 전쟁을 불러들일 가능성이 커지고, 기후위기 시대에 일어날 전쟁은 아비규환의 모진 시련을 강요할 텐데, 갈등의 여파는 지역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인류사회와 생태계 곳곳으로 확산하는 건 물론이고, 미래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시급히 대안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2022년 11월 드디어 인구 80억을 넘어선 인류사회의 멀지 않은 비극이건만, 거듭되는 기후위기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은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는 가자 지구의 고통처럼 남의 일로 여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세계 곳곳에서 빗발칠 갈등과 전쟁은 국가를 넘어 계층, 세대, 그리고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휘말릴 것이다. 그 피해는 온전하게 미래세대에 전가된다. 남의 일이 아니다. 눈앞의 갈등을 늦지 않게 예방할 구조적인 평화는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가자 지구의 고통은 미래세대가 겪을 파국적 고통에 비교하면 사소할지 모른다. 미래세대의 생존을 생각하는 평화를 사려 깊게 준비해야 하는데, 여전히 먼 이야기이길 바란다면 우리는 미래세대와 심각한 갈등을 부추기는 셈이다. 생태계 파괴에 이은 멸종 행진은 인류세의 파국으로 이어질 거라 기후학자들은 거듭 경고하는데,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전쟁을 평화의 통과의례처럼 고의로 왜곡한다.

한자로 평화(平和)를 들여다보자. “공평하게 밥을 먹는다”라는 의미다. 생태계가 안정되어야 인류의 생존이 보장되는데, 기후위기는 생태계를 마구 훼손했다. 콘크리트 먼지가 휘날리는 전장의 비극은 기후위기 시대의 일상일지 모른다. 공평하게 밥을 먹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국가와 계층은 물론이고 생태계와 미래세대의 몫까지 정의롭게 보전하는 행동이 아닐까? 반드시 건강하고 행복해야 할 미래세대를 생각하는 평화가 거기에 있다.

박병상
60+ 기후행동,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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