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천주교 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에서 발간한 사목 자료 '성직주의-성찰과 나눔'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자

1. 나는 성직주의란 말의 의미를 깊이 연구하거나 묵상하지 않았다. 이 원고를 작성하며 오랜만에 ‘가톨릭 대사전’과 ‘교회법전 해설’ 등 문헌을 찾아 읽어 보았다. 성직주의를 말하기 전에 ‘성직’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해서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배운 것이 많지만 그중에 하나가 길을 잃으면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조개’ 표시(순례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표시)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 또한 성직주의에 조금씩 잠식되어 가고 있는지, 출발지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인지 자체 점검을 해 보고자 한다.

2. 1989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오늘까지 사람들은 ‘허영민’이란 내 이름보다는 ‘사제 혹은 신부’라는 신분과 직무에 따른 호칭을 부른다. 지금은 그 호칭에 익숙해 있고 내 이름 석자를 불러 주는 사람은 두 분 형님과 선배 신부님이나 동창 신부 정도다. 그렇게 34년을 ‘신부님’이란 이름으로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간혹 은행이나 기관에 가서 ‘허영민’이란 이름이 불리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 세상의 이름, 부모님이 남겨 주신 이름 ‘허영민’이 낯설고 어색할까? “나 역시 성직자란 신분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기에 나름대로 성직주의에서 벗어나려 애쓰면서 살아왔다고 얘기하지만, 어느 한 구석 성무가 아닌 성직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나도 모르게 숨어 있어 그런 것이 아닐까?” 질문해 본다.

사제로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삶의 방향을 알려주신 두 분 형님과 어머니(아버지는 1981년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두 분 교우와 나의 보좌신부 시절 주임신부님들의 잠언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3. 내가 서품받을 때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나름 존경받는 두 분 형님이 하신 말씀을 똑똑히 기억하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영민아, 교회 밖의 사람들은 보통 아래서부터 한 계단씩 오르는 삶을 살지만, 신부는 사제 서품부터 아주 높은 곳에서 생활을 시작하니까, 이게 신앙적으로 더 높이 올라가기보다는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쉬울 수 있어. 그리고 미사와 고해성사는 정성껏 잘 준비해야 한다. 미사는 가장 많은 신자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고 고해성사는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니까 그 기회를 사목에 잘 활용하고 매사 겸손하게 살아라.”

이젠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도 늘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신자들에게 친절하시고 나이 든 사람들은 발음이 정확하지 않으면 못 알아들으니 천천히 또박또박 말씀하세요. 어른들한테는 반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대부분 많은 신자가 일주일에 한 번 주일미사에 참례하여 강론을 듣고 그 말씀으로 한 주간을 살아가니 강론 준비도 열심히 하셔서 믿음과 신뢰를 주세요.”

막둥이 아들이지만 서품받은 후 저에게 단 한 번도 반말하지 않으신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에 새겨져 있다.

나중에 어머니 장례식 때 본당(성당) 구역장님께 전해 들은 말씀이 있다. 본당 교우들은 어머니의 아들 삼 형제가 모두 사제라는 사실을 아주 한참 후에 아셨다고 했다. 왜냐하면 반모임을 어머니 집에서 하게 되면 아들 사진이나 흔적을 깨끗이 치워 놓았기 때문인데, 어느 날 미처 치우지 못한 둘째 형님 사제서품식 때 찍은 사진을 보고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어머니께서는 아들들이 사제라는 이유로 본당 신자들로부터 과한 시선과 대우를 받게 될까 우려하셨던 것이다. 늘 힘든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어머니가 계셨기에 사제인 아들 삼 형제가 어머니 가르침을 지금도 잊지 않고 따르려 노력하고 있다.

4. 사제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정말 많은 도움과 기도를 받았다. 그것이 없었다면 지난 30여 년의 시간을 제대로 살아오지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 인생의 지혜로 저에게 교훈을 전해 준 두 교우를 기억해 본다. 성서 못자리 전담 신부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노신사 한 분과 식사를 일대일로 하게 되었다. 사실 그런 자리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너무 정중히 청하셔서 거절할 수 없었다. 점심 식사를 맛있게 하고 나서 이런저런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신부님, 아마도 많은 이들이 신부님을 좋아할 겁니다. 그래도 한 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사목을 하면서 불편함을 느끼실 때 오히려 많은 신자는 편해질 수 있고, 반대로 신부님이 편하다고 생각하실 때 많은 사람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신부님은 지혜로우시니까 잠깐의 불편을 잘 참고 견디시리라 믿습니다.”

그 노신사의 말씀처럼 나는 지금도 한 번의 불편함, 한 번의 체면 구김에는 아주 익숙하게 대처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런 일이 생기면 내 마음은 신기하게도 더 편안해진다. 또 한 청년 교우는 ‘신부님 삶이라는 것이 원래 심심한 거 아니에요?’라는 말을 했다. 인간적인 재미 차원에서 재미를 찾지 말라는 말이었다. 사제생활이 똑같은 일이 거의 매일, 매월, 매년 반복되기에 특별하고 유난스러운 것도 아니요, 자기를 위한 시간보다 다른 이에게 열려 있는 시간 속에서 보람과 의미는 있지만 세속적 재미는 포기하라는 말이었다.

그렇다. 성경이 전하는 ‘기뻐하십시오’의 기쁨을 발견하고 찾아야 하지만 신부 생활은 원래 재미가 없는 게 옳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다.

5. 나는 세 번의 보좌신부를 지내면서 운이 좋아 훌륭한 주임신부님 네 분을 모시고 사목 생활을 했다. 나의 보좌 시절만 해도 ‘보좌가 본당의 보좌냐 주임신부의 보좌냐’라는 논란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정말 어린애 같은 논쟁거리가 아니었나 싶다. 본당 교우는 안중에 없이 신부끼리 자기 영역 다툼이나 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주 시원하게 해 주신 주임신부님이 계셨다.

“허 신부, 본당에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려 할 때 주임신부가 반대를 하면 어떻게 할래?”

“전 한두 번 말씀드려서 허락하지 않으면 안 할 겁니다.”

“허 신부, 자신의 욕심이나 업적 쌓기가 아니라 본당 교우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주임신부랑 싸워서라도 진행해야 해. 포기하지 말고 욕을 먹고 오해를 받더라도 설득하는 걸 포기하지 마.”

다른 본당으로 이동하는 인사철이 되면 예민해지는 사제들도 있다. 주임신부님과 인사 이동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중에 “허 신부, 본당 규모가 크고 작은 성당은 있어도, 좋은 성당 나쁜 성당은 없어. 능력도 안 되면서 큰 본당에 가면 뭐하나, 본인도 감당하기 힘들고 그러다 보면 신자들도 힘들어지는 거지. 남들이 가기 꺼리는 본당에 발령받는다 하더라도 신부가 마음을 다하여 사목한다면 그 본당은 머지않아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당으로 변화될 걸세. 그리고 자네는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어. ”

난 이것이 정답이라 생각한다. 누구를 탓할 것 없이 본인이 직무를 맡은 그곳에서 열심히 사목하고 화합하는 공동체로 만들어가면 될 것이다. 물론 땀과 수고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더불어 주님의 도우심까지. 그저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교구 직권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몸담은 그 현장, 본당 교우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는 것이 복음 선포를 하는 성직의 올바른 길임을 지금도 의심치 않는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6. 그러면서도 교황이 말씀하신 성직주의가 사제생활 34년 동안 나한테도 은연중에 몸에 배어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직주의’는 사제직의 타락한 모습이라 표현했다. 권위는 이러한 성직주의와 단단히 묶여 있으며 평신도들로 하여금 사제 직무를 받은 이들은 신자보다 위에 있다고 믿고 있는 데서 온다. 또한 교황은 평신도는 교회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며 성직자와 연합하려 활동하는 주인공이라고 강조했다.

성직자로서 느낀 성직주의의 사례

∙ 성직자는 평신도로부터 칭송과 떠받듦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 나이에 관계없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평신도에게 반말하고 나무라듯 훈계한다.

∙ 본당 사제의 영명 축일, 은경축 등 사제의 축일은 본당에서 부활, 성탄과 함께 크고 성대하게 거행되며 이때 평신도의 영적, 물적 선물 등을 당연시한다.

∙ 본당 사제와 친한 평신도가 본당의 주요 직무를 맡는다.    

∙ 가톨릭에서는 평신도는 사제를, 사제는 주교를 떠받드는 위계가 분명하다.

평신도들에서 발견되는 성직주의 사례

∙ 성당 내에서의 직분과 직위를 통해 주목받고 인정받고자 하며 그 욕구로 인해 평신도들끼리 갈등과 불화가 생긴다.

7. 이제 성직자 신분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과 문헌들이 말하는 성직의 의미를 통해 성직주의에 대한 성찰을 나누려 한다.

∙ "가톨릭 대사전"에 나와 있는 성직의 의미를 소개하고 싶다. 이 사전에서는 간결하지만 확실하게 성직의 의미를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계시되고 교회에 의하여 규명된 규범에 따라 이웃을 섬김으로써 하느님께 봉사하는 수권적(授權的) 직무. 가톨릭 교회에서 다양한 형태를 띠는 성직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내포한 개념이다. ① 하느님께 봉사하는 직무이다. 하느님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므로 하느님의 봉사는 이웃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② 교황이나 지역 재치권자 등 교회의 교계로부터 권한의 위임을 받은 자가 수행하는 직무이어야 한다. 권한의 위임을 받은 자란 사제 직무에 있어서와 같이 서품을 받거나, 수도생활에서와 같이 축성되었거나 시종직에서와 같이 전례적 축복을 받은 자를 뜻한다. ③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직무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행실로 사람들에게 정신적·물질적으로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신 분이었다. ④ 헌장, 교령 등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체화시킨 교회 교도권의 지도하에서 수행된 직무여야 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성직은 하느님께 봉사하는 직무이며 교계제도 안에서 교도권의 지도하에서 수행된 직무다.’

∙ 교회의 사명과 직무와 교계적 질서(Hierarchical order)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직무와 위계적 서열은 사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사제의 직무(Priestly ministry)는 교회의 직무(Ecclesial ministry) 안에 있는 것이며 하느님 백성을 섬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이를 강조한다. “직무 사제직은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봉사하시고자 쓰시는 하나의 수단”이며, 직무 사제직의 “핵심 축은 지배를 의미하는 권력이 아니라 성체성사 집전권한이다.”('복음의 기쁨', 104)

성직은 교계제도 안에 존재하며, 교계제도는 피라미드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성직주의 문제 역시 가장 빠르고 최고로 좋은 효과를 내는 방법은 최고위층에서 모범을 보이고 변화하고 쇄신하면 될 것 같은데 이것도 아닌 듯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65살 미만 사제에게는 더 이상 '몬시뇰' 칭호를 주지 말라고 조용히 지시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상당수의 이른바 “전통주의자” 신자들, 특히 성직자들은 교황에게 분노했다. 그것은 교회 안의 출세주의와 성직주의 문화를 제지하려는 작지만 첫 조치였다. 하지만 기껏해야 절반의 조치였을 뿐이다. 당시 교황은 “몬시뇰”(Monsignor. “나의 주인”, “나의 주님”이라는 뜻)이라는 이 경칭 자체를 아예 없애고 싶어 했지만 교황청 일부와 교계제도 안 여럿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몬시뇰 칭호는 공덕이 큰 원로 사제에게 주는 경칭으로, 주교에 준하는 예우를 해 준다. 관례에 따라 또는 교황의 허가를 받아 이 칭호를 받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관례에 따라 자동적으로 몬시뇰이라 불리는) 교황청에 근무하는 평사제와 교황청 외교관 평사제에게는 이 새 제도를 적용하지 않기로 동의했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8년 10월 5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직주의에 대한 개혁 노력이 반쪽의 성과를 냈다면 피라미드의 정상이 바뀐다고 변하는 것도 아니다. 세월 속에서 탄탄히 뿌리내린 교회 내 엘리트 집단이 카스트 계급처럼 존재하고 있다.

성직주의는 봉사와 섬김, 복음 선포와 거리가 먼 사제와 주교들이 자신의 지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받은 제자로서의 지위보다 더 높다고 믿는 잘못된 확신과 태도에서 특권의식과 ‘자격 의식(sense of entitlement)’이 이들의 개별, 집단정신 안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직주의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면서, ‘성직주의에 대한 전환에서 이 구조적, 조직적 개혁들은 2차 문제다. 즉 1차적으로 성직자의 태도, 사고방식의 개혁’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 주장은 큰 벽에 가로막힌 프란치스코 교황의 차선책이라 생각된다. 물론 이해한다. 지금 개혁이 불가능하다면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 성직주의는 오랜 세월 동안 분명히 그랬듯이, 평신도의 순응과 공조 없이 번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직주의를 뿌리 뽑기 위해 “세례받은 모든 이는 각기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교회적, 사회적 변화에 관여돼 있음을 느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주교와 사제가 복음 선포라는 사명을 망각하고 사제의 지위에 초점을 맞추고 위계적 서열에 집착하고 그 서열을 통해 주어지는 권한이 바르게 작동하지 못하면서 성직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또한 성직주의가 교계제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구조적, 조직적 개혁 없이 개인의 태도와 사고방식의 개혁에만 집중해서는 피라미드 하층부에 있는 선한 그리스도인만 노력하고, 상층부 카스트 계급에 속한 성직자와 평신도는 선한 이들이 맺은 열매만 따 먹을 수 있는 형국이 될 수 있다.

교계 제도는 세상에서 효과적으로 복음 선포를 하기 위해서 교회가 채택한 제도이고, “직무 사제직은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봉사하시고자 쓰시는 하나의 수단”이며, 직무 사제직의 “핵심 축은 지배를 의미하는 권력이 아니라 성체성사 집전 권한이다.”('복음의 기쁨', 104)

8. ‘성직주의에 점점 매력을 갖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 안에서 발견되는 성직주의로 기우는 상황을 반성해 보면, 영적 게으름과 배움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 원인일 경우가 많다. 사제가 존재하는 첫 번째 이유는 성체성사,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도 ‘교회는 칠성사의 보물을 가지고 있지만, 세례와 견진성사, 고해와 병자성사, 신품과 혼인성사 모두가 성체성사를 위해서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사제가 미사 집전을 귀찮아하거나 신심 행사나 기타 요란한 행사보다 뒷전에 놓는 경우가 있다. 신부가 본당에 있는데도 손님 신부를 청하는 본당도 있다.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다.

사제들이 미사 집전보다 더 잘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예비자교리라는 말을 듣는다. 자격 있는 평신도들이 예비자교리 봉사를 시작하면서 사제들이 예비자교리 강의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비자교리는 복음 선포의 첫걸음’이란 선배 신부님 말씀처럼, 내가 길거리 선교는 못하더라도 찾아오는 예비신자 교리와 관리를 그저 평신도나 수도자에게만 맡기고 세례성사 당일 성유 바르고 이마에 물을 붓는 것으로 성무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고 말해도 되는가? 사제가 신앙교육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 계발과 취미 생활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미사와 성무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 자기 계발과 취미 생활 역시 반복되면서 지치기 쉬운 성무 활동의 휴식처럼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배움의 노력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물론 많은 독서와 교육 이수 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살면서 배워야 할 일이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마음과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성직주의에서 벗어나 감사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되고, 하루하루 재미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인생에서 감사를 발견하고 그 감사와 기쁨을 그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는 성직을 잘 살아낼 것이다.

신부니까 제일 먼저 신부가 해야 할 일을 더 깊이 있게, 더 무게 있게, 어제의 나보다는 오늘 1센티미터라도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기도와 사랑,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고 배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신부가 주인공 역할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인정받기보다 인정해 주고 환호해 주는 그런 삶이 필요하다. 늘 본당 공동체의 중심으로 살다 보니, 모든 시선과 관심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원하는 태도가 몸에 배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을 조금만 쳐다보지 않아도, 약간 무시당했다고 느껴지면 불호령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제들 간 갈등 역시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상황에서 빚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을 ‘인정투쟁’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사제는 중심이 되기보다 변방에서 연결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사제는 하늘과 땅을 잇는 브로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9. 나는 현재 본당에서 혼자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동안은 성당에 관리장님, 사무장, 사무원, 식복사와 부주임신부, 협력신부가 함께 있어서 일을 나누어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사무행정과 회계의 일부를 제외하고 혼자 다 하다 보니 그동안 직원과 동료 후배 사제에 대한 감사함이 많이 부족했음을 알게 된다.

요즘 살림을 하다 보니 미사에 오는 신자들이 가끔씩 미사에 늦는 이유를 몸으로 알게 되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떠난 지 오래되어 일상을 잊고 살아온 나를 발견하였다. 식탁의 음식은 그냥 차려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생각과 몸의 움직임이 식탁에 음식을 만들어 놓은 것임을 이제라도 알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미사에 늦었다고 야단치는 일은 이제 하지 않고, 예전처럼 문을 잠그는 무식한 짓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혼자 감악산 임꺽정봉을 바라보며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일상이 직업이고, 미사와 성무 활동이 알바인가?’ 하지만 일상이 가미된 성직과 성무 활동은 신자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작은 기적을 만들고 있다.

10. 성직주의에 대한 나쁜 평가가 많다.

“성직주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무효화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신 세례의 은총을 축소시키고 평가절하하는 시도이다.”

“사제 스스로 또는 평신도들이 양산하는 성직주의는 교회의 몸 안에 분열을 초래하고, 오늘날 우리가 규탄하는 수많은 악을 지속시키고 부추기고 조장한다.”

“성직자(중심)주의는 사제 본인이 부추기든 평신도가 부추기든 간에, 우리가 지금 단죄하고 있는 악들의 상당수를 영속화하도록 지탱하고 돕는 교계 조직 안의 특수집단 형성으로 이어진다.”

“성직자주의는 우리 가톨릭 DNA 중의 악성 돌연변이 유전자다.”

“가톨릭 세계를 망치는 암”

“성직주의는 귀머거리 성직자를 탄생시킬 뿐이다.”

성직주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과 세상을 향한 봉사의 성직으로 변화되어 나쁜 평가의 단어 하나하나가 긍정적이고 기쁨의 단어로 고쳐지기를 성령께 의탁하며 영적 게으름에서 깨어나 한 걸음 더 복음의 기쁨에 다가가길 희망해 본다.

11. 성직주의에 대해 묵상하면서 나 역시 성직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하게 된다. 사제로 서품되고 나이가 들고 연륜이 쌓일수록 배울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고 살아온 비겁함과 게으름이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배움의 자세가 멈추면 영적 성장도 멈춘다. 배움과 성장이 멈춘 성직은 겸손과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감사할 것까지도 당연히 여기는 염치없는 삶으로 변질되며 그것이 성직주의에 안주하게 만든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배움과 성장이 멈춘 성직주의는 예수님의 섬김의 권위보다 권력의 피라미드 상층부 권력의 힘을 더 믿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 위에 번성하며 권력에 의해 지탱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섬김 위에서 군림하는 권력은 평신도와 평사제와는 협의할 필요가 없고, 또 사제들은 평신도와 협의할 필요도 없게 만들고 있다.

사제를 무조건 지지하는 성직주의에 익숙해져 사제의 권력을 이용하는 평신도와는 사후 책임 전가를 위해 협의하는 형식을 취할 순 있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교회 안의 쇄신을 위한 협력과 설득을 위한 대화와 토론은 점점 그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성직주의를 벗어나 복음의 기쁨을 선물로 살아가기 위해 영적 게으름과 교만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배움을 다시 한번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성장이 멈춘 귀머거리 성직자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덕망이 있는 사람 중에 뽑힌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함께 살고, 땀 흘리던 우리의 이웃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해서 남들에게 뽐내거나 자신이 드러나는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인간적 능력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림을 받았듯이, 성직을 수행하는 이들도 다른 이들 역시 하느님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매개자(mediator)다. 사제는 사람들 속에 하느님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사람과 사람이 협력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매개자로서의 사명을 살아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그 몫은 흠 많고 티 많은 사제의 몫이다. 무엇보다 먼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을” 갖는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 닮아 보기를 노력해야겠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잔치 음식을 준비하는 주방의 어려움을 눈여겨보셨던 성모님의 시선과 마음을 닮아 보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그리고 사는 날까지 예수님이 바라시던 소망과 예수님의 믿음에 나의 작은 소망과 작은 신앙을 더하여 소망하고 믿는 바를 이루는 성직이 되도록 힘쓰는 사제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사제는 하느님의 얼굴’(스퀼레벡스)이라 한다. 성직이 아닌 성직주의로 하느님의 백성이 보기 싫어 그들을 한숨 쉬게 만드는 사제의 얼굴이 아니라, 보고 싶고 다가와 말을 건네고 싶은 하느님의 얼굴을 가진 사제로 매일매일을 새롭게 맞이하고 싶다.

12. “교회적 권위 구조 개혁”을 말할 때 핵심이라 여겨지는 “교회로서 우리 활동의 전환(conversion)”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전환은 “태도, 또는 사고방식의 개혁”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 주장에 해답은 아니겠지만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신암리 성당으로 순례를 오셨던 교우가 “신부님, 혹시 드라마 ‘나쁜 엄마’ 보셨어요? 시간 날 때 보시면 강론이나 사목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시간을 내어 그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교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 드라마를 보며 ‘돼지’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당 주변에 대형 돼지 축사가 있다. 평소는 괜찮지만, 돼지 분뇨를 처리하는 날은 냄새가 고약하다. 거기에 대해 불평을 가지고 있던 나 자신이었기에 묵상 재료가 될 수 있었다. 돼지 악취는 돼지 잘못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란 사실과 돼지는 모성애가 아주 강하고 배설도 한 곳에서만 하는 깨끗한 동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드라마 대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돼지는 평생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넘어져서 보는 하늘은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 이야기는 내가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 새로운 것을 선택하는 두려움, 시련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묵상하게 도와주었다.

성직주의가 목살이 두꺼워 하늘을 보지 못하고 평생 땅만 보고 살 수밖에 없는 돼지라면, 해로운 해충과 벌레를 떼어내기 위해 진흙탕 목욕을 할 때 자신의 몸을 넘어뜨리고 뒤집어서 하늘을 보는 돼지가 된다면 참다운 성직의 길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아직도 넘어지고 몸을 뒤집어 새로운 세상 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해 본다.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기를 원하신 주 예수님, 저희 사제로 하여금 당신과 형제들을 겸손되이 섬기게 하소서”의 기도가 허공에 퍼지는 소음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허영민 신부

신암리 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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