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항암과 수술, 또 다른 항암, 방사선, 모든 항암 과정이 지난해 5월 말에 끝나고 검사 일정이 이어지고 있다. 석달 전에는 뼈 전이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검사를 했는데, 5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검사였다. 현재까지 다행히 수치상으로는 이상이 없다는 결과다.

그럼에도 불안감은 늘 마음을 지배한다. 항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약을 먹거나 주사했고, 특히 항암제는 온전한 세포도 함께 파괴하니 온몸의 기능은 떨어졌을 것이고, 나이가 있으니 회복도 빠르지 않았다. 간과 췌장 등에 이상이 생길까 너무 겁이 났다.

나는 왜 이상이 없다는 검사 결과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앞으로의 시간에 있을 혹시 모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결과 수치상 이상이 있을 때에는 일이 이미 벌어진 다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엄마의 회복 기간은 무엇을 얼마나 먹느냐의 싸움이었다. 항암만 끝나면 입맛이 제 상태를 찾으리라던 믿음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했다. 묘하게 쓴맛을 더 느끼는 입맛도 문제지만, 음식 냄새만 맡으면 메스꺼워지는 상태가 더 문제다.

정말 입덧처럼, 생각지도 못한 음식을 찾을 때가 있고, 또 좋아하던 음식이 냄새도 맡기 싫을 때가 있다. 매일 스무고개 하듯이 계속 음식 이름을 대기도 하고, 엄마를 조르기도 또는 협박하기도 한다.

그나마 뭐라도 먹으면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따질 겨를이 없다. 지난 겨울 내내 그나마 엄마는 단 하나 음식, 간장게장 담궈 먹는 재미로 살았는데, 날것을 먹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ㄴ자로 유방부터 겨드랑이 까지 긁어낸 수술 부위 통증도 문제였다. 유착이 빨리 되는 부위부터 통증이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가슴 쪽이 아프다가 겨드랑이 쪽 통증을 앓는다. 통증은 때에 따라 낫는 징후일 수 있지만 시기가 맞지 않으면 걱정의 원인이다. 처음에는 아무는 과정이라 그럴 수 있다고 했었지만, 계속 겨드랑이 쪽이 아픈 것은 왜일까.

거의 2년이 지나 여전히 겨드랑이와 그 뒤쪽이 아프다며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그제서야 말했다. “팔을 움직여야 하는데, 다 긁어 낸 상태이기 때문에 주변 근육을 끌어다 써야 해요. 그러니 무리가 되어 이른바 근육통이 생겨요.”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 주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그렇게 아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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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돌아보면 모든 것이 축복이었다.

내 나이에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아픈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픈 부모를 돌볼 기회가 있다는 것, 돌볼 형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런 나와 엄마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총이었다.

엄마가 암 판정을 받으면서 염치 불구하고 페이스북에 엄마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글을 올렸었다. 기도의 힘이 절실했다. 많은 이가 기운을 모아 주면, 그들의 바람이라면 들어주시겠지.... 때마침 누군가 잠자는 요셉상을 선물로 주셨다. 나는 그 요셉상 아래에 내 바람을 주절주절 적어 놓았다.

아픈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해 달라고 사람들에게 알린 순간부터 만나거나 전화 연락을 하는 이들은 늘 내 안부보다는 엄마 어떠시냐고 묻기 바빴다. “넌 잘 있으니 됐고, 엄마 어떠셔?” 자신이 알고 있는 치료법, 의사를 소개해 주고, 치료 시간이 늦어질까 대형 병원에서 빨리 치료받는 법,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를 알려 주려고 마음을 써 줬다.

또 엄마를 핑계로 식재료를 보내 주는 이들, 힘내라고 밥 사 주는 이들, 응원해 주는 이들 덕분에 힘이 없을 수 없는 날들이었다. 남은 생을 다 갚는 데 써도 모자랄 은혜다.

©정현진
©정현진

엄마를 내 집으로 들이기 위한 준비를 할 때부터 사실 걱정이 있었다. 엄마와 나 사이의 오랜 역사, 나는 인식하지만 엄마는 아직 다 모르는 것들.

3남매 가운데 첫째인 나는 엄마로서 가진 정성과 바람, 서투름 그 모든 것이 처음인 존재였고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막중한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그 실망감이 아주 오래 나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30대 중반에야 알았다.

심리상담을 통해 엄마와 나의 무의식적으로 얽힌 관계의 문제를 알게 됐다. 나는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얻었지만, 막상 엄마는 인식하지 못하는 일이라 가끔 만나는 물리적 거리가 다행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엄마와 동거라니. 게다가 엄마와 나는 기질이 너무 달랐다. 겁이 났다. 물리적 거리가 유지해 주는 안전이 깨질까 봐 두려웠고, 병중의 엄마에게 견디지 못한 내가 해악을 끼칠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이 엄마의 치료를 위한 환경을 만드는 데 우선이 될 수는 없었다.

걱정과 달리, 엄마와 살면서 폭풍처럼 몰려드는 일정과 과제들은 고민할 틈을 주지 않았다. 모든 것은 엄마를 살리는 일에 집중됐다. 자연스럽게 나의 생활 패턴, 습관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됐다. 일단 미루고 보는 성격이었지만 놀랍게 즉각적이 됐으며, 특히 가족에게 단답형으로 일관했던 내가 엄마 앞에서 일부러 구구절절 말할 거리를 찾는 수다쟁이가 됐고, 마치 아기를 돌보는 엄마와 같은 화법을 썼다.

하지만 결국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이런 긴장과 노력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늘 위태하고 불안했다. 나의 긴장 상태가 어떠한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년여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내가 이럴 수 있다니....”라는 생각을 가진 채 살고 있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렇게 힘이 센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엄마와 나의 공생 관계는 엄마의 인내 때문에 가능한 거였다. 엄마는 마음 편하게 앓기만 하지 않았다. 매 순간 내가 얼마나 애쓰는지 엄마의 눈으로 보고 있었고, 내가 병원비나 먹거리 등을 위해 지출을 할 때면 매번 미안해 했다. 그러니, 무언가 불편하다고 해도 제대로 짜증을 내거나 불평이나 했겠는가. 엄마는 자식에게 폐 끼치는 것이 미안했고, 나는 제대로 보호자 노릇을 못하는 것이 미안했다. 우리는 서로 미안해 하며, 또 안타깝고,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나는 언제 어떤 처방과 치료를 받았는지, 당 수치는 어떠했는지, 매일 무엇을 먹었는지 꼼꼼하게 기록하는 그런 보호자는 아니었다.

그런 한계와 두려움, 걱정도 많은 나를 오늘까지 있게 한 것은 사실 나를 격려하고 함께 걱정해 준 이들의 덕이다. 그 기운이 얼마나 센지 확실히 알았다.

또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 엄마와 함께 투병하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이 절대적인 고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 엄마가 삼중음성 유방암이고 호르몬성 유방암보다 예후가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왜 하필 삼중음성인지 원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말 가깝게 지내던 언니가 자신도 호르몬성 유방암이라는 연락을 해 왔다. 그의 투병을 지켜보면서 호르몬성 유방암이라는 것 역시 다른 차원에서 결코 쉽지 않다는 것, 병이라는 것은 비교급이 아니며 앓는 그 사람에게 온전히 중한 상황이라는 것, 그 병은 그대로, 이 병은 또 이대로 그 환자에게는 모두 100퍼센트라는 것을 알았다. 다행이란 것은 없다. 다만, 그의 의지와 함께 앓아 주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주변에 암 또는 준항암에 이르는 질병을 앓은 이들이 있어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러면서 ‘위로’라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지, 병을 앓는 이들 앞에서 우리는 어떤 예의를 지켜야 하는지도 새삼 생각했다.

항암 과정이 무사히 다 끝났다면, 환자 자신은 우선 이전의 암은 다 제거됐다고 생각하고 완치되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돌봄은 끝나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 두 태도가 바뀌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노화와 질병을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니,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함께 하는 법, 위로하는 법을 배우면 좋겠다. 아픈 엄마를 돌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엄마도 나의 보호자다. 누구도 절대적으로 보호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며 보호하기만 하는 사람도 아니다.

누구나 아플 것이고, 누구나 나이 들 것이다. 곁에서 간병할 자식이 있다는 요행이 아니라, 누구나 외롭게 앓고 슬프게 생을 마감하지 않도록, 모든 이가 보호자, 간병인, 그리고 동행하는 이들이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그저 살리기 위한 마음을 내게 내어 주신 모든 이, 견뎌내어 준 엄마에게 사무치도록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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