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결단

지난번 칼럼에서 재위 10주년을 맞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한 달 만에 그런 마음이 곱절로 드는 상황에 다시 접하다니 싫지 않은 경험이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쏟아온 노력을 보상받는 느낌이라고 과장하고 싶기도 하다. 교황이 2023년 세계 주교 시노드에 평신도 70명을 ‘참관자’가 아니라 의결권을 갖는 공식 참가자로 포함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전조가 있었다. 2022년 3월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 반포가 그것이다. 물론 이 교황령으로 교황청의 구조 개혁, 곧 기존 9개 성과 3개 부서, 5개 평의회를 16개 부로 전면 통폐합한 것도 주요한 변화다. 그러나 교회 언론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지만 두드러져 보이는, 그래서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그 전조는 ‘교황청 부서를 대표하는 장관직 등을 추기경이 아닌 평신도, 수도자가 맡을 수 있다’라는 것을 공식화했다는 사실이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이런 과감한 개혁안을 구체적으로 이행해 낸 것은 교황의 결단으로 보인다. 결은 다를 수 있지만, 성직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를 과거의 유물로 돌리면서 명실공히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실현할 큰 걸음을 내디뎠다고 봐도 무리는 없겠다.

전에도 평신도가 세계 주교 시노드에 참가한 적이 있지만 소수의 ‘깍두기’ 신세였고, 더욱이 투표권도 없는 참관자 자격이었다. 대륙별 주교 시노드도 사정이 비슷해 평신도는 늘 성직자의 ‘선의’에 의지해 선택된 소수 평신도만이 ‘영광에 감읍’할 수 있었다. 이번 결정은 그런 상황과는 현저히 다르다. 이 결정에는 참관인 자격 자체를 없애고 70여 명 중 절반을 여성에게 할당하라는 요청이 포함됐다. 교황은 시노드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투표권을 암시하면서 “남성이건 여성이건 상관없이, 누구나, 누구나 말입니다. 누구나라는 단어가 내게는 핵심입니다”1)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게 어디 교황에게만 핵심이랴.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라는 평등의 정신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본령인데 그것을 구조적으로 막아 온 것이 지금까지의 성직자 중심의 교회이고 보면 개혁은 당연지사였다. 다만 여기까지 오는 데 20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 뿐. 그럼에도 이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불편해 온다면 성직자든 평신도든 ‘성직중심주의’에 오염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누구나의 교회’를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이고 복음 정신이라면 그것은 성직주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평신도 대표성 문제

이번 결정으로 교황이 말하는 교회 개혁, 곧 ‘공동협력적 교회’(synodal church) 방향과 그 출발이 어떠해야 하는가가 더 분명해졌다. 이제 지역 교회 상황에 맞게 이를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실천해 가는 일이 목전의 현실로 다가왔다. 이와 관련해서 두 과제가 대두된다. 하나는 ‘평신도 대표성’(representation of laity) 문제다. 이는 물론 바티칸과 지역 교회 모두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주교 시노드 참가자 중 1/4을 평신도로 채운다고 할 때 ‘과연 평신도 대표는 누구이고 어떤 과정을 통해 선출되어야 하는가’라는 기술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이 평신도 대표성 문제와 관련해서 교황청 시노드 사무국은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와 같은 대륙별 주교회의 기구 7개에 각각 배수로, 곧 20명을 추천하되 “적절한 사목적 경험과 과거에 시노드 절차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후보자”2)를 추천해 달라고 주문했다. 대륙별 주교 시노드로 내려오면 FABC 같은 대륙별 주교기구가 그런 요청을 국가별 주교회의에 하겠고, 후자는 바티칸 시노드 사무국에서 제시한 그런 기준의 평신도를 찾아서 추천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교회를 아는’ 신도라면 이것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다.

전임 교황들에 비해 그동안 프란치스코 교황이 만나온 평신도 신심 및 운동 단체는 다양하다. 그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바티칸에서 교황과 만남이 가능한 단체들은 바티칸 부서에 속하거나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름만 대면 한국 교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나는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막강한 조직들이다. 그러니까 교황은 이러한 세력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단체들 중 대부분은 수십 년 넘게 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고 이들의 지도자는 바티칸의 ‘핵인싸’(insider)이며, 더욱이 “그들 중 일부는 대부분의 주교와 추기경보다 영향력 면에서 더 강력하다.”3) 이탈리아 출신으로 현재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신도 신학자 마시모 파졸리는 낡은 성직주의가 이렇듯 ‘교회 정치’(church politics)에 능란한 전문가인 ‘새로운 성직주의’에 자리를 내어 줄 수 있음을 우려한다.4) 문제는 성직중심주의이고 교회의 미래가 평신도에게 달려 있음이 맞다면, 평신도 대표성 문제를 쉽게 볼 게 아니라 더욱 고심하고 모색하여 더 나은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은 제도로 평신도 대표를 뽑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투표권의 다수는 주교들에게 있다. 이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독일 교회의 ‘시노드의 길’(Synodal Path)처럼 평신도가 소수가 아닌 구조는 다른 나라나 대륙에서 실험할 수는 없는 것인가?

5월 1-2일 전주 평화의 전당에서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이 신간 "그리스도교의 오후"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 평화의 전당)<br>
5월 1-2일 전주 평화의 전당에서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이 신간 "그리스도교의 오후"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 평화의 전당)

토마시 할리크와 교회 개혁

또 하나의 과제는 지역적 실행 여부다. 시노드를 2023-24년으로 연장하고 명실공히 ‘하느님 백성 전체’의 공동협력에 기초한 것이 되게 하려고 교황이 이번 결단으로 모범을 보였다면, 그에 버금가는 지역 교회의 응답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교황이 이런 결단을 내렸으니 이제 공은 대륙별, 국가별 지역 교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됐다. 그러나 ‘복음의 기쁨’(2013)에서 ‘모든 형제들’(2020)까지 10여 년에 걸친 프란치스코 교황의 수많은 개혁 의제에 기꺼이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한국 교회가 이번 결정을 적극 반기면서 이를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행할 것인지는 지극히 불투명해 보인다. 지역 교회의 경우, 이번 결정의 의의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구색 맞출 ‘예스 맨’으로 대의원 1/4을 평신도로 구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어렵고도 중요한 일은 그런 논의구조에서 결정된 바를 실행해 내는 것으로 보인다. 1984년 ‘한국 교회의 공의회’로 불렸던 ‘선교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을 40년 동안 결국 사문서로 전락시키고 단 하나도 실행에 옮기지 않은 전사처럼, 평신도가 포함된 의결구조에서 어떤 희망적인 것이 결의되었다고 한들 이를 이행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볼 눈과 의지가 있다면, 그 빼어난 의안들을 이번 시노드에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교회가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한국판 시노드의 길‘을 구현할 적절한 출발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번에 방한한 체코의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의 말마따나 ‘정오의 위기’를 지나 ‘오후’를 맞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황혼’을 건너뛴 채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할 방안은 현재로선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시한 ‘시노드의 길’을 따르는 길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할리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의 중앙집권주의 완화, ‘공동합의성’(synodality) 원칙의 강화, 지역 교회에 더 큰 자율성과 책임감 부여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다”라면서, 주교들이 과연 이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는다. “장상들, 특히 주교들이 자기 역할을 왕정 시대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교회 안에서 대화의 중재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남성과 여성 신자 개개인이 각자의 은사를 발휘할 여지를 만들어 주고 이를 지켜 줄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가? 여성이 신앙 공동체에서 동등하게 공동 책임을 질 자격과 능력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5)를 묻고 있다. 나 역시 지난 30년 동안 쉬지 않고 묻고 또 물어온 물음이고, 이제 이 체코의 노사제에게서도 같은 물음을 듣는다. 그러나 과연 이에 ‘그렇다’고 응답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에 얼마나 될 것인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의 교회 기관의 평신도들을 접하면서 든 생각은 한국 교회가 선전용으로 그렇게 자랑해 마지않는 평신도의 자발성, 역동성의 고갈과 피폐화된 실상이다. 교구청이든 본당이든 평신도에게 ‘투신’이나 ‘자발성’은 낯선 말이 된 듯하다. 성직자들의 동등한 파트너십 거부와 결핍의 부산물이기도 하겠고, 더욱이 이들 사이에 고압적인 성직주의가 스며든 현실을 경험한다. 할리크 몬시뇰이 말하는 교회 개혁이 “신학적, 영성적 쇄신의 원천에서 더 깊이 이루어져야 한다”6)고 할 때, 나는 그것을 성직주의에 오염됐음을 깨닫는 일과 나아가 그것을 극복해 내는 성숙한 신앙, 영적 힘이라고 여긴다. 농노가 봉건제를, 또 노예가 노예제도를 극복하지 않고 깨달음만으로는 자유로울 수 없듯이, 평신도의 영적 성숙은 불의한 구조를 극복하는 과정과 병행되지 않으면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진해온 개혁의 골갱이라고 본다. 여기서 성직주의를 거부하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연대가, 동등한 파트너십이 절실히 요구된다. 마침 올해 주교시노드의 ‘의안집’(working document)은 '너의 장막을 넓혀라'(Enlarge the space of your tent)7)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교회의 자리, 그 장막을 세상으로 우주로 경계를 허물고 끝없이 펼쳐가는 데 상호협력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오후에 마땅한 응답이 아닐까. 이것이 진정한 ‘함께 가는 길’로서의 시노드 아닐까.

1) 편집국, '세계 주교시노드에 평신도 투표권 허용',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23.04.27.에서 재인용.
2) 위의 글.
3) Massimo Faggioli, “Who Represents the Laity?- Looking Beyond the New Ecclesial Movements”, the Commonweal, November 7, 2018.
4) 위의 글. 더 자세한 내용은 그의 책, Sorting Out Catholicism: A Brief History of the New Ecclesial Movements (2014)와 The Rising Laity: Ecclesial Movements since Vatican II (2016)을 보라.
5) 토마시 할리크, "그리스도교의 오후", 분도출판사, 2023, 137-138쪽.
6) 위의 책, 138쪽.
7) Christopher White, “Pope Francis expands participation in synod to lay members, granting right to vote”, Vatican News, April 26, 2023.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