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5년, 프랑스 두에(Douai)에서 출판된 책이 있다. 제목은 ‘오라토레스’(Oratores). 고대 그리스의 연설 모음집이다. 17년 전, 이 책이 중국의 유명한 고서적 경매 카탈로그에 실렸다. 주최 측은 이 책을 예수회 선교사 트리고(Nicolas Trigault, 金尼閣, 1577-1628)와 연결시켰다. 그가 유럽에서 중국으로 가져온 책이라는 추정이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두에는 트리고의 고향이다. 트리고는 1617년 즈음에 고향을 방문했고 여러 책을 수집했다. 또한 두에는 작은 마을이다. 이런 라틴어 책은 발행 부수가 많지 않다. 이런 책이 어떻게 먼 나라 중국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들은 말한다. 답은 트리고라고. 그 책이 실제로 트리고와 연관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페어하렌(Hubert-Germain Verhaeren, C.M. 惠澤霖, 1877-?)이 편집한 ‘북당도서관 장서 목록’(1949)에는 없는 책이다. 하지만, 트리고의 여정을 상상해 보는 단초로는 충분하다.

"Latino-Attici oratores : Sive panegyrici …" 고대 그리스의 연설 모음집이다. 1595년에 프랑스 두에(Douai)에서 출판되었다. 예수회의 인장이 찍혀 있다. 이 책 표지 사진은 중국가덕2006추계박매회(中國嘉德2006秋季拍賣會, China Guardian 2006 Autumn Auctions)가 발행한 카탈로그 ''일천부'서문서적':종요람본도북당서목'(''一千部’西文書籍': 從搖籃本到北堂書目')에 실려 있다. 주최 측은 트리고가 고향인 두에(Douai)에서 중국에 가져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이미지 출처 왼쪽 = 오현석, 오른쪽 = livre-rare-book.com)<br>
"Latino-Attici oratores : Sive panegyrici …" 고대 그리스의 연설 모음집이다. 1595년에 프랑스 두에(Douai)에서 출판되었다. 예수회의 인장이 찍혀 있다. 이 책 표지 사진은 중국가덕2006추계박매회(中國嘉德2006秋季拍賣會, China Guardian 2006 Autumn Auctions)가 발행한 카탈로그 ''일천부'서문서적':종요람본도북당서목'(''一千部’西文書籍': 從搖籃本到北堂書目')에 실려 있다. 주최 측은 트리고가 고향인 두에(Douai)에서 중국에 가져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이미지 출처 왼쪽 = 오현석, 오른쪽 = livre-rare-book.com)

트리고의 유럽 여정

1613년, 트리고는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출발지는 마카오. 롱고바르도(Niccolò Longobardo, 龍華民, 1565-1655)의 지시였다. 트리고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새로운 선교사 모집하기, 유럽 서적 수집해오기. 사실, 이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의 기획이었다. 유럽의 과학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해 소개하려는 기획이었다. 서광계(徐光啓, 1562-1633), 이지조(李之藻, 1564-1630)도 여기에 함께했다. 리치는 유럽에 편지를 보내 필요한 책과 인재를 찾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기획은 롱고바르도에게 계승되었다. 트리고가 유럽에 가게 된 배경이다.

1614년 11월, 그는 로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3년 뒤, 흥미로운 편지를 북경에 보냈다. 1617년 1월 2일에 브뤼셀에서 쓴 편지다. “우리는 교황님께 요청했습니다. 북경에 도서관을 세워 달라고 말이지요. 그 도서관은 유럽의 일류 도서관에 견줄 만해야 합니다. 또한 중국 각지의 성당에도 작은 도서관이 필요합니다.” 편지에는 트리고가 유럽에서 수행했던 임무의 경과가 담겨 있었다. 리치와 롱고바르도가 그렸던 청사진이었다. 아니, 그 청사진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북당도서관 장서 모습. 1901년 사진이다. 북당도서관은 북당의 부속 건물에 마련되어 있었다. (사진 출처 = Vincentian Sources)
북당도서관 장서 모습. 1901년 사진이다. 북당도서관은 북당의 부속 건물에 마련되어 있었다. (사진 출처 = Vincentian Sources)

교황의 화답

교황은 트리고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당시 교황은 바오로 5세(Paul Ⅴ)였다. 교황의 지원은 큰 힘이 되었다. 트리고는 500여 권의 서적을 모았다. 그 책들을 그는 이렇게 소개했다. “문학, 철학, 신학 이외의 책들도 있습니다. 의학, 교회법, 법학, 음악 관련 도서입니다. 수학 관련 서적은 기존의 것을 빠짐없이 수집했습니다. 모두 화려하게 장정된 도서입니다. 붉은 가죽 표지에는 교황의 문장이 있고, 책 제목은 금박으로 새겨 있습니다. 저는 판형이 큰 도서를 얻고자 했습니다.”

화려한 장정은 오라스 카르동(Horace Cardon, 1565-1641)의 솜씨였다. 리옹(Lyon)의 제본업자로 교황 도서관의 장서를 전담하고 있었다. 트리고는 교황에게 재정 지원도 요청했었다. 중국의 선교 도서관을 위해서 말이다. 예수회 총장도 이에 화답했다. 두 사람은 금화 일천 냥씩을 기부했다. 그 돈이 모두 카르동에게 보내졌다. 교황의 문장이 찍힌 500여 권의 도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1901년 북당인서관의 모습. 북당인서관은 북경의 라자리스트가 운영한 출판인쇄소다. 북당의 부속 건물에 설치되어 있었다.<br>(사진 출처 = Vincentian Sources)<br>
1901년 북당인서관의 모습. 북당인서관은 북경의 라자리스트가 운영한 출판인쇄소다. 북당의 부속 건물에 설치되어 있었다. (사진 출처 = Vincentian Sources)

트리고의 서적 수집 여행

트리고는 더 많은 책을 수집하려 애썼다. 1616년 봄부터는 유럽 전역을 돌았다. 그 여정에 테렌티우스(Johann Schreck Terrentius, 鄧玉函, 1576-1630)도 합세했다. 밀라노, 리옹, 뮌헨, 프랑크푸르트, 마인츠, 쾰른 등 서적이 모이는 주요 도시를 거쳤다. 가는 도시마다 중국 선교를 선전했다. 지원 요청도 잊지 않았다. 서적 외에도 천문 관측기구, 보석이나 진귀한 공예품도 모았다. 중국 황제와 고위층에게 바칠 선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브뤼셀에 들렀다. 1617년, 트리고가 북경에 보냈던 편지는 거기서 작성되었다. 여정을 마감하는 보고서였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 두에(Douai)였다. 프랑스 북부의 작은 도시. 트리고의 고향이었다. 그는 고향에서도 책을 얻었다. 장 드 생-로랑(Jean de Saint-Laurant)의 장서였다. 그는 트리고의 사촌이었다. 랑스(Lens) 신학교의 학장이자 두에 왕립학교의 그리스어 교수였다. 그는 동생이었던 위베르 드 생-로랑(Hubert de Saint-Laurant)에게 자신의 도서를 넘겼다. 위베르는 예수회원이었다. 그는 트리고를 따라 중국 선교에 나설 참이었다. 그의 형, 장의 도서는 남경(南京) 성당을 위한 몫이었다. 그곳에 세울 신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1618년 4월, 트리고는 리스본을 떠나는 배에 올랐다. 마카오에는 1620년 7월 22일에 닿았다. 7년 만이었다. 선교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1616년에 시작된 남경교안(南京敎案)으로 성당이 불타거나 폐쇄되었다. 선교사와 신도는 뿔뿔이 흩어졌다. 유럽에서 품었던 희망은 물거품이 된 듯했다. 애써 가져온 멋진 책들도 허사였다. 트리고 일행은 탄식했다. 책들은 마카오에 두어야 했다. 남당(南堂)이 다시 열린 건 3년이 지나서였다. 그 후 어느 시점에 트리고의 책들이 북경으로 옮겨졌다.

북당의 라자리스트 선교사들의 거주 공간. (사진 출처 = Vincentian Sources)<br>
북당의 라자리스트 선교사들의 거주 공간. (사진 출처 = Vincentian Sources)

북당도서관 장서의 기원

‘북당도서관 장서 목록’에 나오는 책들은 선교사 장서의 극히 일부다. 그들의 장서는 200여 년에 걸쳐 조금씩 축적되었다. 그 시작은 마테오 리치였다. 리치는 과학으로 사대부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유럽에서 가져온 수학, 천문학 서적은 선교의 도구이자 설득의 무기였다. 그는 적지 않은 수의 과학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 클라비우스(Christoph Clavius, 1537-1612)의 저서 "아스트롤라베"(astrolabium)가 대표적이었다. 거기에 트리고가 유럽에서 수집해 온 서적이 더해졌다. 트리고의 도서 대부분이 남당에 소장되었다. 이른바 ‘남당 장서’다.

동당(東堂), 북당(北堂), 서당(西堂)의 선교사들도 제각기 장서를 늘려 나갔다. 더 진귀한 책을 확보하려는 경쟁도 있었다. 선교 공동체의 장서 외에 개인 장서도 있었다. 우선, 메자바르바(Carlo Ambrogio Mezzabarba, 嘉樂, 1685-1741)의 장서가 있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t XI)의 특사로 북경을 방문했었다. 두 명의 북경 주교가 소장했던 책도 있다. 예수회의 수자(Polycarpe de Souza, 索智能, 1697-1751)와 프란치스코회의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湯士選, 1751-1808)다. 중국 각지의 선교단도 저마다 소량의 장서를 보유했다. 그밖에 선교사 개인이 가지고 있었던 책들도 다수 있었다.

트리고의 역저 “De christiana expeditione apud Sinas”(1615). 마테오 리치가 이탈리아어로 쓴 것을 트리고가 내용을 추가하여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리치의 중국 선교 여정과 그가 관찰한 중국이 담겨 있다. 트리고는 1613년에 오른 유럽 여정 중에 이 책을 교황 바오로 5세(Paul Ⅴ)에게 바쳤다. 그는 헌사에서 교황이 중국 선교를 특별히 배려해 주심에 감사했다. 특히 중국의 선교 도서관 건립에 관해 그는 이렇게 썼다. “이 도서관의 창설은 교황의 영광에 매우 어울리는 것입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이 먼 나라 중국까지 기독교가 전파되었다는 불멸의 기념비가 될 것입니다.”(이미지 출처 = liberantiquus.com)<br>
트리고의 역저 “De christiana expeditione apud Sinas”(1615). 마테오 리치가 이탈리아어로 쓴 것을 트리고가 내용을 추가하여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리치의 중국 선교 여정과 그가 관찰한 중국이 담겨 있다. 트리고는 1613년에 오른 유럽 여정 중에 이 책을 교황 바오로 5세(Paul Ⅴ)에게 바쳤다. 그는 헌사에서 교황이 중국 선교를 특별히 배려해 주심에 감사했다. 특히 중국의 선교 도서관 건립에 관해 그는 이렇게 썼다. “이 도서관의 창설은 교황의 영광에 매우 어울리는 것입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이 먼 나라 중국까지 기독교가 전파되었다는 불멸의 기념비가 될 것입니다.”(이미지 출처 = liberantiquus.com)

왜 북당도서관인가?

남당 장서는 ‘북당도서관 장서’의 시작이자 근간이었다. 규모도 가장 컸다. 프랑스 선교단의 북당 장서는 남당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북당도서관 장서’라고 부를까? 1773년, 예수회가 해산되자 그들의 북경 선교도 막을 내렸다. 두 세기에 걸친 선교였다. 교황청과 프랑스 정부는 북당의 예수회를 대체할 이들을 지명했다. 라자리스트(Lazaristes)였다. 1785년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건륭제는 천주교를 전면 금지했다. 라자리스트 선교사가 북당에 왔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금교(禁敎)는 1826년까지 이어졌다. 그 기간에 중국의 모든 선교지가 문을 닫았다. 선교사들은 장서를 하나둘 남당으로 보냈다. 남당에는 페레이라(Gaetano Pires Pereira, C.M. 畢學源, 1763-1838) 주교가 있었다. 금교 기간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선교사였다. 그는 12년간 남당을 지켰다. 세상을 떠나기 전, 늙은 주교는 남당의 모든 책을 러시아 정교회에 맡겼다.

그리고 두 번의 전쟁이 있었다. 아편전쟁이다. 그 끝은 북경조약(1860)이었다. 북경조약으로 선교의 제약이 사라졌다. 물리(Joseph-Martial Mouly, C.M. 孟振生, 1807-68) 주교는 북당으로 돌아왔다. 그는 직예북부대목구장이었다. 서만자(西灣子)로 옮겨 놓았던 북당 장서 일부도 가져왔다. 러시아 정교회는 남당의 장서를 물리 주교에게 돌려주었다. 그가 있던 북당은 1887년에 현재의 장소인 시스쿠(西什庫)로 이전되었다. 주교는 북당의 부속 건물에 서고를 만들었다. ‘북당도서관’이다.

1949년, 북당도서관장 페어하렌은 도서의 총 숫자를 5133권이라고 밝혔다. 그중 책의 내력을 알 수 있는 건 절반 정도라고 했다. 그 단서는 소장자의 인장이나 서명, 수도회나 성당의 표식 등이다. 지금 ‘북당도서관 장서’는 모두 중국국가도서관에 있다.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는다. 마테오 리치 이래 수많은 시간을 견뎌 온 책들이다. 그 안에는 허다한 사연과 곡절이 있을 게다. 어쩌랴. 닫힌 옛 서고의 문이 열릴 때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북당도서관 인장이 찍힌 도서. 인장은 원형으로 지름이 약 4.5센티미터다. 바깥 원은 구슬로 장식되어 있고, 가운데는 몰타 십자가(Maltese cross)가 있다. 원 둘레를 돌며 새긴 글자는 “BIBLIOTHECA DOMUS S (ANCTISSIMI). SALVATIORIS.” 몰타 십자가 아래에 가로 글자는 “PEKING”이다. 문구 뜻을 연결하면 ‘북경구세당도서관’(北京救世堂图书馆)이 된다. ‘구세당’(救世堂)은 북당의 정식 명칭이다. 이 인장이 찍힌 대부분 장서는 옛 남당 장서다. 러시아 정교회가 물리 주교에게 남당 장서를 돌려주면서 남당과 북당 장서가 합쳐지고 북당에 보관된다. 1862년에 북당의 티에리(Jean-Baptiste-Raphaël Thierry, 狄仁吉, C.M. 1823-80) 신부가 장서 목록을 정리하면서 이 인장을 날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왼쪽 책은 클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 1537-1612)의 “아스트롤라비움”(Astrolabium). 1593년 로마에서 출판되었다. 책에는 클라비우스가 직접 쓴 글씨가 있다. ‘제자에게 증정한다’는 문구다. 여기에서 제자는 마테오 리치다. 오른쪽 책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Libri Ⅵ”). 1566년 바젤에서 출판된 제2판이다.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 지아코모 로(Giacomo Rho, 羅雅谷, 1593-1638)가 소장했던 책이다. 표지 하단에 펜으로 쓴 그의 라틴어 서명이 있다. (이미지 출처 = 赵大莹, “方寸存真 : 北堂书的藏书印与藏书签”, 《文献》 2016年9月第5期, p.44)<br>
북당도서관 인장이 찍힌 도서. 인장은 원형으로 지름이 약 4.5센티미터다. 바깥 원은 구슬로 장식되어 있고, 가운데는 몰타 십자가(Maltese cross)가 있다. 원 둘레를 돌며 새긴 글자는 “BIBLIOTHECA DOMUS S (ANCTISSIMI). SALVATIORIS.” 몰타 십자가 아래에 가로 글자는 “PEKING”이다. 문구 뜻을 연결하면 ‘북경구세당도서관’(北京救世堂图书馆)이 된다. ‘구세당’(救世堂)은 북당의 정식 명칭이다. 이 인장이 찍힌 대부분 장서는 옛 남당 장서다. 러시아 정교회가 물리 주교에게 남당 장서를 돌려주면서 남당과 북당 장서가 합쳐지고 북당에 보관된다. 1862년에 북당의 티에리(Jean-Baptiste-Raphaël Thierry, 狄仁吉, C.M. 1823-80) 신부가 장서 목록을 정리하면서 이 인장을 날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왼쪽 책은 클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 1537-1612)의 “아스트롤라비움”(Astrolabium). 1593년 로마에서 출판되었다. 책에는 클라비우스가 직접 쓴 글씨가 있다. ‘제자에게 증정한다’는 문구다. 여기에서 제자는 마테오 리치다. 오른쪽 책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Libri Ⅵ”). 1566년 바젤에서 출판된 제2판이다.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 지아코모 로(Giacomo Rho, 羅雅谷, 1593-1638)가 소장했던 책이다. 표지 하단에 펜으로 쓴 그의 라틴어 서명이 있다. (이미지 출처 = 赵大莹, “方寸存真 : 北堂书的藏书印与藏书签”, 《文献》 2016年9月第5期, p.44)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