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은 포위전에 휘말렸습니다. 큰 혼란의 한가운데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도서관은 피해가 없습니다. 평화 회담도 시작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소중한 유산이 이 전쟁을 비켜 가기만 바랄 뿐입니다.”

북당도서관 장서목록

페어하렌(Hubert-Germain Verhaeren, C.M. 惠澤霖, 1877-?) 신부가 북경에서 쓴 글이다. 날짜는 1949년 1월 21일. 책 서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북경 라자리스트(Lazaristes)가 출판한 책이었다. 제목은 "북당도서관 장서목록"(Catalogue of the Pei-T'ang Library). 명청시기 북경 선교사들의 장서 목록을 정리한 책이다. 서지사항뿐만 아니라 각 도서에 관한 간단한 설명도 달려 있다. 페어하렌은 이 책의 총편집자였다. 국공내전(國共內戰)이 끝으로 치닫던 무렵, 책이 완성되었다.

책은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되었다. 1937년 10월 4일, 페터스(William. B. Pettus, 裴德士, 1880-1959)와 호튼(Henry S. Houghton, 胡恒德, 1880-1975)이 보낸 서신이었다. 페터스는 연경화문학교(燕京華文學校, Yenching School of Chinese Studies) 교장, 호튼은 북경협화의학원(北京協和醫學院, Peiping Union Medical College) 원장이었다. 수신인은 그란트(John B. Grant, 蘭安生, 1890-1962). 공중보건학자로 록펠러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이 협화의학원에 교수로 파견한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상해에 있었다.

서신은 이러했다. “북당(北堂)은 진귀한 도서를 대량으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장서가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장서를 정리하고 복구하려면 자금이 필요합니다. 지원을 바랍니다. 최종적으로는 현대적인 도서관을 만들어 모든 사람이 이용하게 되길 바랍니다.”

후베르트 페어하렌(Hubert-Germain Verhaeren). 그리고 그가 책임편집한 "북당도서관 장서목록"(“Catalogue of the Pei-T'ang Library”, 1949) 표지. 페어하렌의 중국식 이름은 후이즈린(惠澤霖)이다. 흔히 ‘라자리스트’(Lazaristes)라고 부르는 ‘선교수도회’(Congrégation de la Mission) 소속 신부다. 1877년 9월 28일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노르드-브라반트주(Noord-Brabant)의 준데르트(Zundert)가 그의 고향이다. 1895년에 9월 16일, 파리 신학교(séminaire) 입학. 1897년 9월 17일, 수도자 서원. 1902년 5월 24일, 파리에서 사제 수품. 이듬해 9월 25일, 상해로 파견. 이후, 직예북부대목구(直隸北部代牧區)의 중심인 북경에서 활동했다. 직예(直隸)는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다. (이미지 출처 =&nbsp;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중국 국가도서관출판사)<br>
후베르트 페어하렌(Hubert-Germain Verhaeren). 그리고 그가 책임편집한 "북당도서관 장서목록"(“Catalogue of the Pei-T'ang Library”, 1949) 표지. 페어하렌의 중국식 이름은 후이즈린(惠澤霖)이다. 흔히 ‘라자리스트’(Lazaristes)라고 부르는 ‘선교수도회’(Congrégation de la Mission) 소속 신부다. 1877년 9월 28일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노르드-브라반트주(Noord-Brabant)의 준데르트(Zundert)가 그의 고향이다. 1895년에 9월 16일, 파리 신학교(séminaire) 입학. 1897년 9월 17일, 수도자 서원. 1902년 5월 24일, 파리에서 사제 수품. 이듬해 9월 25일, 상해로 파견. 이후, 직예북부대목구(直隸北部代牧區)의 중심인 북경에서 활동했다. 직예(直隸)는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다. (이미지 출처 =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중국 국가도서관출판사)
페어하렌이 책임편집한 "북당도서관 장서목록"(“Catalogue of the Pei-T'ang Library”, 1949)의 내용 일부. 이 책은 2009년에 중국 국가도서관출판사(國家圖書館出版社)에서 다시 간행되었다. 이 책에 정리된 목록은 모두 명청시기 북경 예수회 선교사들이 소장했던 도서다. 왼쪽 이미지의 왼쪽 행에 나오는 책 표지는 장서번호 174번, "Pharmacopée royale galénique et chimique"(“藥典”). 모이스 샤라(Moyse Charas, 1619-98)가 1672년 파리에서 출판한 약물학 도서다. 오른쪽 이미지에 있는 책 표지는 장서번호 1291번, "Astrolabium". 저자는 클라비우스(Christophorus&nbsp;Clavius, 1538-1612). 로마의 예수회 신학교인 콜레지움 로마눔(Collegium Romanum)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그에게서 배웠다. 클라비우스의 “아스트롤라비움”은 아스트롤라베(astrolabe) 해설서다. 1593년 로마에서 출판됐다. 아스트롤라베는 별의 위치를 관측하는 기구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져 이슬람 세계와 중세 유럽에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이미지 출처 = 중국 국가도서관출판사)
페어하렌이 책임편집한 "북당도서관 장서목록"(“Catalogue of the Pei-T'ang Library”, 1949)의 내용 일부. 이 책은 2009년에 중국 국가도서관출판사(國家圖書館出版社)에서 다시 간행되었다. 이 책에 정리된 목록은 모두 명청시기 북경 예수회 선교사들이 소장했던 도서다. 왼쪽 이미지의 왼쪽 행에 나오는 책 표지는 장서번호 174번, "Pharmacopée royale galénique et chimique"(“藥典”). 모이스 샤라(Moyse Charas, 1619-98)가 1672년 파리에서 출판한 약물학 도서다. 오른쪽 이미지에 있는 책 표지는 장서번호 1291번, "Astrolabium". 저자는 클라비우스(Christophorus Clavius, 1538-1612). 로마의 예수회 신학교인 콜레지움 로마눔(Collegium Romanum)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그에게서 배웠다. 클라비우스의 “아스트롤라비움”은 아스트롤라베(astrolabe) 해설서다. 1593년 로마에서 출판됐다. 아스트롤라베는 별의 위치를 관측하는 기구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져 이슬람 세계와 중세 유럽에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이미지 출처 = 중국 국가도서관출판사)

슐타이스의 조사보고서

서신에는 보고서 한 부가 첨부되어 있었다. 슐타이스(Frederic D. Schultheis)가 쓴 것이었다. 연경화문학교 도서관장. 그의 보고서에는 북당 장서의 연혁과 현황이 담겨 있었다. 그가 추산한 장서의 숫자는 서양서 1만 5000여 권, 중국서 약 8만 권이었다. 서양서는 대부분 17-18세기에 유럽에서 출판된 것이었다. 그중 4분의 3이 과학기술 서적과 문학작품이었다. 중국서는 황실에서 인쇄한 것이 주종을 이뤘다. 명과 청의 황실도서였다. 장서의 보존 상태는 심각했다. 책의 외양도 분류의 모양새도 좋지 않았다.

슐타이스는 이렇게 썼다. “서가, 책상 등 모든 설비를 새로 설치해야 합니다. 북당인서관(北堂印書館, Imprimerie des Lazaristes au Pei-T'ang)에서 도서를 다시 장정해야 합니다. 장서 목록도 최대한 상세하게 작성해야 합니다.” 보고서 끝에서 예산의 규모와 내역도 제시했다. 프랑스 화폐로 총 2만 1470프랑. 아쉽게도 그는 이후의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북당인서관(北堂印書館, Lazariste Press). 1935년의 모습. 북경의 라자리스트가 운영한 출판인쇄소. 북당의 부속 건물에 설치되어 있었다. 페어하렌이 책임편집한 "북당도서관 장서목록"(Catalogue of the Pei-T'ang Library, 1949) 역시 이곳에서 출판되었다. (사진 출처 =&nbsp;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북당인서관(北堂印書館, Lazariste Press). 1935년의 모습. 프랑스어로는 Imprimerie des Lazaristes au Pei-T'ang.. 북경의 라자리스트가 운영한 출판인쇄소. 북당의 부속 건물에 설치되어 있었다. 페어하렌이 책임편집한 "북당도서관 장서목록"(Catalogue of the Pei-T'ang Library, 1949) 역시 이곳에서 출판되었다. (사진 출처 =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록펠러재단의 조치

1937년 10월 8일, 셀스칼 건(Selskar M. Gunn, 1883-1944)은 급히 서신을 띄웠다. 록펠러재단의 부대표. 그는 그란트와 함께 중국 농촌의 보건 개선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가 상해에서 보낸 편지는 원동례(袁同禮, 1895-1965)에게 닿았다. 국립북평도서관(國立北平圖書館)의 부관장이었다. 북평(北平)은 북경의 옛 이름이다. 서신은 북당 장서의 복구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10월 14일, 원동례는 장사(長沙)에서 답신을 보냈다. “북경의 정세가 안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업량이 막대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우선, 미국의 도서관학 전문가들을 북경에 보내세요. 그들의 조사를 보고 결정하십시다.”

그란트는 저간의 사정과 원동례의 답신을 동봉하여 뉴욕으로 보냈다. 록펠러재단은 이 사안 일체를 검토했다. 담당자는 인문 부서의 주임 스티븐스(David H. Stevens, 1884-1980). 12월 10일, 그는 미국인문학이사회(American Council of Learned Societies)에 자문을 구했다. 나흘 뒤, 회신이 왔다. 이사회 산하의 중국학위원회가 심의한 결과였다. 그들의 견해는 엇갈렸다. 그들은 세 가지 다른 견해를 함께 보내왔다. 반대, 중립, 지지였다.

북당인서관(北堂印書館, Lazariste Press). 1935년의 모습. (사진 출처 =&nbsp;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br>
북당인서관(北堂印書館, Lazariste Press). 1935년의 모습. (사진 출처 =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위원회, 서로 다른 입장

두 사람이 반대했다. 웨어(James R. Ware)와 비거스타프(Knight Biggerstaff, 1906-2001)였다. 웨어의 반대가 특히 심했다. 그는 하버드대학 중문과 교수였다. 그는 사업 진행의 주체를 문제 삼았다. 북경의 라자리스트는 프랑스인들이다. 미국 교회가 아니다. 미국 학자들에 우호적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중립은 한 사람. 라투레트(Kenneth S. Latourette, 1884-1986). 예일대학 교수로 동아시아 기독교사 연구자다. 그의 태도는 신중했다. 현재 북당 장서의 상황을 알 수 없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면밀한 조사를 맡기자. 그리고는 적임자 한 사람을 추천했다. 홍예(洪業, 1893-1980). 연경대학(燕京大學)의 역사학 교수였다. 하버드-옌칭연구소의 책임편집자이기도 했다.

지지는 세 사람이었다. 엘리제프(Serge G. Elisséff, 1889-1975), 크릴(Herrlee G. Creel, 1905-94), 굿리치(Luther C. Goodrich, 1894-1986). 엘리제프는 하버드-옌칭연구소의 초대 책임자였다. 크릴은 시카고대학에서, 굿리치는 콜럼비아대학에서 중국학을 가르쳤다. 굿리치는 적극 찬성했다. 그는 북당 장서에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해 봄, 북경에서 장서의 존재를 직접 확인했었다.

북당인서관(北堂印書館, Lazariste Press). 1935년의 모습. (사진 출처 =&nbsp;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br>
북당인서관(北堂印書館, Lazariste Press). 1935년의 모습. (사진 출처 =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북경 라자리스트의 고민

세 사람, 반대와 중립을 표명한 이들은 같은 우려를 하고 있었다. 북당 장서는 라자리스트의 소관이었다. 미국인 학자에게도 장서를 개방할까. 천주교와 관계없는 이들에게도 열어 줄까. 그것이 미국의 지원으로 복구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라자리스트가 미덥지 않았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북경 라자리스트의 태도다. 그들은 왜 파리나 로마에 요청하지 않았을까. 직예동남의 프랑스 예수회 역시 장서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앙리 베르나르(Henri Bernard-Maitre, S.J., 裴化行, 1889-1975) 신부 등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도 나서지 않았다.

당시 유럽은 혼란했다. 분열 직전이었다. 1937년은 2차 대전으로부터 2년 전이다. 그해에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방공협정을 체결했다. 북경의 상황도 급박했다. 노구교(盧溝橋) 사건으로 일본군이 밀려들고 있었다. 북경의 도서관과 국립대학은 속속 내륙으로 이전하고 있었다. 북경의 선교사들은 초조했다. 북당의 옛 유산이 잿더미가 될 수 있었다. 유럽에는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에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선교사들은 우회로를 선택했다. 북경의 미국 측 유력 인사들을 움직이는 것이다. 록펠러재단의 기금이라면 어떨까. 그들의 생각은 주효했다.

북당인서관 인장(印章). (이미지 출처 =&nbsp;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br>
북당인서관 인장(印章). (이미지 출처 =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작업이 시작되다

재단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했다. 이듬해인 1938년 8월에야 합의에 이르렀다. 10월 14일, 록펠러재단은 지원을 최종 승인했다. 승인 번호는 H200. 배정된 예산은 3000달러. 수행과제는 옛 북당 장서의 복구, 분류 및 정리 작업이었다. 목록의 편찬도 함께 진행한다. 기한은 1939년 12월 31일까지. 결과물 완전 공개라는 단서가 붙었다.

북경의 인사들은 11월 8일에 소식을 받았다. 그들은 위원회를 구성하고 세부 일정을 조율했다. 북경 주교 몽테뉴(Mgr. Paul Montaigne, C.M., 满德贻, 1883-1962)는 신부 세 사람을 지명해 일을 맡겼다. 북경 보인대학(輔仁大學)의 뤼흘(Theodore Rühl, S.V.D., 盧華民)과 괴르츠(Joseph Goertz, S.V.D., 葛爾慈). 철학-심리학과의 교수였다. 그리고 북당도서관장 페어하렌. 이들 세 사람은 무보수였다. 중국인 10명도 참여했다. 그들의 급여는 록펠러재단의 기금에서 나갔다.

1939년 1월 9일, 마침내 작업이 시작되었다. 옛 서고의 오래된 책들이 하나하나 펼쳐졌다. 낡은 갈피에 새겨진 인장과 서명. 북경 예수회 선교사들의 손때 묻은 책들이었다. 그들의 흔적이자 역사였다.

1935년의 북당(北堂). 1888년(光緖14年)에 북당은 찬츠커우(蠶池口)에서 현재 위치인 시스쿠(西什庫)로 옮겨졌다. 지금의 이름은 시스쿠교당(西什庫敎堂).&nbsp;(이미지 출처 =&nbsp;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br>
1935년의 북당(北堂). 1888년(光緖14年)에 북당은 찬츠커우(蠶池口)에서 현재 위치인 시스쿠(西什庫)로 옮겨졌다. 지금의 이름은 시스쿠교당(西什庫敎堂). (이미지 출처 = vincentianpersons.azurewebsites.net)

(다음 글에서 계속)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