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비스트의 편지

‘역옥’(曆獄)의 파장은 컸다. 역옥은 양광선(楊光先, 1597-1669)의 역법 논쟁으로 선교사들이 옥고를 치른 사건이다. 1668년에 양광선이 파면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 1623-88)는 흠천감에 복귀해 책임자가 되었다. 마카오로 추방되었던 선교사들도 1671년에는 대부분 원래 선교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17세기 중국 선교는 이전의 성과를 회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선교사가 크게 부족했다. 각지의 선교사들이 차례로 사망했다. 빈자리는 날로 커져 갔다. 페르비스트는 지원을 청하는 서신을 유럽으로 보냈다. 그의 문장은 절실했다. 그의 편지 중 하나가 루이 14세(Louis XIV)에게 닿았다.

당시 루이 14세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의 학자들을 지구상의 모든 지역으로 파견하는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인도와 중국에 보낼 사람을 선택하는 건 쉽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고 위험도 컸다. 게다가 포르투갈이 선교와 무역을 독점하던 지역이었다. 루이 14세는 포르투갈의 영향력을 줄이고 싶어 했다. 루이 14세의 선교단은 이렇게 탄생했다. 복음 전파, 과학의 진보,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라는 세 가지 동기가 결합된 결과였다.

페르비스트가 1674년에 작성한 곤여전도(坤輿全圖).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1602년 북경에서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양반구형 세계지도로 개정한 작품이다. (이미지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본. gallica.bnf.fr)
페르비스트가 1674년에 작성한 곤여전도(坤輿全圖).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1602년 북경에서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양반구형 세계지도로 개정한 작품이다. (이미지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본. gallica.bnf.fr)

루이 14세의 선교사들

루이 14세는 드 라 셰즈(de la Chaise) 신부에게 선교단 구성의 임무를 맡겼다. 그는 국왕의 고해 사제였다. 드 라 셰즈는 예수회 총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파송할 선교사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정부와 과학아카데미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루부아(Louvois, 1641-91)는 예수회에 재차 선교사 선발을 요청했다. 그는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 1619-83) 재상의 뒤를 이은 인물이었다.

과학 지식을 충분히 갖춘 이들일 것. 선교사 선발의 우선적인 조건이었다. 우선, 퐁타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1643-1710)가 지명되었다. 그는 루이 르 그랑 콜레주(Collége Louis le Grand)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쳤다. 그가 나머지 5명의 선교사를 선발했다. 모두 젊고 유능한 예수회원이었다. 부베(Joachim Bouvet, 白晋, 1656-1730),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張誠, 1654-1707), 르 콩트(Louis Le Comte, 李明, 1655-1728), 비스델루(Claude de Visdelou, 劉應, 1656-1737), 타샤르(Guy Tachard, 1648-1712)였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퐁타네 등은 과학아카데미에 입회한다. 거기서 여러 가지 기기를 제공받고 사용법도 익혔다. 천문과 지리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필요한 관측기기들이었다. 1685년 3월, 그들은 브레스트(Brest)에서 ‘으와조’(Oyseau)호에 오른다. 그 배의 임무는 국왕의 특명 대사인 슈발리에 드 쇼몽(le chevalier de Chaumont)을 시암(Siam)까지 보내는 것이었다.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의 "중화제국전지"(Illustrations de Description gé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1736)에 나오는 삽화. (왼쪽부터) 마테오 리치, 아담 샬, 페르비스트. (이미지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본. gallica.bnf.fr)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의 "중화제국전지"(Illustrations de Description gé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1736)에 나오는 삽화. (왼쪽부터) 마테오 리치, 아담 샬, 페르비스트. (이미지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본. gallica.bnf.fr)

중국으로 향하는 여정

그들은 1685년 9월 시암에 도착했다. 퐁타네는 거기서 개기월식을 관찰하기도 했다. 시암에서 타샤르는 또 다른 임무를 받아 프랑스로 돌아간다. 1686년 7월, 선교사들은 시암을 떠나 마카오로 향했다. 남중국해의 바다는 쉽지 않았다. 캄보디아 해안에서 배가 좌초되기도 했다. 어려움은 또 있었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였다. 마카오는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허나, 그곳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본거지였다. 퐁타네는 마카오를 우회하기로 한다. 1687년 6월, 다섯 명의 선교사는 영파(寧波)로 향하는 정크선을 얻어 탔다. 그리고 7월 23일, 영파에 닿았다.

영파의 지방관은 선교사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북경의 예부(禮部) 역시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다. 퐁타네 신부는 서둘러 두 통의 서신을 띄웠다. 수신인은 항주(杭州)의 인토르체타(Prospero Intorcetta, 殷鐸澤, 1626-96), 그리고 북경의 페르비스트였다. 소식은 페르비스트를 거쳐 황제에게 닿았다. 영파의 선교사들을 북경으로 모셔 오라. 황제의 명령이었다. 1687년 11월 26일, 그들은 영파를 떠났다. 항주를 거쳐 운하를 따라 황제의 도시로 향했다. 양주(楊州)에서는 가비아니(Jean-Dominique Gabiani, 畢嘉, 1659-96)를 만나기도 했다.

이듬해 2월 7일, 마침내 북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페르비스트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파리에서 북경까지, 이 모든 여정이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여정의 끝을 페르비스트는 보지 못했다. 그가 죽은 지 열흘째 되는 날, 루이 14세의 선교사들은 강희제(康熙帝)의 궁전 앞에 섰다. 청 제국의 심장이었다.

퐁타네가 1686년에 시암(Siam)에서 보낸 편지. (1687년 출판) (이미지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본. gallica.bnf.fr)
퐁타네가 1686년에 시암(Siam)에서 보낸 편지. (1687년 출판) (이미지 출처 =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본. gallica.bnf.fr)

루이 르 그랑 콜레주(Collège Louis le Grand)

여기서 잠시, 다시 파리로 눈을 돌려야겠다. 루이 르 그랑 콜레주를 소개해야 한다. 루이 14세가 파견한 여섯 선교사 모두 그 학교 출신이었다. 그들이 거기서 받았던 교육은 중국 선교의 성격과도 무관치 않다. 1563년에 파리에서 시작된 이 학교는 프랑스 국왕과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다. ‘루이 르 그랑’(Louis le Grand)이라는 이름이 명확히 보여 준다. 1682년에 루이 14세가 자신의 이름을 직접 하사했다.

이 학교의 이름은 지금도 남아 있다. 명문인 리세 루이 르 그랑(Lycée Louis le Grand)이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콜레주(Collège)’는 중학교, ‘리세(Lycée)’는 고등학교를 가리킨다. 하지만 중세 대학(université)에서 콜레주는 원래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무료 기숙사를 뜻했다. 여기에 교육 기능이 더해지면서 독립적인 학교가 되었다. 기숙형 학교인 셈이다. 루이 14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루이 르 그랑 콜레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프랑스 혁명(1789-94) 이전까지, 루이 르 그랑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교육기관이었다.

루이 르 그랑 콜레주(Collège Louis-le-Grand)의 정문. (이미지 출처 = alamy)
루이 르 그랑 콜레주(Collège Louis-le-Grand)의 정문. (이미지 출처 = alamy)
1853년의 콜레주 루이 르 그랑(Collège Louis-le-Grand)의 모습. 레옹 레몽네르예(Léon Leymonnerye, 1803-79)의 작품. (이미지 출처 = parismuseescollections.paris.fr)
1853년의 콜레주 루이 르 그랑(Collège Louis-le-Grand)의 모습. 레옹 레몽네르예(Léon Leymonnerye, 1803-79)의 작품. (이미지 출처 = parismuseescollections.paris.fr)

예수회, 그리고 프랑스의 선교

중세기 프랑스 교육의 정점에 있었던 학교는 파리대학이었다. 교황에 의한 학교로 구성원도 모두 성직자였다. 하지만 15세기에 프랑스 왕권이 강화되면서 교황의 후원이 끊어진다. 파리대학의 위상은 점차 하락했다. 16세기 이후의 사회 변화도 한몫했다. 도시의 중산층이 새롭게 부상했다. 그들은 성직자 교육이 아닌 새로운 교육을 요구했다. 이즈음 등장한 예수회 학교는 이 요구를 훌륭히 만족시켰다.

그리스-로마의 고전 교육을 통한 우아하고 지적인 인간. 이른바 ‘교양인’(honnête homme)이 예수회 교육의 지향점이었다. 그들은 신학과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적절히 조화시켰다. 여러 수도회에서 콜레주를 세웠지만 예수회의 콜레주는 특히 유명했다. 대도시의 명문 콜레주들이 대부분 예수회 콜레주였다. 루이 르 그랑이 대표적이었다. 18세기 초에 루이 르 그랑은 프랑스 최상위층의 필수 코스로 여겨졌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 등 걸출한 계몽사상가들이 바로 이곳 출신이다.

역설적이게도, 종교에서 자유로운 사상가들이 예수회 콜레주에서 탄생한 게다. 북경에 파견된 다섯 선교사 역시 ‘과학과 진보’라는 17세기적 가치에 부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선발된 이유는 다름 아닌 뛰어난 과학 지식이었다. 18세기 북경 선교의 방향과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역설이 있다. 예수회는 교황에 절대 순종을 맹세한 이들이다. 그들을 ‘교황의 군대’라고 부르기도 했던 이유다. 북경에 이제 막 당도한 다섯 선교사들 역시 ‘교황의 병사’였다. 허나,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이기도 했다. 그들은 루이 14세의 이름이 걸린 학교에서 배웠고,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강희제 앞에 서게 되었다. 이제, 로마가 아닌 ‘프랑스의 선교’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2018년 리세 루이 르 그랑.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2008년 리세 루이 르 그랑.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다음 글에서 계속.)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 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