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귀족의 나라를 넘어서

이 글은 <가톨릭평론> 37호(2022년 가을)에 실린 글입니다.

대학 관련 상처 없으면 한국인이 아니다

나는 사춘기 때 “삶이 우릴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라는 말이 참 싫었다. 그래서 필통에 “삶이 우릴 속이면 슬퍼하고 노하라”라고 써붙여 놓았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때 나이의 세 배가 되고 보니, 삶은 나를 속인 적이 없었다! 내가 멍청해서 삶이 나를 속였다고 삶에 뒤집어씌웠을 뿐이다.

우리나라 교육 문제도 그렇다. 각자 자신의 욕망은 숨겨 두고, 그 욕망이 부른 참사는 외면한 채 제도가 문제라고 탓한다. 그리고 그 제도를 만든 기득권이 문제라고 비판한다. 물론 비리와 부정도 권한 있는 자가 행할 수 있으니 부패도 권력으로부터 나오는 걸 부인할 순 없다. 다만 내가 그 문제에 일조한 적은 없는지, 또는 내 상처로 인해 외면하고 회피해 온 적은 없는지 정도는 짚어 보자. 대한민국은 앉으나 서나 교육 생각, 잠드나 깨나 교육 걱정뿐인데, 이런 세상에서 ‘나는 피해자’란 인식은 시민으로서 직무유기 아닐까.

우리의 유구한 DNA에 교육이란 두 글자가 문신처럼 새겨진 것인지, 자식 교육으로 가족관계가 박살 나는 것도 일상이고, 애초에 그 자녀 문제도 학교 성적이 태반이지만, 매일같이 교육 문제로 온 나라가 뒤집히는 것도 일상이다. 우리의 부모세대는 늘 시대와 세대를 넘어 하나같이 대학으로 특혜를 누렸거나 차별을 받았거나 둘 중 하나다. 전자는 대학 빼곤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의 경우고, 후자는 대학 못 간 서러움을 평생 겪으며 산 사람의 경우인데, 문제는 우리 사회 태반의 부모가 거의 두 경우 중 하나에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호칭에 ‘박사’가 붙어 있음을 상기해 보라. 나는 어릴 때 박사가 곧 대통령인 줄 알았다. 우리가 그런 민족이다.

그래서 대학 혜택을 본 사람이나 대학으로 차별받은 사람이나 일단 대한민국의 부모가 되고 나면 전력을 다해 자녀를 명문대에 입학시키는 것이 인생 성공의 지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편법과 불법의 유혹 앞에 쉽게 무너진다. 여기서 나온 말이 “부모가 힘이 없어서 미안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불공평한 세상을 보완해 줄 가장 견고한 지렛대로 시험제도를 꼽고, 그 정점에 있는 대학이 공정성의 마지막 보루라고 경전처럼 믿으면서, 막상 그런 믿음과는 모순되게도 계층 상승의 한계를 대학으로 체감한다는 것이다. 경쟁력이 없어서 경쟁률에 밀려 경쟁심만 남은 다수의 ‘우리’에게 교육 관련 비리는 인내의 임계점에서 바글바글 끓고 있는 분노의 활화산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그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불에 거의 다가 또 불타서 재가 되거나 평생 남을 화상을 입는다.

한국식 평등을 생산하는 학교교육

대학만큼은 공정성 실현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한국인의 믿음은 사회 통합을 위한 마지노선 정의가 있다는 점에선 일면 다행이고, 사회 구성원 다수가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선 일면 위태롭다. 나는 성마저 다른 이름의 강사명으로 20년 이상을 학원계에 있었다. 그래서 입시, 편입, 입사라는 인생의 마디에서 수험생들이 느끼는 간절함과 절박함에 익숙해 있다. 그들은 수험기간 내내 초조, 긴장, 불안 등을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버텨낸다. 더 힘들게 버텨낸 사람이 합격 후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전력과 전심을 이토록 시험에 다 쏟아붓는 것일까?

그 무렵의 나는 학원 강사지만 그들의 인생 선배기도 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데 설마 변호사나 의사가 되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났겠냐 하는 말을 했다. 특정 직업인이 되려고 무려 인간씩이나 되는 일은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니 말이다. 그러니까 시험 따위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제도는 가뿐히 넘어가자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씨 좋은 날 나는 로스쿨 입시학원에서 수업하다가 문득 궁금해서 수강생들에게, 경비원도 월 1000만 원 벌고 변호사도 월 1000만 원 번다면 뭐 하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60여 명 되는 수강생 중 경비원 대 변호사가 반반이었다. 이유인즉 같은 월급이면 머리 쓰지 않고 몸을 쓰는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반 정도. 이는 월급 격차만 해결되면 지옥 같은 경쟁구조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과열 직업군은 그 직업을 원하는 사람끼리만 경쟁하면 되니 경쟁의 질도 높아지고 사회적 비용도 절감되는 일거양득인 셈이다. 15년 전 강남의 학원에 다니는 20, 30대가 그랬다.

그 학원에서 나는 몰랐거나 알고 싶지 않아 외면했던 현실 몇 가지에 직면하게 됐는데 그중 하나가 SKY 대학 간의 서열에 따른 학생들 태도였다. 한국의 입시구조상 로스쿨 시행 원년기의 로스쿨 입시학원에는 새로운 제도에 따른 불안과 기대를 품은 수험생들이 대거 몰릴 수밖에 없었고, 상위권 10대 대학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절대 다수인 수강생 비율 중 단연 SKY가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모아놓고 보니 연·고대생이 서울대생 앞에서 위축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연고전이다, 고연전이다, 그들끼리 있을 땐 신나게 떠들다가도 서울대생이 오면 잠잠해졌다. 처음엔 나의 착각인 줄 알았다. 유독 SKY 안에서만 두드러지는 이 기이한 서열 관계, 법학도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더한, 간절히 원했는데 갖지 못한 자가 갖는 열패감이 드러난다. 당시 목격한 몇몇 장면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런 서열 관계는 강의실을 벗어난 로비에서 더 두드러졌고 노래방에도 따라다녔다. 눈치를 본달까, 주눅이 든달까, 물론 나의 당시 경험과 판단이 기우이길 바란다. 그러나 지금의 부모세대가 자녀세대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부모세대는 자신이 공부 못한 핑계를 외부에서 찾을 수 있기에 정신 승리가 가능하다. 소시민인 나 역시 대학만큼은 정신 승리가 잘 되어 있다. '서울대 못 간 거지 안 간 건 아니다. 하지만 나도 집안의 지원만 잘 받았다면 갈 수 있었다' 같은? 그러나 사실은 죽을 만큼 공부해 보지 않았기에 나의 임계점을 알 수 없을 뿐인 그런 정신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토할 만큼 공부해 본 적도, 성적 때문에 불안해서 불면증, 우울증, 공황장애, 기타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을 앓아본 적도, 시험지를 훔쳐서라도 1등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지금의 자녀세대는 살뜰하고 섬세한 부모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받은 덕에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의 한계치를 경험해 버린다. 물적 지원과 심적 격려를 충분히 받았기에 공부 못하는 이유를 외부에서 찾을 수 없고, 그래서 죽어라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란 걸 일찌감치 깨닫는다. 그렇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 남는 건 승자에 대한 경외감, 승자는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체험으로 습득한 논리, 그 논리가 돌고 돌아 결국 세상은 세렝게티의 초원이란 원시시대 생존 방식과 만난다.

이런 위축감과 열패감은 부러움 같은 한가한 정서가 아니다. 나랑은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란 이질감과 두려움을 몸으로 체화해서 습득하는 것, 그것은 공정성을 빙자한 시험제도에 죽어라 매달려본 사람만이 느끼는 공포심이다. 그렇게 해서 정립되는 논리가 학업 성적에 따른 차별, 대학 간판에 따른 차별이 곧 평등이란 인식이다.

서울대 정문. ©왕기리 기자
서울대 정문. ©왕기리 기자

경쟁심, 경쟁률, 경쟁력

한민족의 경쟁심은 유별나다. 그것이 오늘날 K 시리즈를 만들어낸 경쟁력의 원천이기도 하니 나쁘다고만 할 순 없다. 글로벌 세상에서 세계인을 상대로 주목받는 한국인, 한국 상품, 한국 문화를 보며 자긍심을 갖는 것도 사실이니까. 다만 그런 성과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전 국민이 열광하는 미친듯한 경쟁 사회의 산물이란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차라리 제대로 경쟁하게 해 달라는 외침, 공개 경쟁에서 지면 그건 인정하겠다는 자세, 이것이 공정에 대한 타는 목마름의 실체다. 경쟁의 출발선이 다르다느니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느니 그런 약해 빠진 소리 집어치우고 그냥 붙어 보자는 것, 왜냐면 시험이 가장 공정하니까. 이렇게 죽자 살자 덤비니 기득권은 누려 왔던 특권이 아쉽고, 그래서 제도를 이리저리 비틀어가며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치워 본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이 인간 세상도 세렝게티의 초원이라고 믿는 한 제도를 아무리 뒤집고 흔들어 봐야 결과는 똑같다.

그런데 내가 우리 사회에 대해 위기 의식을 더 통렬히 느낀 계기는 만학도로 시작한 대학원에서였다. 수도권이지만 서울이 아닌 대학, 그마저도 원치 않는 학과에 온 학생들은 자신의 학과가 재학생들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총장과 학과 교수들 간의 밀약만으로 폐과되는 순간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놀라웠다! 경쟁에서 반복적으로 패해 본 사람은 자신의 권리가 뭔지 알지 못하고, 권력자가 던지는 작은 먹이에 만족하며 안도하는 습성을 갖게 된다는 것. 이처럼 극한 경쟁을 통해 배우는 것은 층층이 쌓이는 무기력감과 승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삶의 태도다.

더하여 나의 이런 생각에 쐐기를 박게 해준 것이 4년 전 주민센터에서 수업한 청소년 글쓰기 강좌였다. 부천시 지원으로 운영되는 청소년 글쓰기 강좌를 제안받았을 때 나는 살짝 설레기도 했다. 입시나 입사용 논술 강의만 해 온 학원 강사로서 점수 잘 받는 합격을 위한 글쓰기가 아닌, 학생 스스로 원하는 글을 쓰기 위한 수업을 한다는 게 새로웠기 때문이다. 수업은 재밌었다. 당장 성과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도 좋았고, 토론 시간도 시끄러울 정도로 활발했으며, 웹툰 소설 쓰기 시간엔 각자의 덕질을 자랑하며 즐거워했다. 초등학교 5학년생부터 고등학교 1학년생까지 섞여 있어서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도 자발적으로 조성됐다.

그러다가 나의 꿈 쓰기 시간을 가졌을 때였다. 학생들의 꿈이 지나치다 싶게 소박해서 당황스러웠다. 중2 남학생은 간호사가 꿈이었고, 초5 여학생은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게 꿈이었고, 고1 여학생은 수도권 내 미대를 나와 취직하는 게 꿈이었다. 다른 중2 여학생들과 남학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0여 명의 그 학생들은 부천에서 태어났거나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 아이들은 자신의 인생 말년을 비슷하게 예상했는데, 그다지 좋은 대학은 아니어도 적당한 대학 나와 직장인으로 살다가 60세에 시골로 낙향한 뒤 농사지으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래도 괜찮은 건가 싶었다. 10대의 나이에 벌써 지독하게 현실적이고 순응적인 자세로 자신의 미래를 그리는 것 말이다.

어떤 동네의 아이들은 세상에 직업은 의사, 변호사밖에 없는 줄 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낙오하면 인생 패배자가 된 것처럼 좌절한다. 반면 어떤 동네의 아이들은 미리 자기 한계를 설정하고 있어서 좌절하지 않는 대신 애초에 미래를 꿈꾸지도 않는다. 전자는 현실에 좌절하면서 절망감을 쌓아가고, 후자는 현실에 순응하면서 무력감을 쌓아간다.

극한의 경쟁 사회가 강제하는 낮아지는 삶

애초에 사람답게 살겠다고 시작한 학교교육은 그 ‘사람답게’의 ‘사람’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감추고 있었다. 그것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공익으로서의 학교교육에 대한 로드맵들이 오늘날 범퍼카처럼 목적 없이 공론장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 왜냐면 우리 교육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어떻게 살고 싶다는 방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교교육은 마치 그것이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라도 되는 양,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느냐 어느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전부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패배 의식을 시민 의식으로 훈련받는다. 극한의 경쟁을 치르면서 계급과 서열이 확정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강자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전력을 다해 싸워 본 맹수가 처절하게 패배하고 나면 승자 근처엔 얼씬도 못하는 심리, 그렇게 몸으로 익힌 약육강식의 세계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한다. 이들이 약자 배려, 소수자 존중 같은 이슈에 급발진하는 이유기도 하다. 위선이고 허구며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사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규칙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도 안 해 본 사람들이란 멸시와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 사회적 의무 없이 권리만 날로 먹으려 든다는 논리로 무임승차 반대 같은 주장이 나오고 약자 혐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일련의 무리가 모인 곳이 ‘일베’고 오늘날 ‘일베’는 우리 시대를 해석하는 상징어의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반대로 시작부터 경쟁의 상한선을 그어 놓고 출발하는 아이들은 어떤가? 그 애들은 소소한 행복감에 만족하고 자신의 분수에 충실하니 괜찮은 걸까? 맹수가 사는 동네는 아예 가볼 생각조차 안 하니 현명한 걸까? 권력 앞에 순종하고 권위 앞에 순해지니 안전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걸까? 포식자들의 세상은 그들만의 리그이니 피식자들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오늘의 일용할 양식만 얻으면 다행인 걸까? 우리나라 고전문학에서 미덕으로 꼽는 안분지족의 삶이 실현되고 있는 21세기 한국 사회, 이 극한의 경쟁 사회는 저절로 사람을 낮은 데로 임하도록 강제한다.

우리도 그랬다. 교수 자녀는 부모가 재직 중인 대학의 학과에 당연히 입학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친구가 그렇게 아버지가 교수로 있는 명문대에 입학했을 때, 그다지 분노하지도 문제의식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때는 그래도 되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해 바로 그 학교는 교수 자녀 입학제도가 폐지됐다. 특혜에 반발한 학생들의 시위 덕이었다. 그제야 나도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할 수 있었다.

상처는 드러내야 치유된다

인간도 동물이냐 하면 당연히 맞는 말이다.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생물학적 특성을 무슨 수로 부정할까. 다만 인간은 만만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고, 특히 한국인은 더 만만한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 극한의 경쟁구조는 한국을 자살률 세계 1위, 출산율 하락 세계 1위로 만들었다. 생육하고 번식하는 게 모든 동물의 종특 아니었나? 아니다! 한국인을 보라, 초식동물을 낳아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게 하느니 차라리 개체 수를 줄이는 선택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다. 리처드 도킨스를 머쓱하게 만드는 의지적 선택, 인간은 스스로 개체 수를 줄이는 동물이며 심지어 한국인은 종의 멸종도 과감히 진행 중이다. 경쟁에서 이긴 우수한 유전자만 생존시키는 전략, 그것이 작금의 우리가 선택한 대한민국의 미래다.

유별난 경쟁심이 엄청난 경쟁률을 초래해 뛰어난 경쟁력을 발휘하게 만든 반면 경쟁에서 도태된 일련의 무리는 종족 보존이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란 오래된 인류의 믿음을 조용히 반증해내는 현실, 기적 같은 상황이다. 조롱이냐? 아니다! 절대 아니다! 한국인은 참지 않는다는 걸 소리 없이 보여 주는 우리의 민족성에 감탄하는 것이다. 인간의 극악무도한 지구 사용에 지구가 반격을 가하는 요즘 한국인은 솔선수범해서 인구 감축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니까 선진국이다!

조롱 아니라며? 아니다! 절대 아니다! 다만 나만 또는 내 자식만 안전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보자. 인간답게 산다는 게 뭔지 이제는 좀 생각해 볼 시점이 되지 않았는지 묻는 것이다. 세상에 그런 일이 가능할까? 모두가 위험한데 나와 내 자식만 안전한 것, 이런 생각이 나도 내 자식도 위험하게 만들고 있음을 인정해야 지금의 이 백척간두에서 내려갈 수 있다. 지금은 각자도생의 시대, 그러니 이제 본격적으로 각자도생해 보려는 사람들은 한 번 더 생각해 보시길.

물론 나는 이토록 이상하게 경쟁심 강한 한민족과 우리 민족이 이뤄낸 기이한 균형의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다시 태어나도 이보다 더 역동적이며 잠재력 있는 나라에서 살 순 없기 때문이다. 문제 있는 곳에 답이 있다고, 우리는 항상 난해한 문제들을 해결하며 진화해 왔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그만큼 심각한 문제란 이야기는 바로 그 교육에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도 있다는 말이다. 사회 통합을 위한 마지노선 정의가 교육에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아직은 희망적이란 기대를 놓을 수 없는 이유다.

방영미

종교학 박사. 우리신학연구소,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연구위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팟캐스트 팟빵 '종교 모두 까기'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오마이갓 오마이로드"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