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담론

이 글은 <가톨릭평론> 37호(2022년 가을)에 실린 글입니다.

여순항쟁, 침묵과 왜곡의 역사

10월 구봉산 자락은 남해바다를 품고 빨갛게 물들어간다. 시선을 남해바다로 옮기니 1948년 10월 불의와 부당함에 궐기했던 제14연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자락 따라 길게 늘어진 막사는 온데간데없지만, 1948년의 기억을 품은 제14연대의 철조망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22년 10월 또다시 74년 전의 10월을 기록한다.

무자년(1948년) 10월, 제주도 진한 봄 내음이 바다 건너 육지에 내려앉았다. 진한 봄 내음은 핏빛이었다. 제주 인민의 살점을 도려내고 목숨줄을 끊는 시뻘건 핏빛이었다. 시뻘건 핏빛은 야만의 곡조로 육지의 작은 포구에 내려앉았다. 야만의 곡조는 명령이었다. 제주도 애국 인민을 무참히 학살하라는 출병명령이었다. 제14연대 병사위원회는 잔학한 무도함에 분노했고, 끝내 궐기했다. 1948년 10월 19일 밤이었다.

'반란'이라고 했다. 그 족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빨갱이’란 멍에는 70여 년간 순응과 침묵을 강요했다. ‘공산주의자의 사주’라고 난도질했던 정부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이었다. 하지만 강요된 침묵의 시대에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를 따져볼 겨를도 없었다. 오로지 국가에 포섭되었다. ‘반공’이란 이념에 철저히 농락된 왜곡의 역사였다. 이제 국가에 의해 포박되었던 반공이념을 풀어내고 ‘항쟁’이란 관점으로 역사의 신원(伸寃)을 하고자 한다.

여순특별법과 국사 교과서에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이를 줄여 일반적으로 ‘여순사건’이라고 부른다. ‘사건(Incident)’은 역사가 아니다. 여순항쟁은 대한민국의 역사로서 국사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다. 역사라고 하면 그 사건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해 용어(명칭)를 사용하는 것이 역사학자의 태도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여순항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948년 10월의 여순항쟁은 잊혀진 역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2022년 대한민국은 여전히 1948년 여순체제에 묶여 있다. 국가보안법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고, 자기 생각과 다른 이를 ‘빨갱이’라고 부르며 “죽여야 한다. 죽여도 된다”는 구호가 서울 시내 한가운데서 버젓이 울려 퍼지고 있다. 나만 옳다는 적대적 사고가 뿌리내린 잘못된 사회구조는 여순항쟁의 왜곡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도 우린 여순항쟁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미지 출처 = KBS광주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특집] 낙인-여순사건70주년' 동영상 갈무리)
(이미지 출처 = KBS광주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특집] 낙인-여순사건70주년' 동영상 갈무리)

제주도 출병을 거부하다

1945년 8월 15일은 공식적으로 제국주의의 멸망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해방이었다. 해방은 자주독립국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이냐를 두고 격변을 몰고 왔다. 남한은 미군정 실시를 필두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의한 신탁통치 대립과 갈등,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인한 한반도 문제 유엔 상정, 남한만의 5·10총선거 결정에 이르렀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무장봉기가 발발했다. 제주 4·3항쟁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해결되지 않은 제주도 문제는 이승만 정권에게 골칫거리였다. 정부와 미 임시군사고문단은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 겸임)를 설치했다. 이는 기존 경찰 중심의 진압작전(1948년 4월 5일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에서 군인 주도의 초토화 작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위해 여수주둔 제14연대에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며 봉기했다. 제14연대의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이하 ‘병사위원회’)가 발표한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란 성명서는 제14연대가 명령을 거부하고 왜 궐기했는지 잘 보여준 사료다.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병사위원회는 제주도 출동명령이 군인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부당하고 불법적인 명령으로 인식했다. 군인의 봉기는 민중의 합세와 지지가 이어지면서 대중적 실천 저항으로 발전했다. 군이 촉발한 봉기가 전남 동부지역 민중의 대중적 실천운동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정치·대외적으로 분단국가 건설에 대한 불만이 노정되었다. 둘째,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이 만연하고, 반민족행위자가 재등장하면서 사회적 불만이 컸다. 셋째, 미군정에서 이승만 정권까지 경제상황은 민중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당시 민중의 경제적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했다. 그런데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민중의 삶을 외면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배경 때문에 군인의 봉기를 민중이 호응하고 지지하면서 전남 지역을 비롯한 전북·경남 일부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이를 여순항쟁이라고 일컫는다.

제주 4·3항쟁에 이어 여순항쟁은 이승만 정부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를 설치하고 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민간인 학살의 규모를 정부차원에서 조사한 적이 없다. 다만 여순항쟁 1주년이던 1949년 10월 25일 전라남도 당국에서는 1만 1131명이 희생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라남도에 국한한 발표이며, 그 이후 피해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예컨대 일명 부역자 혐의로 체포되어 대전·광주·공주·김천·대구·부산형무소 등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들과 좌익세력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살되었다. 이를 종합하면, 여순항쟁 전체 희생자는 1만 5000명에서 2만 5000명에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여순항쟁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반공국가의 구축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국가보안법과 임시우편물단속법 제정이 대표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안보’란 미명 아래 국민을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이분법적 반공문화를 형성했다. 이는 오랫동안 사회 전반에 내재해 지역민 스스로 ‘반공국민’임을 입증해야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여순항쟁을 왜곡·조작하면서 ‘반란’, ‘빨갱이’란 부정적 인식을 재생산했다.

1948년 10월 말 이후 진압군은 좌익 혐의자를 색출하고, 부대 지휘관의 자의로 혐의자들을 즉결 처형했다. (이미지 출처 = KBS광주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특집] 낙인-여순사건70주년' 동영상 갈무리)
1948년 10월 말 이후 진압군은 좌익 혐의자를 색출하고, 부대 지휘관의 자의로 혐의자들을 즉결 처형했다. (이미지 출처 = KBS광주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특집] 낙인-여순사건70주년' 동영상 갈무리)

여순항쟁, 누구에 의해 조작되었는가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여순특별법’)이 2021년 6월 29일 국회를 통과하고, 2021년 7월 20일 법률 제18303호로 제정되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제주 4·3특별법’)이 2000년 1월 12일(법률 6117호)에 제정된 것과 비교하면 20년이나 늦게 여순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를 두고 발생한 여순항쟁과 제주 4·3항쟁은 역사적 배경을 비롯해 많은 부분이 유사한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여순항쟁의 발발원인은 제주 4·3항쟁과 직접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법 제정과 사건을 둘러싼 인식의 차이가 상당하다. 이러한 근원은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5·16쿠데타 이후 대한민국 사회가 급속도로 군사문화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순항쟁의 발발은 제주도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군인들이 궐기하면서 시작되었다.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산다”는 상하 명령복종 관계의 특수한 신분이란 인식이 사회를 지배했다. 군인이란 특수한 신분에 대한 인식은 제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 출동명령을 왜 거부했는지에 대해서는 따져볼 필요가 없게 했다. 정부는 제14연대 병사의 궐기를 명령 불복종을 넘어 ‘반란’으로 규정했고, 그런 맥락에서 여순항쟁은 기록되었다. 연구도 이러한 인식의 구조를 그대로 답습한 상태로 이루어졌다. 일명 진보학자들도 군사문화의 사고의 틀에 갇혀 군인과 명령복종이란 관계로만 인식하고 치중했다. 군인이란 특수한 신분이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했지만, 여기까지 접근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여순사건’, ‘여순항쟁’ 등의 명칭으로 인해 여순항쟁을 전남 동부 지역, 특히 여수와 순천에서만 벌어진 사건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순항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남 지역과 전북·경남 일부 지역으로 한정할 수 있겠지만, 여순항쟁이 대한민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대표적으로 1948년 12월 1일 제정된 국가보안법이다. 이를 토대로 반공주의를 내세워 반공국가를 공고화했으며, 적대적 사회관계를 형성하면서 이분법적 사회를 창출했다. ‘안보’를 핑계로 간첩사건을 조작하고 시민을 통제·탄압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이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체득되었다.

무엇보다 여순항쟁을 계기로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했으며, 박정희 군사독재정부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사회 전반에 반공주의가 깊숙이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여순항쟁은 부정적 이미지로 재생산되었고, 누구도 함부로 나서서 말할 수 없는 멍에로 남았다. 여순항쟁의 여파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영향과 여파를 실감할 수 있다.

여순항쟁의 부정적 인식과 왜곡에는 국가 주도의 반공교육이 앞장섰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인 1963년 교과 제2차 개편이 이루어진다. 이때 국사 교과서에 여순항쟁이 처음으로 언급된다.

"종전과 더불어 38°선 이북으로 진주한 소련군은 그들의 주구인 공산당을 내세워 전통적으로 추진해 오던 남침정책을 실현하고자 광분하였다. 북한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군의 비호하에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을 거세하고 북한 전역에서 날뛰었다.

유우엔의 결의에 의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의 공산주의자들도 공산 괴뢰 국가를 수립하였고, 전 한국의 공산화를 위하여 남한의 공산주의자를 사주하여 제주도 폭동, 여수·순천 반란 등을 일으키고 각지에 게릴라전을 펴 수다한 양민을 학살하고, 막대한 재산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 문교부, 제2차 교육과정(1963-1973)

1963년의 국사 교과서에는 “전 한국의 공산화를 위하여 남한의 공산주의자를 사주로 반란을 일으켰다”면서 양민학살의 책임을 공산주의자에게 전가했다. 제4차 교과과정 개편에서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공산당이 대한민국을 혼란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고 기술했다. ‘공산주의자=공산당’ 단어를 통해 북한의 사주가 있었다는 것을 거듭했다는 점에서 1963년과 크게 차이는 없다. 다만 별도의 명칭과 한 단락으로 사건의 개념을 설명했다.

‘공산주의자’ 또는 ‘공산당’은 ‘남로당 지령’으로 서술의 변화가 있었지만, 여순항쟁을 공산주의자 소행으로 기정사실화한 교육을 국민은 그대로 믿었다. 이러한 반공교육은 무려 50년 동안 지속되었다. 아니 지금도 인터넷에는 이러한 주장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다양한 형태로 생산·유통되고 있다.

2018년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아 KBS광주가 제작한 '낙인-여순사건 70주년'에 출연한 필자.<br>
2018년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아 KBS광주가 제작한 '낙인-여순사건 70주년'에 출연한 필자.

여순항쟁, 이제 시작이다

2021년 7월 20일 여순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22년 1월 21일 시행령 제정과 함께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이하 ‘여순위원회’)가 출범했다. 아래 인용문은 여순특별법에서 정한 여순항쟁의 정의다.

‘여수·순천 10·19사건’이란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하여,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순천 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시간적 범위가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5년 4월 1일 지리산 입산이 해제된 시기까지다. 무려 6년 6개월(2357일)이다. 공간적 범위가 여수·순천을 비롯해 전남, 전북, 경남이다.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여순특별법 제정은 지역사회와 유족의 지난한 투쟁의 산물이다. 제16대 국회에서 여수 출신 김충조 의원이 발의한 이후로 18, 19, 20대 국회에서도 발의되었으나, 회기만료로 자동 폐기되었다. 여순항쟁 발발 73년 만에 제정된 여순특별법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첫째, 대한민국의 역사로서 인식의 계기가 되었다. 여순항쟁은 대한민국 현대사, 즉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반공주의가 지배하는 토대가 되었다. 국가권력을 동원해서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몰아갔고, 레드콤플렉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처럼 여순항쟁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과 여파가 지대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여순특별법’은 여순항쟁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는 역사적 인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둘째, 적대적 관계 청산을 통한 공동체 복원이다. 여순항쟁에서는 개인의 피해도 컸지만, 지역 공동체의 파괴를 빼놓을 수 없다. 여수와 순천을 넘어 대한민국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적대적 관계를 형성했다. 이는 민간인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배·보상과는 또 다른 문제다. 빨갱이로 공격하는 집단과 빨갱이가 아니라고 방어하는 집단, 이 두 집단은 적대적 관계로 이데올로기의 반목을 지속했다. 여순특별법은 적대적 관계의 이분법적 사회를 청산하고, 미래지향적 대한민국으로 나아가는 분위기를 법적 틀을 마련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셋째, 과거 청산과 유족의 인권 회복이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고귀하다. 어떤 권력도 고귀한 생명을 제멋대로 할 수 없다. 최소 1만 5000여 명에서 최대 2만 5000여 명의 국민이 국가권력에 의해 학살되었다. 피해자 유족은 70여 년을 억울함과 두려움으로 살아왔다. 통곡조차 죄가 되었던 세상이다. 그들에게 국가는 없었고,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가 있었지만, 그 국가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농락된 피해자 유족. 그들은 침묵했으며 자포자기했다. 여순특별법은 천부적 인권을 국가가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는 점을 각인하고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여순특별법의 목적은 “여수·순천 10·19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민주주의 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핵심은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 일이다. 하지만 여순항쟁을 바라보는 인식은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사이에 간극이 매우 크다.

과거청산운동에서 진보진영은 국가권력의 불법적 자행에 대해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한 반면, 보수진영은 진상규명과 평가는 학술적 차원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에 발생한 사건의 경우 ‘이념편향성’을 주입해 사건의 진상규명을 훼손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 지난 과거사 청산운동에서 나타난 경향이다. 2022년 1월 21일 출범한 여순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가 이를 얼마나 극복하고,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제대로 할 것인지는 우리 사회의 관심도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여순항쟁은 혐오의 대상이었고, 대한민국 역사에서 배제되었다. 여순특별법의 혐오와 배제로 얼룩진 여순항쟁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순특별법은 늦어도 너무 늦게 제정되었다. 유족 1세대마저 80대 후반의 고령이며, 생존해 계신 분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환영할 수밖에 없다. 국가차원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처음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순특별법에 주목할 수밖에 없고, 여순위원회의 활동에 모든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여순특별법은 진상규명의 완성이 아니다. 이제 겨우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여순항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대한민국 사회에 미친 영향과 그 여파가 어떠했는지 반드시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주철희

역사를 연구하며 강연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역사연구자이자 ‘함께하는남도학’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분야는 저항운동, 국가폭력, 반공문화 등이며, 특히 여순항쟁을 비롯한 해방정국의 역사 재정립에 진력하고 있다. 저서는 "불량국민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주철희의 여순항쟁답사기" 1, 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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