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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근래 "항쟁" 시각 늘어

이른바 '여순사건' 70주년을 맞아 시민들이 사건 흔적과 기록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짚었다. 

10월 14일과 15일 이틀간 진행된 이 순례는 '열린 군대를 위한 시민연대'(열군)가 "학살을 거부한 군인들"이라는 주제로 마련했다. 

열군은 2014년 4월 창립된 시민단체로 한국사회에서 군대가 광범위하고 깊숙하게 영향을 미치는 현실에서 인권, 민주주의, 평화 등 군과 연관된 활동을 각 현장에서 활발히 하고 있다. 

제주4.3이 일어난 지 70년. 올해 정부와 종교계를 비롯한 각계에서는 공식 추념식을 진행하고 이를 기억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가톨릭교회 역시 제주교구를 중심으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도 특별 메시지를 전해 왔다.

그러나 제주4.3으로 비롯된 또 하나의 비극적 역사, 이른바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사건) 역시 올해 70년을 맞지만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군 반란’으로 왜곡된 이 사건은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6년부터 3년간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여순사건에 따른 민간인 희생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주민 890명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고 밝히고, 희생자와 유족에게 공식 사과할 것을 국가에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2009년 과거사위 조사 결과는 일부지역, 일정기간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만 조사한 것으로 사건의 성격과 전반적 진상은 밝히지 못했다.

그동안 여순사건이 여수 14연대 일부 군인들의 결정으로 일어난 반란이며, 군 봉기 이후 이동하는 과정에서 지역의 우익 인사와 경찰들이 봉기한 군인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사실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식적으로 규명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먼저 학살과 폭력이 있었으므로 ‘항쟁’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이 학계에서도 분분하다.

70주년을 맞아, 여전히 이념의 틀과 왜곡된 규정에 갇힌 사건으로 희생자와 유가족이 목소리를 낼 수 없고,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나 위령제조차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여순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은 하루 빨리 시작되어야 한다.

길 건너 현재는 화약공장이 들어선 당시 14연대 주둔지. 여수시 신월로. ⓒ정현진 기자

70년간 역사가 되지 못한 여순'사건'

‘여순사건’의 현재 공식 명칭은 ‘여수,순천 10.19사건’이다. 그동안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수군란’, ‘여순반란사건’, ‘여순항쟁’ 등으로 불렸지만 전남도와 여수시가 제정한 조례로 공식 명칭이 정해졌으며, 올해 ‘여순사건 70주년 기념 추모사업 시민추진위원회’도 갈등의 여지가 있는 항쟁이나 반란 대신 ‘여순 10.19사건’, ‘여순사건’을 명칭으로 쓰기로 의견을 모았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 군인들이 제주4.3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거부, 봉기하며 시작됐다. 당시 군인들은 제주 출동명령을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정당한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국군의 사명에 맞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의 봉기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의 호응과 정부 토벌대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고, 순천과 전남, 전북과 경남 일부까지 확산됐다. 이승만 정권은 군과 시민 토벌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수천, 수만으로 추정되는 양민이 학살됐다.

여순사건이 진행된 시기와 피해자 수는 아직도 정확하지 않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한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전라남북도와 경남 등 37개 지역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조사됐지만 정확한 피해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남도가 여순사건 1년 뒤 조사한 바에 따르면 희생자 수는 1만 1131명이며, 이후 군법회의에서 즉각 처형되거나 5년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이들,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수감자들 약 3000-5000명, 그리고 보도연맹으로 학살된 이들까지 이르면 약 1만 5000-2만 명으로 추정된다.

만성리 학살지에 세워진 희생자 위령비. 위령비 뒷면에는 '여순사건'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말 줄임표 "......" 만 새겨져 있다. ⓒ정현진 기자

이정표도 없는 역사의 현장들

먼저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오성 이사의 안내로 진행된 답사는 사건 발단지인 당시 14연대 주둔지, 서초당학교, 당시 인민대회가 열린 중앙동 진남관 앞, 만성리 형제묘와 학살지 등으로 이어졌다.

답사 뒤에는 여순사건 연구자인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에게 현재까지 연구 내용과 사료해석 등으로 드러난 사건의 진상, 그리고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들었다.

주 박사는 일어난 직후부터 현재까지 ‘군 반란’이라는 낙인과 이념 논쟁 등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순사건의 본질과 현재까지 정권이 어떻게 ‘사건’을 왜곡해 왔는지 사료를 중심으로 설명했다.

‘여순사건’에 대한 가장 큰 왜곡은 “남로당 출신 일부 군인들의 일탈이었으며, 여수지역 경찰과 우익에 대한 학살이 먼저 자행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철희 박사는 이같은 사실은 사료에 따르면 모두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 왜곡한 사실이며, 군봉기 뒤 이어진 항쟁은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과 피폐한 사회, 정치, 경제적 상황, 남한 단독정부 수립 등에 저항한 민중들의 봉기였다는 것이 철저하게 감춰졌다고 지적했다. 또 경찰과 우익인사 죽음은 이동하는 과정의 교전에서 일어난 것으로 당시 여수경찰서장을 제외한 다른 경찰의 죽음이 학살이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고 설명했다.

여순사건 연구자 주철희 박사가 사료를 중심으로 여순사건의 진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현진 기자

여순사건, ‘반란’과 ‘항쟁’의 경계

주 박사는 여순사건은 “인민들의 항쟁”이었다며, 1948년 10월 19일, 14연대가 봉기하기 전 민중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혼란으로 정권에 대한 불만과 어려움이 어떠했는지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얼마나 반감을 갖고 있었는지 맥락을 살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제시한 자료로 당시 동아일보의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민중들은 70퍼센트가 사회주의 지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68퍼센트 지지, 인민위원회 71퍼센트 지지율을 보였다.

또 경제적 상황은 일제강점기보다 더 큰 수탈로 괴로움을 겪고 있었으며, 정부의 쌀공출 가격은 2368원이었지만, 시장가격은 1만 1192원으로 5배에 달했다.

그는 14연대 군인들은 제주 출병을 거부하고 수도인 서울이 아닌 지리산 입산을 목표로 이동했으며, 민중들은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정부 토벌군에 저항하며, 백운산으로 들어가 저항군을 조직, 1953년까지 싸웠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주철희 박사는 여순사건의 정체성 논란과 관련해 ‘여순사건’의 명칭에서 출발했다.

‘반란’의 사전적 의미는 “정부나 지도자에 반대해 내란을 일으키거나, 사회,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대규모의 집단적 행동”으로 그 목적은 정권 찬탈과 체제 전복으로 권력자 축출과 수도 점령, 후임 권력자 내정, 반란 주도세력의 지위, 오랜 준비 기간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

주 박사는 “반란의 이같은 목적이나 조건으로 볼 때, 여순사건은 그 어디에도 부합되지 않는다”며, “제주도 출동명령 거부는 반란이 아니라 국군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이는 애초 부당한 명령을 내린 부당한 권력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며, 그에 저항한 항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제헌헌법과 군형법은 군인의 책무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으로, 또 군인은 “정당한 명령에 따를 것”을 명시했다며, “그러나 우리는 군인은 어떤 명령이든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고를 정권은 철저히 이용했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 정부가 발표한 계엄령. 현재 여수시 노마드갤러리에서 열리는 '여순항쟁기록전' 전시 내용이다. ⓒ정현진 기자

"여순사건은 인민들의 저항이었다"

10월 19일 14연대 봉기 직후인 10월 20일 약 2000명의 여수 시민이 인민대회에 결집하자 이승만 정권은 언론을 통제하고, 10월 21일부터 병력을 투입, 22일에 여수와 순천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정부는 토벌을 위해 군을 파견하는데 당시 토벌작전에 나섰던 군 지휘관은 대부분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으로 김백일, 송석하, 최남근, 백선엽 등 1939년 항일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창설한 간도특설대 소속 한인군관 출신이다. 10월 22일부터 10월 27일 사이, 토벌군이 여수시내를 완전 진압하기까지 여수 시민들은 5차례의 토벌대 공격 가운데 4차례를 막아 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은 그해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당시 여수 인민위원회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고 활동했는지는 1948년 10월 20일 조직된 인민위원회의 결의안에서 볼 수 있다.

10월 24일자 <여수인민보>에 실린 여수 인민대회 결의안에는 “오늘부터 인민위원회가 모든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우리는 유일하며 통일된 민족 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보위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우리는 조국을 미 제국주의에 팔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분쇄할 것을 맹세한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민주주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모든 비민주적 법령을 무효로 한다. 모든 친일 민족 반역자와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처단한다.”

여수 인민대회가 열린 진남관 앞에 모인 시민은 약 3000-5000명이었다.

당시 봉기한 14연대가 어떤 배경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삼았는지는 그들이 유일하게 남긴 기록인 선언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 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1948년 10월 19일, 제주 출병을 거부하며 14연대 병사들이 내건 호소문. ⓒ정현진 기자

'반란'의 굴레를 벗어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주철희 박사는 여순사건에 대한 특별법이나 진상규명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군사 반란이라는 굴레 때문이라며,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시기 이를 반란이라고 규정한 맥락과 사료를 다시 살펴야 한다며, “사료에만 충실해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얼마나 거짓인지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여순항쟁은 ‘역사’다. 역사를 거시적으로만 볼 수 없고 미시적 관점이 필요하며, 이데올로기가 아닌 역사는 사료를 통한 해석으로 봐야 한다”며, “동학운동과 광주민중항쟁, 87년 항쟁과 마찬가지로 여순사건은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운 항쟁이며, 폭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왜 14연대반란이 아니라 여순반란인가?

주철희 박사는 “당시 14연대의 출동 거부만의 반란이었다면, 그 이름은 14연대반란이라고 했어야 한다”며, “이 이름에서도,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있으며, 이는 이름뿐 아니라 4차례에 걸쳐 항쟁 책임자가 바뀐 것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 박사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극우와 극좌의 합작이라며 그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그 뒤로는 좌익의 책임으로 돌리기 위해 14연대장 오동기를 내세웠고, 이후에는 당시 여수여중 교장 송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967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여순사건의 주동자로 14연대 지창수 상사가 등장한다. 지창수는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반란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상 14연대 봉기 주동자는 우익인사였던 김지회 중위다.

주철희 박사는 ‘여순사건’이 항쟁인 것은 먼저 군이 동족 학살을 부당한 명령이라며 거부했다는 것과 함께, 이후 인민위원회 결정에 따라 시민들이 토벌대에 저항했다는 것이라며, “당시 인민위원회는 전국 70여 개에 조직된 주민 자치조직이었으며, 주도한 세력 역시 좌익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역 특성에 따라 우익이나 좌우협력의 성격을 갖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주 박사는 “국군이 제주4.3 진압을 위한 출동을 부당한 명령이라며 거부한 것을 두고, 정권이 이를 ‘반란’이라고 한다면, 역으로 제주4.3은 정당한 폭력이 된다”며, “이데올로기가 아닌 정확한 사료 해석을 통해 본다면 ‘여순사건’은 항쟁이며 역사다. 권력자가 아닌 피해자의 시선, 주체적 민중의 시선, 사료를 통해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8년 10월 미국 <라이프> 도쿄지국장으로 여순사건을 취재한 칼 마이던스 기자의 현장 사진을 그림으로 옮겼다. 마이던스 기자는 그해 12월 여순사건 기사를 기고하고 1955년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눈에 비친 그 이상의 것"이라는 책을 냈다. ⓒ정현진 기자

마지막 날, 이들은 ‘여순사건’ 유가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작은 아버지, 친형 등을 잃었던 이들은 무엇보다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에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 달라고 호소했다. 유족회는 시민단체와 함께 특별법 통과를 위한 청와대 청원을 시작할 계획이다.

그동안 여순사건 특별법은 2001년 처음 발의된 뒤, 올해까지 5번 추진됐지만 모두 사건 성격을 반란으로 규정한 탓에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무산되거나 통과되지 못했다.

올해 민주평화당 이용주 의원이 10월 2일 여순사건의 성격 규정을 새롭게 하고 피해기간과 그 범위를 정하는 내용으로 새 법안을 제출했다.

이 의원은 여순사건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14연대 ‘반란’을 ‘봉기’로 고치고, “부당한 국가 명령을 거부했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또 피해 기간과 종료일을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이전으로 정한 것에서 나아가 한국전쟁 뒤 ‘빨치산 완전 진압’을 선언한 1955년 4월 1일까지로 확대했다.

1박2일의 일정을 함께한 참가자들은 무엇보다 최대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여순사건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희생자들의 무덤이 그대로 남아 있음에도 그 흔적이 보존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 또 ‘반란’이라는 규정으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못했지만, 오늘날 부당한 권력에 반기를 들었다면 그 ‘반란’ 역시 새로운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이들은 무엇보다 정권에 의해 왜곡된 역사적 사실이 언론을 통해 그대로 박제된 현실도 지적하고, 여순사건만의 진상규명뿐 아니라 역사를 알고, 바라보는 태도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만성리 형제묘. 1948년 10월 26일부터 토벌군은 주민들의 가담 여부를 심사하고 처결한다. 형제묘에는 여수와 각 지역의 좌익인사, 가담자를 즉결처형해 묻은 곳이며, 아직도 125명의 희생자가 묻혀 있다. ⓒ정현진 기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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