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매달 첫 번째 금요일에 '북경 천주당 기행'을 연재합니다. 중국 베이징과 톈진, 그리고 허베이성 내의 주요 성당을 답사하고 그 역사와 이야기들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오현석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베이징에 있는 동당, 왕푸징교당이라고도 한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br>
베이징에 있는 동당, 왕푸징교당이라고도 한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천안문(天安門) 앞,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로가 있다. 창안다제(長安大街)다. 그 대로의 동편, 동창안제(東長安街)에 왕푸징(王府井)이 있다. 북경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다. ‘왕부’(王府)는 명청시대 귀족의 저택이다. 한 시절, 그곳에는 화려한 저택들이 모여 있었다. 갖가지 상점들이 늘어서고 관청도 생긴다. 남쪽에는 우물(井) 하나가 있었을 게다. 왕부정(王府井). 한마디로 ‘잘나가는’ 동네라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 거리는 ‘잘나간다’.

허나 그 거리도 저녁을 지나 밤이 내리면 서서히 잦아든다. 어둑해진 그곳에서 나는 모디아노를 떠올리곤 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Je ne suis rien.) 스물의 여름, 그 첫 문장에 나는 마법처럼 이끌렸다. 그 시절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생의 빛은 먼 데서만 반짝이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서른아홉. 북경의 낯선 거리에서 나는 다시 모디아노를 떠올리고 있었다. 청춘도 아니고 중년도 아닌 나이. 서른아홉에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었다. 떠나온 길은 언제나 떠나갈 길보다 깊다. 그래서일까. 화려한 낮보다 스산한 밤의 왕푸징을 나는 더 좋아했다. 어둑한 상점들, 하나 둘 지나면 이내 거리의 끝에 이른다. 거기에 오래된 성당이 하나 있다. 동당(東堂). 지금의 왕푸징교당(王府井敎堂)이다.

동당의 시작

옛 동당의 자취는 17세기의 두 선교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루도비코 불리오(Ludovico Buglio, 利類斯, 1606-82)와 가브리엘 드 마갈량이스(Gabriel de Magalhães, 安文思, 1609-77)다. 동당에 가 보려는 이들은 이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게 좋다. 불리오는 더욱 그렇다. 그는 탁월한 번역자였다. 그는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초역했다. 한문본 "초성학요"(超性學要)다. 또한 미사 경본, 성무일도, 전례서의 라틴어를 우아한 문언문 중국어로 바꾸었다. 그가 처음이었다. 무려 24년에 걸쳐 해낸 일이다. 하지만 동당의 시작은 그의 업적만큼 찬란하지 않다. 옛 동당의 첫 페이지에는 선교사들 사이의 갈등이 배어 있다. 불리오와 마갈량이스는 아담 샬과 반목했다. 그 갈등의 내막을 들추려면 쓰촨에서 두 사람이 겪은 일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루도비코 불리오의"초성학요"(1654-), 프랑스국립도서관소장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중국어로 번역한 책이다.1654년, 신학대전 제1부의 일부를 번역하여 출판한다. 그 이후 1678년까지 25년 동안 번역했지만 제1부와 제3부의 일부만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미지 출처 = gallica.bnf.fr)

불리오, 쓰촨(四川)의 첫 번째 선교사

불리오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사람이다. 16살에 예수회에 들어가 로마대학에서 공부했다. 선교지로 떠나기 전, 3년 동안 인문학을 가르쳤다. 1635년, 그는 중국으로 떠나는 배에 오른다. 그 배에는 선교사 2명이 더 있었다. 브란카티(Francesco Brancati, 潘國光, 1607-71)와 그라비나(Jérôme de Gravina, 賈宣睦, 1603-62)다. 1636년, 그들은 마카오에 도착하고, 이듬해 1월에는 내륙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북쪽으로 이동했다. 북쪽 끝에는 황제가 있었다. 그들의 여정이 언젠가는 닿아야 할 곳이었다.

그러나 난창(南昌)에서 불리오는 걸음을 멈춘다. 푸르타도(Francisco Furtado, 傅汎際, 1587-1653)의 지시였다. 그는 북방 지역 선교 책임자였다. 그의 지시로 불리오는 난창에 머물며 중국어를 배운다. 당시 그에게 중국어를 가르친 이는 페레이라(Francisco Ferreira, 費藏裕, 1604-52) 수사다. 그는 처음부터 마카오 사람이었다. 포르투갈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가 그의 계보다. 불리오는 대단한 열의로 중국어를 배운다. ‘17세기 예수회의 가장 뛰어난 한학가(漢學家)’. 후세의 평가다. 난창에서의 3년은 그 밑거름이었다. 1640년, 그는 강남(江南)을 거쳐 쓰촨 청두(成都)에 이른다. 유럽인 선교사가 쓰촨에 디딘 첫발이었다.

마갈량이스와 만나다

마갈량이스가 청두에 도착한 것은 1642년이다. 생소한 듯 보이는 그의 이름은 사실 그리 낯설지 않다. 스페인어로는 마가야네스(Magallanes), 영어로 표기하면 마젤란(Magellan)이 된다. 지구를 일주한 항해사의 가문. 마갈량이스는 포르투갈의 그 유력한 가문 출신이다. 1634년 고아(Goa)에 도착한 후, 그는 줄곧 머물러 있었다. 수사학을 가르치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는 일본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마카오에 이르자 순찰사 신부가 그를 붙잡았다. 중국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마침 항저우(杭州)로 돌아가는 중국인 관리가 있었다. 1640년, 마갈량이스는 그를 따라 항저우에 입성한다.

한편, 불리오는 청두에서 병을 얻는다. 그를 도울 이는 없었다. 드넓은 쓰촨에서 그는 단 한 명의 사제였고 단 한 명의 유럽인이었다. 푸르타도 신부는 마갈량이스에게 쓰촨 선교의 빈자리를 채워 줄 것을 제안한다. 그는 서둘러 항저우를 떠났다. 1642년 8월 28일, 청두에 닿는다. 불리오의 지도로 그는 중국어를 배웠고 곧 상당한 실력을 갖추게 된다. 이후 35년 내내 그들은 함께했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그들의 관계는 그 어느 것보다 단단해져 갔다.

마갈량이스의 "중국보고서"(1668), 프랑스어 번역. 프랑스 릴 대학 도서관 소장본. 중국의 언어, 문화, 역사, 풍속 등을 주제별로 나누어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영어 번역본의 제목은"A New History of the Empire of China". (이미지 출처 =&nbsp;nordnum.univ-lille.fr)&nbsp;<br>
마갈량이스의 "중국보고서"(1668), 프랑스어 번역. 프랑스 릴 대학 도서관 소장본. 중국의 언어, 문화, 역사, 풍속 등을 주제별로 나누어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영어 번역본의 제목은"A New History of the Empire of China". (이미지 출처 = nordnum.univ-lille.fr) 

쓰촨 선교, 장헌충, 그리고 갈등의 발단

쓰촨 선교는 관료와 문인을 만나는 일로 시작되었다. 류우량(劉宇亮)의 지지는 큰 힘이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청두 인근의 몐주(綿竹) 출신으로 명 조정의 요직을 거쳤다. 그의 주선으로 불리오는 청두와 주변 지역의 모든 관료에게 소개되었다. 낯선 유럽인 선교사의 존재는 지역 사회에 크고 작은 사건을 만들어냈다. 신자들이 차츰 늘어갔지만 그만큼 반대의 목소리도 컸다. 하지만 그건 전조일 뿐이었다. 장헌충(張獻忠)의 군대가 들이닥치기 전까지 말이다.

명말은 혼란한 시기였다. 곳곳에서 민란과 반란이 이어졌다. 장헌충의 반란군은 한때 60만을 넘었다. 그의 세력은 폭풍처럼 휘몰아쳤고 이내 쓰촨까지 진출했다. 1644년 8월, 청두에서 그는 ‘대서’(大西)라는 국호를 선포한다.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그는 극악한 ‘도살자’로 표현된다. 과장이 있지만 그가 많은 사람을 죽인 건 분명하다. 어쨌든 새로운 나라가 섰으니 새로운 조정이 필요했다. 청두의 고위층에게 두 유럽인 신부는 이미 유명 인사였다. 장헌충이 그들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는 신부를 붙잡아 오게 했다. 두 신부에게 그는 ‘천학국사’(天學國師)라는 칭호를 내린다. 신부는 거절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강제로 대서국의 관리가 된다. 천문을 맡아 보는 자리였다.

이 사건의 후과는 컸다. 이후 그들이 북경에서 겪을 고초의 원인이었고, 아담 샬과 갈등하게 되는 단초였다. 왕푸징 거리의 동당은 그 갈등 속에서 빚어진 공간이었다.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 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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