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샬 신부는 예수회원입니다. 네 가지 계율을 굳게 지키겠다고 서약한 사람입니다. 만약 회칙에 따라 내린 경고가 소용없다면, 그가 뉘우침을 모르며 규율에도 순종치 않는 것이니 예수회에서 제명해야 합니다.”

격화되는 갈등

1649년 5월 20일, 푸르타도(Francisco Furtado, 傅汎際, 1587-1653)가 작성한 보고서의 결론이다. 마갈량이스(Gabriel de Magalhães, 安文思, 1609-77)가 기초하고 푸르타도가 최종 정리했다. 여기에 불리오(Ludovico Buglio, 利類斯, 1606-82), 롱고바르도(Niccolò Longobardo, 龍華民, 1565-1655), 페라리스(Giovanni Francesco Ronusi de Ferrariis, 李方西, 1608-71)가 동조했다. 모두 북경에 있던 예수회원이다.

다섯 명의 신부가 서명한 보고서는 항저우(杭州)로 보내진다. 수신인은 소(少) 디아스(Manuel Dias, junior, 陽瑪諾, 1574-1659). 중국 선교지의 책임자였다. 보고서는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의 잘못을 11가지로 나열한다. 교회와 수도회가 금지한 관직을 받았고, 교황과 직속상관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9월 6일, 마갈량이스는 더욱 상세한 보고서를 완성한다. 무려 36쪽, 부록까지 더하면 38쪽이다. 촘촘히 써내려간 라틴어 문장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샬을 공격한다. 흠천감정의 직위와 업무가 수도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 샬의 사생활에 관한 나쁜 소문들도 더했다. 그는 10가지 이유를 들면서 샬의 사임을 요구했다. 10월 30일, 이 글은 푸르타도에게 전해졌고, 곧장 로마로 날아갔다.

아담 샬의 초상화. 키르허의 "중국도설"(China Illustrata, 1667) 중에서. (이미지 출처 =&nbsp;picryl.com)<br>
아담 샬의 초상화. 키르허의 "중국도설"(China Illustrata, 1667) 중에서. (이미지 출처 = picryl.com)

아담 샬의 대응

선교사들은 동요했다. 이 논쟁에서 샬의 편에 선 이는 소수였다. 처음에는 그라비나(Girolamo de Gravina, 賈宣睦, 1603-62), 브란카티(Francesco Brancati, 潘國光, 1607-71), 스모굴레츠키(Jan Mikołaj Smogulecki, 穆尼閣, 1610-56) 정도만이 샬을 지지했다. 브란카티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는 샬을 옹호하는 글을 연이어 예수회 총장에게 보냈다. 반대 입장에 있었던 롱고바르도, 유보적이었던 마르티니(Martino Martini, 衛匡國, 1614-61)는 나중에 지지로 돌아선다.

1649년 11월 4일, 샬이 직접 해명에 나선다. 그는 예수회 고문들에게 서신을 보낸다. 처음으로 자신을 변호한 글이었다. 허나 그의 소명은 충분치 않았다. 마갈량이스의 고소 내용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편지 한 통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1652년 3월 7일, 샬은 장문의 편지를 완성한다. ‘변명서’(Grande Apologie)다. 흠천감에 관련된 의혹을 해명한 글이었다. 흠천감의 업무가 점술과 관련 있고, 미신적 요소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는 의혹이었다. 국가 행사나 의례 전에, 그 일(日)과 시(時)를 정하는 것. 이 역시 흠천감의 소관이었다. 때의 길흉을 고려해야 하는 일이었다.

로마의 대답

서신이 바다를 넘나들었다. 반대와 옹호의 말들이 넘쳤다. 논쟁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샬의 우군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확고한 지지자 한 사람이 있었다.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 1623-88)였다. 그는 1660년에 북경에 왔다. 샬은 그를 흠천감 조수로 기용했다. 그는 샬의 유일한 제자였다. 그리고 이내 절친한 ‘동지’가 되었다.

1661년, 페르비스트는 스승을 변호하는 글을 쓴다. 샬의 ‘변명서’를 상세하게 발전시킨 글이었다. 중국인의 달력에 표시된 신령들(esprits)의 의미, 그리고 시간의 질서인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설명했다. 이것이 천주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음도 역설했다. 설득력 있는 글이었다. 페라리스는 그 글에 감탄했다. 그는 샬의 반대자였다.

로마는 이 문제를 심의했다. 로마대학 교수로 구성된 위원회였다. 1664년 1월 31일, 결론이  나온다. “중국인의 달력에 미신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흠천감정은 그에 대한 책임이 없다. 또한 흠천감의 역법 관련 업무 역시 문제가 없다. 샬은 흠천감정의 직위를 유지할 수 있다.” 교황의 최종 승인은 4월 3일에 발표된다. 당시 교황은 알렉산데르 7세(Alexandre VII)였다.

(왼쪽부터) 조지 듄(George H. Dunne)의 "거인의 시대" 한국어판, 알폰스 바스(Alfons Väth)의 "아담 샬 전기"(1933), 조제프 뒤르(Joseph Duhr)의 "아담 샬 전기"(1936).&nbsp;이 책들은 모두 예수회 신부의 저술이다. 아담 샬을 지지했던 브란카티의 보고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의 서술에서 마갈량이스는 원한에 찬 선동꾼이었다. (표지 출처 = 지식을만드는지식, STEYLER VERLAG, DESCLEE DE BROUWER)
(왼쪽부터) 조지 듄(George H. Dunne)의 "거인의 시대" 한국어판, 알폰스 바스(Alfons Väth)의 "아담 샬 전기"(1933), 조제프 뒤르(Joseph Duhr)의 "아담 샬 전기"(1936). 이 책들은 모두 예수회 신부의 저술이다. 아담 샬을 지지했던 브란카티의 보고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의 서술에서 마갈량이스는 원한에 찬 선동꾼이었다. (표지 출처 = 지식을만드는지식, STEYLER VERLAG, DESCLEE DE BROUWER)

소문의 벽

흠천감 관련 논쟁은 사실 쉬운 매듭이었다. 그건 논리와 근거로 맞서는 문제였다. 하지만 샬이 수도자의 계율에서 벗어났다는 혐의. 이는 엇갈린 진술만이 난무했다. 출구를 찾기 어려운 갈등이었다. 마갈량이스는 샬의 생활방식을 비판한다. 자신의 저택을 소유하고, 고관들을 수시로 접대하며, 값비싼 선물과 유흥을 즐긴다. 청빈의 의무와는 동떨어진 생활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간다. 샬이 동성애를 즐긴다고 넌지시 기술한다.

샬은 중국인 집사를 두고 있었다. 반진효(潘盡孝)라는 이였다. 그는 샬의 거처인 남당(南堂)을 관리했다. 샬은 그를 스스럼없이 대했다. 게다가 샬은 반진효의 아들을 자신의 손자로 입양한다. 순치제의 명령이었다. 탕사홍(湯士弘). 순치제가 아이에게 내린 이름이다. 당시 관습상 후사가 없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 순치제가 독처하는 샬을 배려한 것이다. 샬은 탕사홍을 매우 아꼈다. 반진효 일가는 자연스럽게 샬의 가족이 되었다.

수도자에게 가족이라니! 적절치 않은 행동이었다. 마갈량이스는 샬과 반진효의 관계를 의심하는 소문을 접한다. 신자들이 보기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해 보였다. 샬은 반진효를 동료 선교사들보다 훨씬 더 가까이했다. 샬은 그를 평등한 관계처럼 대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그리한 듯하다. 하인과 주인이 평등한 관계라니. 더구나 샬은 청 조정의 고위 관료였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샬의 사생활 관련 소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진위가 어떻든 수도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말들이었다.

내부조사보고서

진상조사가 시작된다. 1653년, 중국 선교지의 책임자 디아스는 브란카티를 북경에 파견했다. 당시 그들은 강남(江南)에 있었다. 브란카티는 북경에 머물면서 고발 내용을 조사했다. 결론은 이러했다. “아담 샬의 명예에 관한 일체의 공격은 모두 악의를 품은 자들의 헛소문입니다.” 마갈량이스는 원한에 찬 선동꾼일 뿐이었다.

이 결론이 지금까지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부분의 연구가 샬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까닭이다. 샬의 전기는 예수회원이 집필한 것이 많다. 19세기의 피스터(Louis Pfister)를 비롯해, 20세기의 바스(Alfons Väth), 듄(George H. Dunne) 등이다. 샬의 전기 자료를 찾으면 반드시 이들의 이름이 있다. 그만큼 널리 인용된다는 뜻이다. 그들 모두 샬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샬이 급하고 괴팍한 성격이라 오해가 쌓인 것뿐이라고 서술한다.

이렌느 피(Irene Pih)의 마갈량이스 전기(1979). 책의 부록에는 마갈량이스의 편지가 실려 있다. 이 연구서는 마갈량이스를 새로운 눈으로 읽게 한다. (표지 출처 = Fundação Calouste Gulbenkian, Centro Cultural Português)<br>
이렌느 피(Irene Pih)의 마갈량이스 전기(1979). 책의 부록에는 마갈량이스의 편지가 실려 있다. 이 연구서는 마갈량이스를 새로운 눈으로 읽게 한다. (표지 출처 = Fundação Calouste Gulbenkian, Centro Cultural Português)

진실은 어느 쪽에?

하지만 달리 보는 이들도 있다. 1979년, 이렌느 피(Irene Pih)는 마갈량이스 전기를 출판한다. 책의 부록에는 마갈량이스의 편지가 실려 있다. 모두 7편이다. 6편은 포르투갈어, 1편은 라틴어다. 처음 공개된 자료였다. 이렌느의 연구를 먼저 주목한 이는 중국인 학자였다. 진궈핑(金國平)과 우즈량(吳志良)이다. 이들은 마갈량이스의 고소가 신빙성 있다고 본다. 기존의 결론과는 다른 해석이었다. 이를 토대로 탕카이젠(湯開建), 샤보쟈(夏伯嘉, Ronnie Po-Chia Hsia) 등은 예수회가 그 사건을 무마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탕카이젠은 말한다. 마갈량이스가 속이 좁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사실을 날조해 샬을 모함했다고 보는 건 지나치다.

샬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순치제가 그를 매우 총애했다. 그는 중국 선교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1653년 조사보고서는 브란카티의 작품이다. 그는 처음부터 샬을 지지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샬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그것도 여러 차례다. 소 디아스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굳이 브란카티를 조사관으로 보낸 이유일 수 있다. 사건의 진상보다는 중국 선교의 안정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누구 말이 옳을까? 진실은 알 수 없다. 엇갈리는 진술만 있을 뿐이다. 한쪽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면, 진실은 그 엇갈림의 사이 어디쯤에 있을 게다.

(다음 글에서 계속.)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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