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과 희망을 돌아보기 딱 좋은 1월

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언제부터 임인년이지?

“임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호랑이의 기상을 본받아 새로운 한 해를 힘차게 시작합시다.” 이런 말들을 주고받은 지 보름이 지났다. 그런데 2주가 지나면 다시 설을 맞는다. 또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때 다시 호랑이가 등장하겠지. 십간의 임은 음양오행으로 검은색이고, 십이지의 열두 동물 가운데 인은 호랑이니, 임인년은 검은 호랑이띠의 해라는 설명이 난무하리라.

갑자년에서 계해년까지 육십 년을 단위로 하여 한 해의 이름을 정하는 방식은 음력 달력에서 사용한다. 그래서 음력으로 설이 되어야 임인년이 시작되는 셈이다. 이렇게 헤아리면 아직 남은 2주는 신축년이라고 불러야 맞다. 어쩌면 더 깐깐하게 따지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밤이 가장 긴 동지가 한 해의 끝이고 동지가 지나면 새해가 시작되므로 이미 임인년이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계절의 운행을 보면 입춘이 한 해의 시작이므로 음력으로 설을 지내고도 입춘이 되어야만 임인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므로 그냥 넘어가자.

(이미지 출처 = Pixabay)

양력과 음력

요즘은 양력으로 많이 기울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음력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여럿 있다. 개인의 생일을 음력으로 지내는 경우도 많고, 설과 추석 등의 명절도 음력으로 지낸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양력으로만 지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국 역시 음력 1월 1일 무렵을 춘절이라 부르며 고향에 가서 가족과 보내는 풍습이 있지만, 나머지는 다 양력으로 지낸다. 이 양력과 음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양력은 그레고리오력이며 음력은 시헌력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가지 달력 모두 예수회원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각각 로마의 예수회 신학교 콜레지움 로마눔의 수학, 천문학 교수였던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1538-1612)와 중국 선교사로 오래 활동한 요한 아담 샬 폰 벨(1591-1666)이 관여하였다.

클라비우스가 선종한 이듬해인 1613년에 아담 샬이 콜레지움 로마눔에 입학했기 때문에 아담 샬이 클라비우스에게 직접 배울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비우스의 제자였던 크리스토프 그린베르거(1561-1636)가 스승의 뒤를 이어서 1612년부터 콜레지움 로마눔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아담 샬은 그린베르거의 학생이었다. 아마 아담 샬은 그린베르거를 통하여 클라비우스의 수학과 천문학에 관한 지식을 배웠을 것이다.

 

클라비우스와 그레고리오력

양력은 태양의 운행 주기를 중심으로 시간을 구획한다. 로마 제국에서는 카이사르 율리우스가 제정한 양력 달력을 사용했다. 그런데 율리우스력에서 정한 1년에는 11분이라는 작은 오차가 있었다. 128년에 하루 정도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오차 때문에 부활절을 계산하는 기준이 되는 춘분 날짜가 오락가락한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에는 예수의 부활이 유월절 축제 다음의 일요일에 일어났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 축제는 유대 달력의 1월(요즘의 3월이나 4월)인 니산 월의 초승달이 보이기 시작한 후 14일째에 시작된다. 즉 보름이 지난 후 일요일에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기준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 낮과 밤의 길이가 거의 같고 만물이 소생하는 시절인 춘분이 추가되면서 325년 니케아공의회에 와서 ‘춘분 -> 보름달 -> 일요일’이라는 공식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율리우스력의 오차 때문에 춘분 날짜가 128년마다 하루 당겨졌다. 1582년이 되자 3월 11일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클라비우스를 위원장으로 하는 달력위원회를 구성하여 해결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클라비우스는 율리우스력보다 좀 더 정확하게 1년을 계산하였다. 이제 3300년에 하루의 오차가 생길 정도로 정교해졌다. 그리고 춘분 날짜를 3월 21일로 고정하기 위하여 1582년 10월 4일 다음 날을 10월 15일로 정해서 열흘의 날짜를 달력에서 삭제하기로 하였다. 교황은 1582년 2월 24일 칙서를 반포하고 새로운 달력을 보급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양력이다. 그레고리오력이라 불리지만 클라비우스의 작품인 셈이다.

 

아담 샬 폰 벨과 시헌력

유럽의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달력을 만들 때는 성탄과 부활의 날짜를 정확하게 지정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였다. 반면에 동아시아에서 달력은 국왕의 주된 관심사인 백성들에게 농사의 때를 알려주는 일, 일식과 월식 등 천체의 운행을 예측하는 일 등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늘의 아들로서 하늘의 명을 받아서 하늘 아래의 모든 곳을 다스리는 천자만이 달력을 만드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천자는 제후들의 나라에 달력을 나누어 주었다. 조선도 명나라와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달력을 받아서 썼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달력 제작의 원리를 진작부터 독자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미리 달력을 만들어 놓고 형식상으로만 중국 천자에게 달력을 받아오는 의례를 거행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쓰던 달력인 대통력은 일식을 예측하는 데 오류가 많았다. 북경에 들어온 예수회원들은 스승 클라비우스에게 배웠던 서양의 천문 계산법을 소개하고, 일식과 월식을 정확하게 예측하여 그 우수성을 과시하였다. 특히 아담 샬은 서광계와 함께 서양 천문 계산법을 사용하여 달력을 새로 만들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1644년 5월 북경을 점령하자, 아담 샬은 청나라 조정을 설득하여 새로운 역법을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1644년 10월에 이듬해 달력인 1645년 시헌력을 반포하였다. 중국에서 시헌력은 청나라 말기까지 사용되었다. 조선은 매년 동지 무렵에 사신을 보내어 중국 천자를 알현하고 이듬해 달력을 받아와서 사용하였다. 하지만 시헌력의 원리를 파악하여 자체적으로 달력을 제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1652년 동지사가 북경에 가서 1653년 달력을 받아왔는데 이것을 국내에서 미리 제작해 놓은 역서와 맞추어 보고 일치한다고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1653년 1월에 이듬해인 1654년 역서부터 시헌력을 채택하였다. 오늘날 달력 날짜 밑에 작게 쓴 숫자는 시헌력에 따른 음력 날짜다. 아담 샬 폰 벨이라는 예수회 선교사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질서 정연한 시간과 의미 충만한 시간

우리의 삶은 정교한 역법으로 구획한 시간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들은 따로 존재한다. 성탄과 부활도 그중의 하나다. 한 해가 끝나고 다시 한 해가 시작하는 시간, 즉 설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신년을 맞는 축제는 12월 31일 밤부터 1월 1일 아침까지 펼쳐진다. 매년 돌아오는 깨끗하고 새로운 해를 맞기 위하여 과거의 지저분하고 낡은 시간을 없애버리는 의례들이 벌어진다. 밤새 떼를 지어 거리를 쏘다니며 소란을 피우기도 하고, 쇠약해진 기성 질서의 권위를 허물고 새롭고 싱싱한 생명력을 움 틔울 목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시하는 가치를 일부러 허물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새날을 맞는 것이다.

그레고리오력의 새해는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헌력의 새해는 오지 않았다. 아직 미래의 일이다. 양력 설날과 음력 설날의 간격이 벌어진 만큼 새해를 맞는 기간도 덩달아 연장되었다고 생각해보라. 한 달 동안 신년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이 기간에는 조금 게을러도 크게 탈이 나지 않는다. 또 새해에 들어서 다짐했던 각오를 망쳤어도 괜찮다. 설이 곧 또 오니까 다시 하면 된다. 게다가 코로나 시절이 가져다준 새로운 가치관은 우리에게 아프지 않기 위하여 빈둥거릴 이유를 제공한다.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다가 한 번쯤 시간이라는 기이한 피조물에 대해 생각을 해 보는 것도 좋다. 새로 시작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아직 새로 시작하지 않은 시간이 이번 1월 한 달이다. 그래서 시간의 시작에 대해서 사색하기 좋은 시간이다. 그럴 때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 제11권을 펼쳐서 읽으면 좋다.

과거라는 시간은 나에게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미 지나가 버렸나?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다. 내 기억과 회상의 시간 속에 존재한다. 지난해 내가 저질렀던 어리석은 일과 부끄러운 일은 내 기억의 시간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새해에는 되풀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또 미래는 나에게 무엇인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다. 지금 내가 품고 있는 희망과 기대 속에 현존한다. 그러므로 올해 내가 꿈꾸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할 수 있다. 그러니 설이 두 번 차례로 지나가는 요즘은 시작을 되새기며 반성과 희망을 돌아보기 딱 좋은 시기다.

 

조현범(토마스)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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