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김우중 신부
ⓒ김우중 신부

한국 교회사의 일대 사건

내 본업은 19세기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 지난 9월 1일에 순교복자의 유해가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교계 안팎의 언론지상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 주인공은 1791년 신해박해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이다. 그들의 유해가 전주교구 초남이 성지 근방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보도를 접한 학계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한국사를 전공하는 어느 후배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백자 사발 지석의 명문 판독, 치아와 골화도 조사를 통한 해부학적 검사, Y염색체 부계 확인 검사 등이 동원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유럽의 학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장관이며 학문상으로도 일대 사건이라는 것이다.

유해는 어떻게 해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까? 정말로 순교복자들의 유해가 맞을까? 거기에 묻혀 있는지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순교복자들의 유해를 찾아내는 일이 왜 중요할까? 이런 궁금증을 가진 독자들을 위하여 교계 신문이나 일반 언론들은 친절한 해설 기사를 많이 실었으니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언론지상에 보도된 내용을 거듭해서 말할 필요는 없겠다.

그렇다고 세 분 순교복자의 생애, 신앙 활동, 순교 행적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것 역시 지면의 제약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 지난 2014년 8월 16일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서 124위 순교자의 시복식이 거행된 이후 순교복자들, 특히 윤지충과 권상연을 칭송하고 기리는 글이나 인터넷 동영상은 많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다만 9월 1일에 쏟아진 보도 기사들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 하나, 그리고 교회사와 관련하여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희망 하나를 이야기하고 싶다.

첫째 이야기: ‘최초’ 순교자라는 말

보도 기사들의 제목을 훑어보면 대체로 이렇게 시작한다. “한국 교회 첫 순교자 무덤, 유해 찾았다.”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 유해 230여 년 만에 발견하였다.” “한국 교회 첫 순교자 유해 230년 만에 찾았다.” “유해에서 ‘예기 손상’ 발견, 참수형과 능지처사의 확실한 증거.”

왜 이렇게 ‘첫’ 또는 ‘최초’라는 수식어를 강조하는 것일까? 물론 기자들이 그렇게 썼다기보다는 기자회견을 연 전주교구에서 그런 의미를 지니는 일이라고 설명하였을 것이다. 만약 최초라는 말을 내세우려면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근거 혹은 이유도 제시했어야 하지 않을까? 1791년에 순교한 두 분의 복자가 첫 순교자라면,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천주교 신자, 김범우 토마스와 이벽 요한 세례자는 순교자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일까?

1785년 을사년의 일이었다. 음력으로 3월 초아흐렛날, 양력으로 4월 17일 주일에 신자들이 김범우의 집에 모여서 신앙 집회를 열었다. 드나드는 사람들을 수상하게 여긴 형조 관헌들이 집을 덮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 일로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았고 그 뒤에 숨을 거두었다. 또 이벽은 집안에 감금당한 상태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당했으며, 계속된 가정 박해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에 속하며 지금 시복 시성 청원 대상자 명단에 올라 있다.

물론 최초 순교자라는 말에 대해서 준비된 대답이 있을 것이다. 신앙을 고백하고 스스로 자기 의지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을 순교자라 부른다. 그리고 조선 정부의 공식 기록에는 윤지충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남긴 말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이런 점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조선인 신자 가운데 처음으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한 분들이어서 첫 순교자라 하는 것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박해시대 조선 교회사와 순교자 역사를 정리하였으며 병인박해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 주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일이다. 다블뤼 주교가 남긴 기록을 보면, “이것이 천주교인에 대한 공식적인 첫 번째 처형”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런 요건들로 보면 분명히 윤지충과 권상연의 죽음은 순교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천주교 신자들이 생각하는 순교 혹은 순교자의 관념으로 본다면 무언가 재점검이 필요한 듯하다. 과연 우리는 어떤 분을 순교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만약 어떠어떠한 요건을 충족하면 순교자로 인정받고, 그렇지 못하면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앙의 증오에서 나온 가해 행위로 죽음이 초래되었어야 한다거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분명한 어조로 신앙 고백을 남겼어야 한다는 것이 순교의 요건으로서 예전에는 중요했다. 그래서 1925년에 열렸던 시복 재판에서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심사가 이루어졌고, 급기야 처형당하지 않고 감옥에 갇혀 있다가 병에 걸려 죽은 신자들은 순교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즉위하고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시복 재판의 절차나 규정이 상당히 완화되었고, 순교의 요건에 대한 심사도 유연해졌다. 그 무렵에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는 순교자로 선언되었으며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제는 순교를 외형적 요건만으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추세이다. 그 동기와 지향도 따져보아야 하고, 나아가서 그러한 죽음이 해당 공동체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순교를 정의하는 관념과 판단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는 이런 변화가 지닌 의미에 둔감한 것 같다. 최초 순교자라는 말 속에는 여전히 순교에 대한 엄격한 잣대와 개념 규정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국 천주교가 순교와 순교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20세기 초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둘째 이야기: 진보와 교회사는 왜?

한국 천주교의 진보 인사들은 한국 교회사에 관심이 많을까 적을까? 내 생각은 적다는 쪽으로 기울어있다. 으레 순교자 현양이나 박해 시대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보수적인 교계 인사들의 전유물 정도로 여긴다. 교회 당국이 순교성지를 크게 만들어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비판의식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유력한 평신도 인사들 가운데 순교자 현양에 열성적인 사람들은 대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색채를 많이 띤다.

그런데 현실 비판이나 개혁은 역사적 성찰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래서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대개 역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잘못된 현실을 비판하고 올바른 미래의 방향을 제대로 세우려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역사적 과거에서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유독 천주교에서는 진보 인사들이 교회사에 무관심한 듯 보일까?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부끄러운 교회 역사를 반성하자는 차원에서 일제 강점기 천주교의 친일 행각들을 정리하여 역사책으로 묶은 분도 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어떤 평신도 신학자는 한국 천주교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 운영을 연구하여 진보적인 교회관의 역사적 뿌리를 찾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당장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시급하며, 현실을 희석하거나 은폐하는 경향을 띠고 있는 순교자 현양이나 교회사 연구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다.

내가 처음 천주교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할 적에 학문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선생님이 한 분 있다. 그 선생님께서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실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지방에서 퇴임 축하 행사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제자 한 분이 선생님의 학문 세계를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하였다.

선생님이 교회사를 전공하면서 가졌던 문제의식은 박정희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초창기에 보였던 민중적 성격에 주목하였으며, 또 천주교 수용의 역사적 의미를 제시하면서 기존 지배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신문화운동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사는 누가 어떤 관점에서 연구하느냐에 따라서 매우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러니 교회사 탐구와 진보적인 사고의 만남은 매우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한국 천주교의 진보 인사들이 교회사에 무관심하다고 느낄까? 나는 아직 그 이유를 명쾌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어느 고위 성직자의 발언에서 유추할 만한 단서를 얻은 적이 있다. 신학은 영원히 변치 않는 신적인 영역을 탐구한다. 반면에 신학자의 눈으로 볼 적에 역사란 것은 너무나 가변적이고 예측불허의 영역이다. 그러니 변화무쌍한 역사의 흐름에 믿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면 아무리 섭리가 작용하는 교회사라 할지라도 영원한 진리를 가리거나 잘못된 길로 이끌 위험이 있는 영역으로 폄하되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의 진보 진영도 이러한 신학 과잉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지상의 이야기이건 천상의 이야기이건 그 판단의 최종적인 준거를 신학에서만 찾고자 한다면 교조주의로 흐를 위험이 다분하다. 시대적 변화를 읽어내려는 유연함을 포기하고 변치 않는 잣대를 들고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교조주의 아닌가?

반면 교회사에 관심을 가지고 순교자 현양에는 그렇게 적극적이면서 사회 현실의 문제에는 왜 그렇게 둔감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과거 사실은 있는 그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두고 끊임없이 해석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보배로 간직하고 있는 교회사일지라도 오늘날의 신자들이 의미심장한 현재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재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교회가 처한 안팎의 현실에 더 민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보와 교회사가 만나서 각자의 넘치는 부분은 서로 나누고 또 모자라는 부분은 서로 채워주는 광경을 꿈꾼다.
 

조현범(토마스)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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