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기째 이어진 ‘비대면’ 학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대면과 비대면 수업 병행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초, 중, 고등학교와 달리 대부분의 대학은 쉽게 대면 방식을 선택할 수 없었고, 대면으로 개강한 과목들도 확진자 발생과 함께 급히 비대면으로 전환되기도 했습니다. 학교와 과목별 차이는 있지만 제가 담당한 과목들 역시 ‘비대면 과목’으로 개강하고 종강했습니다.  

일년 반의 팬데믹 시기 동안 ‘비대면’ 수업 방식은 ‘대면’ 전환을 위한 비상 상황이나 대기 상태가 아닌 ‘새로운 정상’(뉴노멀)이 되었습니다. 팬데믹이 언젠가 끝나더라도 이제 비대면은 사람이 만나 말과 생각을 나누는 주된 방식으로 자리매김할 것이고, 이에 따른 기술의 개발은 더욱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학습과 만남의 내적 작동 방식은 그렇게 빨리 전환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얼굴을 보고 말을 하고 듣더라도, 온전히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과 아쉬움, 단절감과 박탈감은 더해집니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 꼼짝 말아야 했던 우리를 어쨌든 만나고 소통하게 해 주었던 기술에 대한 고마움과 다행스러움은 여전히 크지만, 비대면 3학기를 맞은 학생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 익숙해질 수 없는 단절의 어려움을 공감하게 합니다. “제가 이제 2학년인데 비대면일 때 입학해서 동기들 다 만나는 데에 일년 반이 걸렸어요. 세 번에 나누어서 만나느라 이번 봄이 되어서야 다 만날 수 있었어요.”, “강의 때 줌(zoom)으로 볼 때는 작은 친구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만나니까 제 생각보다 머리 두 개가 더 있더라구요!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새삼 처음 만나는 것처럼 어색하기도 했어요.”, “같이 모여서 공부를 못 하니까요, 서로 줌 창을 열어 놓고 각자 공부해요. 이야기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렇게라도 해 놓으면 함께 공부하는 것 같아서요. 줌터디(zoom-study)라고.”, “줌으로 만나서 강의를 하니까 교수님이 자꾸 화를 내셔요. 답답하신가 봐요. 이해는 되는데 우리도 답답하거든요. 직접 만나서 수업을 하면 서로한테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 “방에서 강의 들으면서 밑에는 잠옷 바지 입고 위에만 제대로 입고 화장도 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제가 두 개로 나눠진 인간 같더라고요.”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실상’의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겪었던 ‘온전함’에 대해 생각하다 무엇이 진짜 온전하게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자코메티의 초상화 중 ‘디에고’가 떠올랐습니다. 왜 나는 이 그리다 만 듯한 그림이 그 사람의 정수를 온전히 담고 있다고 느꼈을까? 왜 이 어두침침한 회색조가 그렇게 따뜻하게 다가왔을까? 그림 속 주인공 ‘디에고’가 작가의 우애 깊은 동생이었다는 사실로 부여된 특수성인지 그의 초상 작업 전반을 다시 보아도, 오히려 이 깊이와 따뜻함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어떤 시선이었습니다. 

‘디에고’, 알베르토 자코메티.&nbsp;(이미지 출처 = 테이트 모던 홈페이지)<br>
‘디에고’, 알베르토 자코메티. (이미지 출처 = 테이트 모던 홈페이지)

자코메티가 활발히 활동하던 당시는 추상화와 초현실주의가 형식과 내용 면에서 주류를 차지하던 시기였고 미술 작품 속에서 인물에 대한 사실적인 표현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시류 안에서 활발히 작업했으나 어느덧 ‘사람이’ 그의 작품에 재등장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사람만’ 남았습니다. 당대 평론은 그의 변화를 퇴보나 역행이라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가 여러 길을 돌아 그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인간에게 돌아온 그의 작품은 점차 사람들의 시선을 ‘인간 그 자체’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더 이상 인물을 감싸는 멋진 선과 색, 보조 사물과 배경 등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볼품없고 가느다랗게 남은 형상은 오히려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 위태롭고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 인간 존재를 재발견하게 했습니다. 

“인간이 마침내 인간 자신에게로 돌아가도다!” 이렇게 외친 자코메티의 작은 작업실에는 동생이, 친구가, 아내가 모델이 되어 앉았습니다. 역시나 그의 작업실에 모여 후기 작품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은 절친한 친구들이었던 철학자 사르트르와 작가 장 쥬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는 사유의 과정을 거치며 작업한다. 다시 말해 그가 본 것을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게 될 것인가이다.”(사르트르), “나는 자코메티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이나 사람을 단 한 번이라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과 사람은 그 각각의 소중한 박동, 그 자체로 그에게 비추어졌을 것이다.”(장 쥬네) 이 두 친구는 자코메티의 내적 시선을 보았고 실제로 초상화의 모델이 되었던 이들의 공통적인 고백 역시 이를 증명합니다. “그가 나를 존재 자체로 바라보는 그 시간은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놀랍고 고마운 경험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과 그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세상 속의 인간을 표현하고자 사용한 색, 선과 배경 처리, 그리고 그를 만나기 위해 유지해야 할 존중의 거리를 섬세하게 의도한 인물 크기를 통해 감상자는 자코메티의 시선을 알게 됩니다. 그의 초상은 우리가 서로를 마주할 때 점검해야 할 내적 시선을 상기시켜 줍니다. 껍데기와 외적 요소들에 근거한 섣부른 판단도, 자기 중심의 투사나 침범도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가상의 플랫폼에서 ‘만나도 만난 것 같지 않은’ 진화되지 못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마스크도 벗고)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올 때까지 뭔가 근본적인 정비를 위한 시간을 부여받은 것 같아 다행이기도 합니다. 당연할 때 소중한 줄 몰랐던 당연함을 소중하게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대면으로의 전환만이 아니라 당신을 마주할 나의 내적인 눈의 전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도 3학기가 걸렸군요. 그래도, 더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서강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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