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산책]

 

마지막 제자에서 큰 제자로

▲ 안병무 박사
안병무 선생님과 김진호 목사의 만남을 통해 시작되고 성숙한 민중신학의 한대목이 이십여년을 지나면서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었단다. 지난주 우리신학연구소의 박영대 소장이 [우리신학 산책] 란에 쓴 글을 읽었다. 그 스승과 제자를 부러워하며 쓴 박소장의 글을 읽는 동안 영화 “애수”의 첫 장면에 시작되는 로버트 테일러의 회상과 같은 한 시절이 떠올랐다. 안병무와 김진호의 그 행복했던 시절과 병행되었던 나와 스승의 만남이 기억을 뚫고 나온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 기억의 한 조각은 이렇게 시작된다 …

이십여년 전, 1987년에서 1989년 사이에, 초보수주의자 신학도이던 김진호가 안병무 선생을 만나서 신학과 삶의 방향이 온통 바뀌어버린 사건은 그 즈음 신학을 함께 하던 또래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스승을 만난 이 열성당원이 마치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되듯이 민중신학에 뿌리를 내리고 나날이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그의 석사학위 논문은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예수의 제자단을 분석한 것으로 예수운동의 성격을 꿰뚫는 날카로움과 논리적 완결성이 드러나는 간결하고 밀도 있는 작품이었다. 그렇게 김진호는 안병무선생의 마지막 제자로, 또 선생의 신학을 잇는 큰 제자로의 첫 걸음을 시작하였다.  

스승과 소리 없이 결별하고

여전히 대학에 최루탄이 날아들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민주화 세력이 양분되어 치열한 논쟁을 벌이던 그 1987년에서 1989년, 나의 스승이 내게 주신 석사논문의 주제는”예수의 정치관” 이란 제목으로 이스라엘의 정치상황과 예수의 처신을 내용으로 다루는 것이었다. 주민세 납부에 대한 예수의 태도 (마르 12.13-17)를 통해서 그의 정치적 입장을 분석하는 것이 성서신학의 방법론으로는 무리한 작업이었을까? 예수의 정치적 입장을 분석한 신학자들의 대립항을 비교하는 동안 도서관 밖의 교정에서는 두 파로 나뉜 운동권의 구호가 끊임없이 대립되며 들려왔고, 나는 한국 운동권들의 정치적 입장과 예수의 정치적 입장을 비교하기도 하며 논문의 맥을 찾기 위해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다.

시국선언을 주도하시던 스승이 내 작업에 기대한 것은 예수는 정치적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었지만 나는 예수는 정치적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논문의 말미를 예수의 자기선언 (루가 4, 18-19)으로 맺고 말았다. 예수는 정치가가 아니었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적인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당했던 것이다.

나는 스승과 소리 없이 결별하고 신학을 포기했다. 그런데 그 우울한 결정을 가볍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진호의 존재였다. 아무리 열심히 복음서를 연구해도 이미 자신의 봉우리를 세우고 다듬는 그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인 것을, 설사 노력을 한다 해도 결코 그의 봉우리를 넘볼 수 없을 것을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내가 걷지 않아도 제대로 걷는 이가 있기에, 걷던 길을 포기해도 좋은 역설적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가 스승 안병무선생을 사랑하는 그만큼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것이 더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더 이상 스승을 따를 수 없는 그 깊은 슬픔을 녹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네가 올 때까지 내가 살아있겠니? 

1992년 즈음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안병무 선생의 개인비서로 몇 달을 일하게 되었다. 박소장이 인용한 것처럼 “안타깝게도 선생은 <요한복음>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이미 병약한 몸으로 책을 읽는 것도 쉽지 않았고 손이 떨려서 글도 쓰기 어려운 사정에 있었으니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226쪽). 그래서 내가 맡은 일은 병약해진 선생의 구술원고를 받아 적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안선생님을 통해서 그 즈음에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일하던 제자 김진호가 스승을 떠난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승은 떠나간 제자에 대한 아쉬움과 애틋함을 감추지 않았다. 안타까워하는 김진호의 스승을 보며 나의 스승도 내가 떠난 것을 아쉬워하셨을까, 기억을 되돌려보았다. 제자를 떠나 보낸 안병무 선생 곁에서 짧은 기간 동안 이었지만 일상의 담론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직도 생생한 기쁨으로 남아있다.

1996년 봄, 다시 신학을 하기 위해서 한국을 떠나기 직전 안병무선생은 “네가 올 때까지 내가 살아있겠니?” 하셨다. 그리고 그 해가 지나기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내게는 남의 스승을 잠시 빌린듯한 짧은 만남이었지만, 선생이 나누어준 사랑과 민중신학을 하는 삶의 자세는 여전히 내 안에서 빛나고 있다. 김진호 목사에게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대목이니, 이제 이야기를 들으면 섭섭해할 지도 모르겠다.

다시 신학을 하러 떠납니다 했을 때, 나의 스승은 감옥을 짓고 들어가 사는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무엇이 있는지 반문하셨다. 성서학과 공부를 포기한 그 끝에서 예수의 데레사를 만났고 그래서 가르멜의 영성을 공부하던 십이년 동안 나는 스승께 어떤 소식도 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제자

로마에서 새로운 선생님들을 만났다. 박사논문 지도교수인 쟝 까를로 부루니 신부님과 안젤라 알레스 벨로 선생님, 그리고 내 논문의 주인공인 에디트 슈타인이다. 논문을 쓰는 기간 내내 스승과 헤어진 지난 기억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래서 논문지도에 대해 단 한번도 나의 주장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또다시 스승과 결별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게 돌아온 것은 각주의 쉼표까지 꼼꼼하게 고쳐 온통 빨강의 바다가 되어버린 논문의 초고들이었다. 로마에서 만난 두 선생님 덕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세시간이 넘는 토론 끝에 논문심사를 통과하던 날 우리는 Fiat 의 일치점 안에서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그 길었던 열두 해가 마무리 되어가던 2008년 가을, 로마를 잠시 방문한 나의 옛 스승은, 당신이 뒤늦게 만난 스승에 대한 기쁨과 열정을 길게 들려주셨다. 예수만으로는 왠지 부족하다고 느끼셨던지, 다석 류영모 선생을 새로운 스승으로 만나 공부를 하는 신바람에 다시 젊어지신 모습이었다. 진리를 향해 가는 길에서 예수와 다석의 합류점을 찾아 기뻐하시는 모습을 마주하며 나는 스승과 소리 없이 화해했다.

스승의 자유노트를 근거로 Idee 2권을 집필한 수제자 에디트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가톨릭교회에서 영세를 받자, 현상학의 창시자인 그의 스승 에드문드 후썰은 제자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않았었다. 지성인으로서 가톨릭 교회를 선택하는 것은 그 시대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결정이었다. 개신교 신자였던 그 스승은 당신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가르멜회의 수녀가 된 제자를 이해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제자가 떠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현상학의 불운이 시작된 시점이었다고 하겠다.

이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존재하는 만남과 떠남의 때를 이해할 것 같다. 나의 스승이 첫 신학수업에서 온통 나를 설레게 만들었던 그 대짜배기 신학의 향기를 여전히 느낀다. 스승과 나의 만남 역시 안선생님과 김목사의 만남에 뒤지지 않을 내 안의 풍요로 자라고 있기 때문일까. 그리고 나의 스승이 다석을 향해 떠날 수 있었던 그 자유로운 기질이 내 안에 고스란히 물려온 것을 본다. 지금 나의 스승인 에디트 슈타인도 그 면에서 뒤지지 않는다: 경계 허물기! 그의 사상 안에는 플라톤에서 하이데거까지, 정신분석에서 신비신학까지 함께 어우러진다. 진리를 향해가는 길은 다름과 낯섦이 드러나고 그 쪼개어짐을 통해 다시 통합되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예수의 데레사 연구의 대가인 토마스 알바레스 신부님을 스승으로 만난 행운과, 내 신학의 방향을 데레사에서 슈타인으로 전환하도록 이끌었던 헤수스 카스텔야노 신부님과 겪은 시간 싸움들 역시 내 안에 갈무리 되어간다. 이제는 그 만남들과 헤어짐 사이의 시간이 갖는 무게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에디트 슈타인의 성녀품 기념 메달, 1998
▲티베리우스 황제의 동전

 

 

 

 

  

▲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동전

 

 

 

 


스승이 그리운 이들이여


에디트 슈타인은 1925년의 저서 <국가론>에서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세금에 대한 예수의 태도 (마르 12.13-17)를 분석한 대목에서 지난날 스승과 내가 함께 놓친 깨달음을 얻었다: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데 쓰라는 예수의 가르침에는 납세행위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얼굴이 새겨진 것을 하느님에게 되돌리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얼굴은 어디에 새겨져 있는가? 바로 사람들 하나하나에 하느님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진 인간과 그의 권리를 국가권력이 침해할 수 없다. 나아가 법적인 주체로서 개별 인간과 법인으로서의 국가는 동일한 법적 지위와 무게를 갖는다.

예수가 정치적이거나 아닌 것이 대수인가. 예수는 사람의 존재와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예수의 인간관이 세금논쟁에서 시작될 수 있는 우선적 담론일 것이다. 예수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이들이 예수쟁이라 불렸던 원시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내가 예수사건에 한발을 딛는 순간, 그의 진리가 내 안에서도 살아있는 몸으로 기지개를 켜고,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로 살게 될 것이니 또 다른 그리스도를 찾아 다닐 이유가 없다.

신학이란 명분으로 공부를 시작한지 삼십여년이 되어간다. 안병무와 김진호의 역사를 부러워하는 동안 김진호는 또 다른 스승들을 만나면서 안선생님에게 되돌아 갔을까, 아니면 자신이 걷는 길의 모서리에 부딪칠 때마다 스승 안병무를 만나며 자신의 방향을 확인했을까, 궁금해진다. 김진호 목사의 외로운 해체작업에 가속도가 붙는 모양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가 있어서 나는 기쁘다.

누군가 나의 로마생활 12년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주문했다. “부처님을 사랑하게 된 손오공”이라 대답하였다. 지나온 시간의 결과인 나의 모습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했던가? 운이 좋다면 모퉁이를 지날 때마다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 도 있으리라. 그러나 스승이 그리운 이들이여, 선생이라 부를만한 예수가 있으니 그 누가 더 필요하랴. 십자가에 달리지 않아도,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천만번 양보해도 인간의 원형인 예수는 내 안에 이미 살고 있으니, 그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가 나를 넘어 흐르기도 하니 … 
 

최우혁/ 미리암,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원, 로마 떼레지아눔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고 마리아눔에서 마리아론을 공부하고 최근 귀국했다. 현재 서강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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