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부활 제3주일) 사도 3,13-15.17-19; 요한 2,1-5ㄱ; 루카 24,35-48

“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루카 24,36)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고, 살과 뼈가 있는 당신을 만져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먹을 것이 있냐고 말씀하시며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셨다고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장면을 통해 부활 사건의 실재성과 부활하신 주님의 육체성을 강조합니다. 정확히 부활은 역사 안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또한 부활을 과학적 방법론으로 설명하고 이해하긴 어려우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온전한 인성을 통해 죽음으로 파괴된 생명의 부활을 알리며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에게도 부활의 희망이 있다는 구원의 신비를 전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죄의 용서와 회개에 대한 선포를 위해 제자들이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24,46-47) 오늘 복음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이어지는 단락에서 그에 대한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십니다.(48-53) 저자는 루카 복음을 자연스레 사도행전의 성령 강림 사건(사도 2,1-47)과 연결시키며 신약의 시대, 공적 계시의 시대에서 초대교회가 탄생됨을 알립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거룩한 교회의 시대, 성령의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을 자연스레 묘사합니다.

 

한마음으로 서로 기도하고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역사의 어려운 순간 속에서 쇄신과 개혁이 요청될 때마다 그런 초대 교회 공동체의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고 늘 선포해 왔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정신이란 부활의 증인이자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사도 2,42) 한마음으로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의 친교를 나누며,(4,32) 빵을 떼어 나누고,(성체성사 2,46) 성전에서 모여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2,46) 또한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라고 하며(2,44) 재물이나 현세적 가치보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삶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을 일으키신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그 섭리는 약속과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바라보려는 우리에게 그 신비를 대하며 이를 성찰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초대 교회의 모습은 분명 이상적 삶이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며, 우리가 삶으로 구현해야 하는 주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매년 봄마다 피는 꽃들을 통해<br>생명의 신비를 묵상합니다.<br><br>아무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도<br>이름 모를 꽃들이 피곤 합니다.<br>물론 여름과 가을이 지나 그 꽃은<br>지고 다시금 자연으로<br>돌아가겠지요.<br><br>그러나 그 이름 모를 꽃들도<br>하느님께서 돌보시고 꽃피우십니다.<br>그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돌보십니다.<br>부족한 나 이지만<br>하느님께서 손길을 주십니다.<br><br>©️이주형
매년 봄마다 피는 꽃들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아무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도
이름 모를 꽃들이 피곤 합니다.
물론 여름과 가을이 지나 그 꽃은
지고 다시금 자연으로
돌아가겠지요.

그러나 그 이름 모를 꽃들도
하느님께서 돌보시고 꽃피우십니다.
그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돌보십니다.
부족한 나이지만
하느님께서 손길을 주십니다.

©️이주형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소임 상 교우들에게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여러 지식과 이야기들은 하느님께서 그 중심입니다. 간혹 수업 중에 교우 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이해가 되십니까?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물론 이는 우문입니다. 이미 교리서나 신앙의 가르침에서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이해가 되고 있는지, 정말로 신앙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진솔한 답변과 생각은 저마다 다를 수 있고, 또 아직은 채 피지 못한 씨앗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로 살아가지만 늘 믿음과 그를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사제인 저보다 더 열심히 하느님을 찾는 교우 분들을 뵈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강의 중에 교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드리곤 합니다.

“네, 저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입니다. 사제라는 직책과 신분 속에 감춰진 제 모습은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제가 참으로 부족하기에 하느님이 계셔야 합니다. 저에게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제가 아는 하느님은 진심으로 뉘우치는 이를 용서하시는 분이시고, 그런 이들을 위해 당신 아드님을 보내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는가? 어떻게 그분의 부활과 생명의 신비를 체험하는가? 아마도 우리가 평생을 두고 고민해야 하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용기와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면 분명 그것은 우리 삶에서 열매 맺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히브 10,23)

 

이주형 신부(요한)

서울대교구 성서 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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