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6일(주님 승천 대축일) 사도 1,1-11; 에페 1,17-23; 마르 16,15-20ㄴ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권위주의·관료주의

권위란 다른 사람을 통솔하여 이끄는 힘을 뜻합니다. 보통 개인이 갖는 공적 지위나 직책,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과 권력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책임도 포함합니다. 권위는 원칙과 절차에 따라 정당하고 공정하게 행사돼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권위가 권위주의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치학자 호안 린스는 권위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권위주의란 종래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중간 형태로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다원주의를 유지하며, 잘 고안된 지도적 이데올로기가 없으며 내용상으로 고도의 정치적 요인도 없고, 지도자가 형식적으로는 무제한이지만 실제로는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권력을 행사하는 시스템이다.”

결국 다수의 의견, 보편적 가치, 절차와 정의를 무시하는 안하무인 독불장군 같은 작태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런 권위주의는 독재와 인권탄압이라는 비극적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런 권위주의는 관료주의로 연결돼 온 조직과 공동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영적 치매라고 강력히 비판하신 바가 있습니다.(2014.12.22)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의 공통점은 하느님과 이웃을 잊는다는 것,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에 빠진다는 것, 그래서 자신과 공동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성찰하지 못한 결과

권위주의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먼저 개인이 무분별한 욕심을 성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개인적 이상을 혼동합니다. 그릇된 신념을 정당화합니다. 급기야 목적이 정당하다며 부정한 수단도 정당화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빚습니다. 게다가 손에 쥔 권력을 이런저런 명분을 핑계로 내려놓지도 못합니다. 설상가상이군요.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처럼 식별되지 못한 욕심은 그릇된 욕망으로 변질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성찰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관료주의는 왜 발생할까요? 관피아라는 은어가 암시하듯 지도자의 어두운 기운이 조직으로 번집니다. 바벨탑을 세워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생각을 많은 사람이 공유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책임자와 통수권자의 잘못된 지도력이 큰 원인입니다. 리더가 행하는 원칙과 절차의 상실, 부정과 비리, 오만과 탐욕으로 인해 조직은 피로감과 실망감에 물들고 건강한 동기를 상실합니다. 조직은 겉으로는 충성하지만 실제로는 리더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조직 역시 그들 스스로 공정과 원칙을 상실한 채 조직은 행정 편의주의, 독자적 권력을 형성합니다. 이런 관료주의는 모든 국가조직이나 종교 등에서 일어납니다.

사제가 되면서 절감하는 것은 바로 낮아지고 겸손해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제들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던가요?(마태 5,3)<br>루카는 이를 현실적 가난으로 해석하기도 하고(6,29), 마태오 복음의 이 대목을 영적인 가난인 겸손과 주님께 대한 순종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두 대목이 물질적 가난을 공통으로 의도했는지는 해석의 논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해야 함’입니다. 그것은 재물과 권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것을 실현합니다.<br><br>서울대교구 이현종관 성당 십자가. ©️이주형&nbsp;
사제가 되면서 절감하는 것은 바로 낮아지고 겸손해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제들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던가요?(마태 5,3)
루카는 이를 현실적 가난으로 해석하기도 하고(6,29), 마태오 복음의 이 대목을 영적인 가난인 겸손과 주님께 대한 순종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두 대목이 물질적 가난을 공통으로 의도했는지는 해석의 논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해야 함’입니다. 그것은 재물과 권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것을 실현합니다.

서울대교구 이현종관 성당 십자가. ©️이주형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섬김과 봉사

이번 주간 주님의 승천을 묵상하며 특별히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권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 권위의 원천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교,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낮추신 아버지께 대한 순종입니다.(필리 2,8)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합니다.(2,9) 예수님께서 당신과 같은 권위를 갖고 싶어 하는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2-43 출세와 섬김) 하셨지요. 그리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고,(마태 16,24) 심지어 그렇지 않으면 제자로서 합당할 수도 없다고 하십니다.(마태 10,38)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권위라기보다 사랑이라는 표현이 더 좋겠습니다)에 많은 이가 감동을 받고 삶의 의미와 살아갈 힘,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얻었습니다. 이제 그 권위가 주님의 승천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에 주어졌습니다. 섬김과 봉사를 통해 그 권위는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는 세상을 향한 누룩, 밀알로 남을 때 존재 의의를 갖습니다. 겸손하고 철저하게 나의 삶, 내 욕심, 잘못된 생각을 성찰하고 회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했던 지난날의 삶을 통회해야 합니다. 저부터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회심하려는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주형 신부(요한)

서울대교구 성서 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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