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건물이 되어 버린 공항을 지나, 텅 빈 비행기를 타고, 이제는 어색해 보이지 않는 방호복 입으신 보건소 직원분들께 검사를 받고, 길게 느껴졌던 2주간의 자가 격리를 지나 수녀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과 “언제 한번 보자, 같이 밥 먹자”라는 말이 이렇게 공허하게 들린 적이 있었던가요. 이제는 화상을 통해 만나는 것이 좀 더 편하고 익숙해진 저 자신을 만납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공연을 관람하며 즐거워하고 학생들이 뒤엉켜 체육활동을 하는 사진들이 불과 2년 전 사진이라니. 사진을 바라보다 울컥했던 것은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아니면 이조차 우린 익숙해졌을까요?

얼마 전의 자가 격리는 제게 벌써 3번째였습니다. 이번에는 건설적인 생각을 하며 시간을 가져 보자는 다짐을 하고, 새해 계획을 세워 보았습니다. 해야 할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하다 보니 종이 1장이 훌쩍 넘어갑니다. 문득, 빠르게 변해 버린 이 세상에서 수도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의 부르심은 무엇일까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자가 격리 안 답답해? 뭐 하고 지내 요즘?”

“뭐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이제 나는 어떻게 살까, 수녀로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도 하고 있어.”

“또? 그걸 또 해? 언니는 내가 물어볼 때마다 그 고민하고 있던데?”

그러게, 저는 지난 1년간 이 고민을 계속해 왔습니다. 매번 “모르겠다”로 결론이 나서였는지 마치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긴 양 꽤 심각하게 고민해 보는 중이었습니다. 결국, 머리로만 고민하고 계획을 세운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만고의 진리만을 마주하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고민에만 몰두하여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의식할 틈을 잊어버린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 겪는 새로움이 가득한 이때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만으로 무엇을 계획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촘촘했던 계획과 빛나리라 믿었던 성과가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와 질병으로 무참히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을 읽고 과학적 근거와 함께 이 아픔이 더 길고 커지지 않게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많은 사람은 그것을 현실로 살아내는 매일매일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 ‘매일’이 모여야 변화된 미래를 만날 수 있겠죠.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 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8-39)

끊임없이 진리를 갈망하고 새 시대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매던 청년들이 예수님에게서 답을 얻기 위해 달려갑니다. 그분은 찬란한 계획과 현실 너머의 미래를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일상에 함께하기를 제안하십니다.

나는 일상을 어떻게 살고 있나, 내 일상에 하느님을 초대하고 함께 지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일상 없이 저 너머의 미래를 두려워하며 이렇다 하더라, 저렇다 하더라라는 말들에 현혹되어 회의적인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두려움으로 남들도 우울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봅니다.

 

오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혹시,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오래 머물러 계셨나요?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

 

그리고 꿈을 꾸며 지금을 살라, 절망을 경험해 보지 않은 것처럼.

 

이지현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