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가톨릭평론> 30호(2020년 11-12월)에 실린 글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올 한 해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공공 모임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이 시행되었고,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공동체를 강조하는 종교적 신념과 질병 통제를 위한 과학적 원칙이 갑작스러운 대치 상황에 놓였다.

공공 예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교회는 이른바 ‘온라인 미사’를 봉헌하거나 소셜 네트워크에서 ‘화상교리’를 진행하는 등 사목활동을 이어 가기 위해 창조적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방역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한편으론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본당 주일 미사 참석 같은 ‘오프라인’ 모임이 앞으로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오는 실정이다. 서로를 분리시키는 이 코로나 시대가 역설적으로 공동체 미사의 본질을 재발견할 기회는 될 수 없을까?

성찬례 거행의 중요성: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제1장은 ‘성찬례 거행의 중요성과 존엄성’이라는 제목 아래 맨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미사 거행은 그리스도의 행위이며 교계 질서를 갖춘 하느님 백성의 행위로서, 보편교회와 지역교회는 물론 신자 개개인에게도 그리스도인 생활 전체의 중심이다.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미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미사에서 흘러나오고 미사를 향해 나아간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16항)

따라서 성찬례 거행보다 교회를 더 효과적으로 건설하는 성사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파스카 여정으로 부름받은 하느님의 백성은 성찬례 거행을 통해 복음 선교와 성화, 종말의 완성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걸어간다. 성찬례 안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현존이 있고, 그리스도의 몸이자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이미 여기에 실재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성찬례 거행에 그 기초와 중심을 두지 않으면 결코 세워질 수 없으므로, 공동체 정신을 기르는 모든 교육은 성찬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사제생활교령', 6항)라고 말한다.

성찬례 거행의 교회적 본성: 성체성사가 교회를 만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헌장은 구약의 백성 안에서 하느님의 위업으로 준비되어 온 인간 구원의 업적이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 곧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었음을 언급한 다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뒤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교회가 세상에 나타난 성령 강림 날에,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1-42.47 참조) 그때부터 교회는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기 위하여 한데 모이기를 결코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전례헌장', 6항)

그리스도의 파스카로 탄생한 교회는 그 신비를 매 주일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는 예식’(사도 2,46 참조)을 통해 기념하며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인간 구원 활동을 지속해 왔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 다 같이 모여 거행하는 주일 성찬례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자리였으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충만히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빵과 포도주만이 부활하신 주님의 표징은 아니었다. 성찬례 거행 전체가 표징이었고, 여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회중 전체 또한 표징이었다.

‘교회가 세상에 나타난 성령 강림 날’은 주님의 식탁에서 ‘모임’을 가질 때마다 재현된다. 전례헌장이 말하듯, “실제로 이날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례에 참여하고, 주님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과 영광을 기념하며,”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신”(1베드 1,3) 하느님께 감사를('전례헌장', 106항) 드린다. 성찬례를 통해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불리움받은 구체적 신앙 공동체라는 본성을 드러낸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인간의 성화를 위한 성찬례를 거행하라고 하느님께서 ‘불러 모은 공동체’, 그것이 교회다. 사도 바오로의 편지들에서 쓰는 '교회'(ekklēia)라는 용어 역시 세상에 퍼져 있는 전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를 가리킨다. 성찬례 거행이 지닌 공동체 형성의 힘은 “모든 사람이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와 이렇게 일치되도록 불리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며 그리스도께 나아가고”('교회헌장', 3항) 있음을 표현하고 실현시킨다.

성찬례가 거행될 때마다 언제나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진다는('교회헌장', 3항 참조) 믿음은 공동체의 능동적 참여가 동반될 때 실현된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19항은 사제들이 “되도록이면 날마다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도록 권장”하고, 신자들 역시 “전례 행위에 함께하고 또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 그 거행이 지닌 교회적 본성이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할 때에도 성찬례 거행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위로서 언제나 그 효력과 품위를 지닌다”는 말을 덧붙이는데, 이는 성찬례의 참여가 가능하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코로나로 인해 공동체 미사 참여가 어려워진 요즘의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성체성사. (이미지 출처 = Pixabay)
성체성사. (이미지 출처 = Pixabay)

능동적 참여: 외적 참여, 내적 참여, 성사적 참여

오늘날 전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참여’다. 고대로부터 전례를 이해하는 열쇠 말이었던 이 참여라는 말은 사도 바오로가 성찬례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을 가리켜 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 여기서 보듯이, 최고의 전례적 참여는 영성체를 통한 성사적 참여였다.

성찬례 거행은 항상 온 교회 공동체의 참여를 요구한다. 온 교회 공동체라 말함은 사제가 성찬례를 집전할 때, 신자들이 구경꾼처럼 참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지난 세기, 전례운동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의 핵심 열쇠 말 역시 ‘참여’다. 비오 12세의 전례 회칙 '하느님의 중재자'(Mediator Dei, 1947)는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강조한다. 이 회칙은 신자들의 전례 참여를 ‘외적’ 참여와 ‘내적’ 참여로 구분하면서, 특별히 외적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례란 그리스도의 사제직 수행이고, 전례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현장’의 행위임을 가르친다. 전례 모임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비오 12세의 가르침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이어져,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교회에, 특별히 전례 행위 안에 계신다”('전례헌장', 7항)라고 더욱 분명히 선포되었다. 전례의 외적 참여에 내적 참여가 합쳐질 때 '능동적 참여'Participatio actuosa가 되고, 이 능동적 참여는 성사적 참여와 함께할 때 완전한 참여가 된다.

전례의 외적 참여는 전례 행위 자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목자들은 전례 행위에서 유효하고 정당한 거행을 위한 법규를 준수할 뿐 아니라 신자들이 잘 알고 능동적으로 또 효 과적으로 전례에 참여하도록 돌보아야 한다.”('전례헌장', 11항) 특히 성찬례 거행은 “많은 신자의 참석”과 더불어 “공동 거행”으로 이루어질 때 성찬례의 “공적 사회적 본질”('전례헌장', 27항)이 보존된다.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에서 마음으로 영성체하는 이른바 ‘신령성체’가 코로나 시대에는 적극 권장될 수 있겠지만, 만일 성찬례로 기념하는 파스카 신비를 전례 모임 참석 없이 단지 정신적인 기억으로만 참여한다면 신앙은 개인적 차원에만 머물게 된다. 장엄하고 공동체적인 성찬 거행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영성체야말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더욱 결합시키고 교회 공동체도 점차적으로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게 도와준다.

사실 성찬례의 외적 참여는 매우 중요해도 내적 참여의 표현일 뿐이다. 외적 참여가 진정한 참여가 되려면, 거행되는 신비에 대한 믿음이 동반되어야 한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교회의 신비이며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구체적인 지역 공동체를 통해서 실현된다. 이러한 내적 믿음을 지니고 모인 지역 공동체의 전례 회중은 교회 일치의 신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주는 표징이 된다. 이는 성찬례 안에서 “자신의 위계와 임무와 실제 참여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으로 관여”('전례헌장', 26항)해야 하고, 거행한 신비를 오직 거행으로만 끝내지 않고 세상 안에서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비록 모인 사람의 수가 적다 해도, 이들은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의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로 나타난다.

방송미사

코로나19 때문에 요즘 인터넷에 올린 미사 동영상이 많아져서 그렇지, 텔레비전 미사 중계는 몇십 년 전부터 있어 왔다. 미사뿐만 아니라 말씀의 전례나 성무일도 방송도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미사 참석이 불가능한 환자든 아니든 누가 믿음의 정신을 갖고 방송을 시청한다면, 거기에 영적 유익이 없을 순 없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미사 시청은 아무리 분위기를 거룩하게 잡고 해도 ‘능동적 참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방송미사의 예식 순서를 이해하고 그 흐름을 마음으로 잘 따라간다 해도 결국은 ‘시청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방송미사’ 문제의 본질은 미사 거행의 콘텐츠에 있지 않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방송에서 보여 주는 미사가 내가 실제로 참여해서 체험하는 미사보다 질적으로 좋을 수 있다. 아름다운 성당, 수준 높은 성가, 멋진 강론이 있는 미사 프로그램을 내 입맛대로 골라서 선택해서 볼 수 있고, 유아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관계가 불편한 형제자매도 곁에 없으며, 침대든 소파든 방바닥이든 어디든 편안하게 앉아서 오직 ‘내적 참여’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때때로 마음 불편하게 만드는 본당 공동체 미사보다 방송미사가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방송미사의 진짜 문제다. 방송은 어디까지 방송이지 전례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본당 공동체에 함께 모여서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과 방송으로 미사를 시청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더군다나 방송미사 시청이 주일미사 참석 의무를 대신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코로나 시대의 미사

코로나19는 생각하기에 따라 우리 시대의 복음 선포를 자극하는 ‘좋은 바이러스’로 이용할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성찬례 참여가 가로막히는 체험도 어찌 보면 파스카 성삼일 전례 때의 체험과 비슷해 보인다. 성찬례 거행 안에서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신비를 공동체적으로 장엄하게 드러내는 파스카 성야에 앞서,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은 그 놀라운 구원의 신비를 더욱 생생하게 살아내기 위해 1년 중 유일하게 ‘성찬례가 금지된 날’이기 때문이다. ‘벗겨진 제대’, ‘빈 무덤’의 역설적인 이 순간을 통해 신자들의 마음은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이 식탁에서 언제나 그들을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와 한마음이 된 신자들의 마음은 마침내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놓으려는 성체성사의 신비로 불타오르게 된다. 코로나에게 신랑을 빼앗긴 듯한 이 암흑의 시간이 신앙 공동체를 흩어지게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로 이 함께 모일 수 없는 시간 덕분에 공동체는 자신들이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혼인 잔치에 함께 모여야 할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다. 복음적 삶의 원형인 초대교회 공동체도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최종근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원장. 1989년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입회해 1995년에 첫 서원을 했다. 1999년에 사제가 되었고, 같은 해에 대구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성신학으로 석사학 위를 받았다. 2004년부터 2013년까지 교황청립 로마 성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공부하고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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