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알랭 드 보통'을 따라가며 사랑을 사유하기-2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따스한 말 한 마디가 고통을 위로할 수 있지만 고통은 더 큰 고통 앞에서 더 겸손한 표정을 짓는다. 나보다 더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에 의해서 내 아픔은 아주 사소한 것이 되기도 한다. 수십 명이 사상을 당한 참사의 현장에서 찰과상 정도는 차라리 신의 가호쯤으로 생각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기 십상이다. 고통 당하는 사람들처럼 내 고통이야말로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유아론적 함정에 빠지지 쉬운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인생은 고해라던가, 조금만 우리의 이웃들을 돌아다 보면 고통은 곳곳에 산재한다. 내 안의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이 따지고 보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비극은 얼마든 있다. 버리고 버림받고 병들고 아프고, 무수한 상처로 얼룩진 곳이 이승이 아니던가.

빅토르 프랑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아이서브)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겪어야 했던 한 인간의 고통의 기록이다. 대개의 수용소 이야기가 수용소에서의 비인간성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데서 그치고 있는 반면에 이 책은 고통과 그것을 초월하려 했던 한 인간의 실존의 드라마가 아주 담담한 서술 속에 감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책의 체험기는 여타의 체험기와는 우뚝하게 다르다. 과장도 없다. 형이상학적 초월도 없다.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것을 초극하려 했던 한 인간의 내면의 드라마가 있을 뿐이다. 이런 책은 음미되어져야 마땅하다. 이 책을 빌려달라는 지인들의 요청을 거절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나는 빌릴 수 있는 책이 있고 빌릴 수 없는 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 권을 소유함으로 해서 내 존재의 풍성한 질량감을 확보했다는 느낌-그 느낌이 허구이든 실제이든-을 갖게 하는 책, 프랑클의 책은 필경 그러한 책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치아에 대한 엄밀하고도 객관적인 지식을 소유했다고 하자. 그러나 그 지식이 어금니와 잇몸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통증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면 대체 치의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고통받는 인간>(서울대학교출판부)의 저자 손봉호는 말한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저 멀리 있는 '있는 것'들에 대한 객관적 지식도 아니고 고통의 본질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서술도 아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요, 해방될 수 없으면 고통의 의미라도 알아서 위로 받는 것이다." <고통받는 인간>은 기존의 철학적 담론이 외면하고 있는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이 책도 학문적 수준의 논의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고통에 대한 담론이 실존의 해방에는 못 미치고 있다는 말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의 원제목이 <어느 심리학자가 체험한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듯이 이 책은 프랑클 박사가 2차대전 중 나치의 아우슈비츠 등 여러 강제수용소에서 체험을 기록한 일종의 회고록이다. 과거는 회억(回憶) 속에서 굴절되기 마련, 대개 불행의 기억이란 실제의 질량과 부피보다 훨씬 과장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그러나 빅토르 프랑클은 담백한 어조로 과거를 말한다. 군대 체험이나 병상 체험을 말하는 남자들의 술좌석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톤 높은 목소리나 호들갑스런 제스쳐도 없다.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해야할 만큼 극악하고 야만적인 수용소에서의 체험은 그것을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악몽일 것이며, 극심한 고통은 그것의 사실적 재현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불은 쇠를 시험하고 고통은 인간을 시험한다

빅토르 프랑클은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정신과 교수였기도 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학문적인 아카데미즘에 있지 않고 살아있는 인간의 실존에 있었다. 고통과 죽음이 어떻게 인간의 내적 성숙의 관문이 될 수 있는가, 인간됨을 말살하는 극악한 조건 속에서도 어떻게 인간은 인간됨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가, 사랑은 어떻게 한 존재를 절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으며, 고통 속에서 예술과 유머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프랑클은 말한다. 그 어조의 톤은 낮고 담담하다.

꼭 그렇게밖에는 달리 행동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자유를 말할 수는 없다. 외적인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는 자유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열악한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개화할 수 있는 공간이다. 주어진 상황적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데서 자유는 그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 그런 환경 속에서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데도 환경적 구속을 벗어나 다르게 선택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자유는 비로소 그런 사람의 입에서 말해져야 하리라.

프랑클은 말한다. "경험적 차원에서 보면, 인간은 얼마든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걸 수용소 생활은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준다.……안팎으로 궁지에 내몰린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내적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강제수용소에 있어 본 우리들은, 연병장에서 혹은 바라크 안에서 주위 동료들을 위로하면서 자신들의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마저도 주어버리던 사람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비록 소수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강제수용소가 다른 건 다 강탈할 수 있어도 인간이 가진 마지막 자유, 즉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또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자유만큼은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고통은 오히려 존재를 갱신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라는 것이다.

"수용소 생활이라는 내부적 난관을 내부 단련의 기회로 삼은 것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고, 과거의 삶 속으로만 자꾸 숨으려 했다. 그런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던 수감자 생활을 오히려 절정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지 못했다." 이런 지적은 '불은 쇠를 시험하고 고통은 인간을 시험한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시련의 현실은 비로소 '강철의 무지개'가 되는 것은 아닌지. 증가되는 고통의 양이 그 절정에 이르러 새로운 단계로 존재를 비약시키는 저 불가사의한 고통의 변증법이다.

아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경멸할 수 없었다

이 책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사랑을 말하는 대목이다. 프랑클은 죽음의 위험을 앞두고 그의 친구에게 구두로 유언장을 전한다. "첫째, 우리는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간도, 당신 얘기를 안 한 적이 없었다고, 그건 자네가 증인이잖아. 둘째, 이 세상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했다고. 셋째, 비록 짧았지만 당신과 함께 살았던 그 행복한 시간이 있었기에 그 어떤 괴로움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사랑은 환멸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초월의 힘이라는 얘기다. 어떤 환멸도 우린 사랑으로, 사랑이 없다면 사랑에 대한 추억만으로도 우린 능히 견뎌낸다.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민음사刊)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샹탈은 사랑을 잃어버린 자, 희망을 상실한 자의 심정을 참담하게 고백한다. 샹탈은 자신의 아이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독백한다.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의 불치의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나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너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도록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내가 감히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암울한 생각이 너에게 어떤 저주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네가 나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너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 내가 결국 받아들이고만 끔찍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경멸할 수 없었지만 아이의 죽음이 세계를 경멸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마음껏 경멸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어떤 연애소설보다, 그 어떤 종교서적보다 감동적인 사랑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학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분노의 눈을 부라리는 일이리라. 그러나 비참한 수용소의 생활 속에서도 프랑클은 세상에 대한 우의를 버리지 않는다. 그에겐 사랑이, 그 어떤 권력도 짓밟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사랑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문학작품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한 체험은, 이 세상 어떤 권력도 그대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하리라."

"그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옹색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며 의연하게 견디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라고 프랑클은 말한다. 그는 자신을 지켜보는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한다. 타인의 눈은 살아있다. 살아서 그를 위로하고 현재를 분명하게 바라보게 한다. 그 집요한 사랑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는 고통의 운명을 견디고 초월해 간다. 그 초월의 기록은 눈물겹다.

그 어떤 연애소설보다, 그 어떤 종교서적보다 빅토르 프랑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감동적인 어조로 사랑을 말한다.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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