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산책-최우혁]

▲ 구유에 태어난 아기예수를 방문하는 동방박사들

또다시 새로워진 그리스도를 만난다. 추운 계절에 빈손 빈 마음으로 또다시 한 해를 시작하는 이 아침,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늘 없이 웃으며 반기는 구유 위 아기의 모습이다. 이천 년 전 로마제국의 속국인 유다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진 이 탄생 장면은 해마다 희망으로 오는 그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재현된다.

참 신비한 생명의 신비

이렇게 새로 태어난 아기 예수와 함께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이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루가 복음에는 아기예수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목동들이었다고 전하고 (2.8-20), 마태오 복음서에는 동방에서 박사들이 아기를 만나러 왔다고 전한다 (2.1-12). 전승에, 세 명의 박사들은 가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사르 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그 중 한 명은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통적인 성탄의 모습은 한밤중에 빛나는 큰 별, 짐승의 먹이통에 누여진 아기와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 마구간 한 켠에 있는 소와 나귀, 양떼를 몰고 온 목동들, 선물을 준비해서 멀리 페르시아에서 온 세 명의 박사 점성가들로 꾸며진다. 각기 다른 나라와 계층의 사람들, 짐승들과 더불어 그 한가운데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웃고 있는 신생아와 그 아기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는 모습들이 변하지 않는 그 탄생의 장면이다. 소박한 탄생이다! 동시에, 천지개벽의 사건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온 신의 탄생이라니 …

나자렛의 마리아가 성령의 초대에 응답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실현되었다는 이 아기 예수는 우리에게 새로운 빛과 희망을 상징하며 또 다른 시작을 알린다. 두 팔을 벌리고 웃고 있는 아기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그 신기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언젠가 일어났던 우리들의 출생 역시 이렇게 가슴 설레는 기쁜 장면을 연출했으리라 … 그 신비했던 첫 만남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기예수의 웃는 모습에 눈을 맞춘다. 참 신비한 사건이다, 생명의 신비여!

인간을 하느님으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 “성탄”, 아르메나의 14세기경 작품
중세 독일의 신비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이 사람이 된 이유를 “인간을 하느님으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해명한다. 하느님은 자신의 독생자 안에서 자신의 신적 존재와 신적 본성을 낳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된 이 사건이 인간의 진리이라면,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것 또한 진리인 것에 틀림없다. 이는 창세기에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창1. 26)”고 말한 그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존재론적 근원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자신 안에서 아기로 태어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그 받아들임의 순간에 하느님 안에서 태어나는 자신을 경험한다. 아기처럼 시작하는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성서는 인간이 삼위일체적 관계의 신적 본질을 바탕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몸과 마음, 영혼의 삼위적 구성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기에 삼위일체의 지평에서 성령의 빛을 받은 신적인 인간은 우주적 관계, 사회 공동체적 관계, 또 다른 나의 모습인 너, 그리고 나 자신과 실존적 관계를 맺고 소통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선험적 존재로 살아간다. 이 선험적 관계의 완성을 보여준 그리스도의 탄생은 역사적 예수의 탄생 안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는 역사 안에 실현된 그리스도의 이콘인 셈이다.

예수, 역사 안에 실현된 그리스도의 이콘

현상학자이며 신비신학자인 에디트 슈타인은 이 아기의 모습에서 “나를 따르라!” 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를 읽는다. 하느님이 사람이 된 이 성육신의 신비 안에서 인간은 신과 일치하는 자신의 모습에 눈뜨게 된다. 성육신의 신비는 곧 개별 인간의 신비인 것이다. 자신 안에 태어나는 신을 받아들이는 인간, 즉 실현된 그리스도인 역사적 예수를 모델로 삼아서 사는 사람은 십자가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예수를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탄생의 신비 안에 부활의 신비에 이르는 힘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함께 꿰뚫어 보는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역설, 즉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래서 슈타인은 때로 수난의 시기에 겹쳐지는 그리스도 강생 축일을 맞으며 죽음을 향한 그 걸음 안에 이미 시작되는 생명, 성육신과 부활의 일치로 이루어지는 그 생명의 신비에 주목한다: 나자렛 마리아의 응답으로 인간 안에서 실현된 그리스도의 삶! 신이 인간이 된 그 사건 안에서 인간의 원형을 만나는 것이다.

▲ 어린이들이 표현한 성탄과 빵으로 만든 마굿간
성체성사, 매일의 성탄 사건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탄생은 아기 예수의 성탄 뿐만 아니라, 영성체와 함께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일의 성탄 사건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내 안에서 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순간, 나 또한 신안에 새로이 태어나는 사건이다. 이 사건 안에서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세상과 나를 식별하고, 또 매일을 살아가는 것은 다름아닌 존재의 본질에 집중하며 복음의 핵심인 성육신의 신비를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신비는 관계 안에서 소통하는 인간, 인간의 지평을 넘어서 생명의 흐름에 열린 인간, 신이 인간으로 낮아져서 출생한 그 겸손을 인간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다.

현대 신학자 프란츠 알트는 인간의 원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생태주의자 예수” 로 표현되는 모습에서 찾아낸다. 태양과 바람과 물로 이루어지는 우주의 신비에 열린 사람, 들의 곡식들이 성숙하는데 필요한 시간과 그에 맞는 노동의 흐름을 이해한 사람, 사람을 귀히 여기듯이 동물들의 고통에도 민감한 사람, 인간을 사회적 계급이나 성적 차이로 구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그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상생의 삶을 가르치는 사람 …

아기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과 일치한 새로운 인간의 모습이 오늘, 이 땅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그 원형의 인간을 조심스레 그려본다. 본질적인 그리움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