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영성 따라 배우기-9]교계제도와 평신도운동
-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뜻대로 행하라"

교회란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돌보는 집

▲도로시 데이는 스스로 '교회의 순종하는 딸'이라 불렀다.
도로시 데이는 교회에 앞서 그리스도와 일치하기를 갈망하였으며, 그녀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이 교회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도로시 데이는 회심할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가난하고 정결하며 순명하기를 바랐다. 나는 살기 위하여 죽고 싶었고,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입고 싶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모든 여인들처럼 나는 나의 사랑과 일치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달리셨던 십자가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기업가 같은 사제들, 그들이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재물. 가난한 이들, 노동자들, 흑인들, 멕시코인들, 필리핀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의 부족과 억압,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산업주의.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사제들은 아벨이기보다 카인이라고 자주 느끼게 하였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인가요?,’ 교회는 사회질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교회에는 풍부한 자선이 있었지만 정의는 너무나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은 성사 분배자들이었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가져다주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게 해주며, 세상에서 우리가 평화와 일치감을 더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이었다. ‘최악의 적들은 집안에 있다’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경고하였다.”

도로시 데이에게 그리스도의 교회란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돌보는 집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도로시 데이는 이상주의자이기는 하지만 결코 낭만주의자는 아니었다. 도로시 데이는 지상교회로서 가톨릭교회 역시 현세적 사명을 수행하면서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그 가르침과 일치해서 살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선언할 수는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를 잘못에 따라서 판단하지 않고 의도와 목표에 따라서 판단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도로시는 자신이 사회적 구원의 과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가톨릭신자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길은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 교회는 충분히 쇄신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스펠만 주교와 갈등하는 도로시 데이.. 신문 제호 바꾸라는 압력 받아

▲도로시 데이
노동조합과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은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전후 분위기 속에서, 1949년 뉴욕대교구에 반대하여 무덤 파는 인부들이 파업을 하자 스펠만 추기경은 인부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을 받았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추기경은 인부들과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신학생들을 시켜 파업이 사그라질 때까지 무덤을 파게 했다.

도로시는 항상 주교들에 대한 존경을 강조했으나, 이번에는 추기경이 파업을 무산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를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표명했다. 도로시는 메디슨가의 세인트 패트릭성당 뒤에 있는 추기경의 호화로운 사무실 앞에서 몇 명 안 되는 인부들의 시위대에 참가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전쟁이라는 끔찍한 전쟁의 희생자들’이라는 칼럼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결국 파업은 한 달 만에 실패하고, 도로시는 공공연히 추기경을 비난한 사실과 주교관 앞에서 역사상 처음일 가톨릭평신도들의 시위에 참여한 일, 또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비난을 거부한 사실 때문에 1951년 추기경의 호출을 받았다. 가톨릭일꾼 신문의 발간을 중지하든지 제호를 바꾸라는 것이었다.

신앙의 의무에 대한 정치적 응답

도로시는 자선의 형태뿐 아니라 가난과 전쟁의 황폐함을 가져오는 제도 권력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최선의 정치적 형태로 자기 신앙이 요구하는 의무에 응답했다.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거나 감옥에 가더라도 그녀는 매일미사와 로사리오 기도, 최소한 하루 2시간의 성서 묵상을 거르지 않은 부단한 기도로 자신을 단련시켰다. 그는 자신을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교회의 딸”이라고 부르며, 지금이라도 추기경이 활동금지의 명령을 내리면 즉시 따르겠노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교의와 교회구조를 마음을 다하여 성심껏 받아들였다. 그녀는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비판하지 않았고, 다만 그 가르침을 교회가 살지 못한 것에 대해 질책했을 뿐이다. 그는 자주 ‘순명’을 강조했는데, 만일 추기경이 전쟁에 대한 가톨릭일꾼의 입장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도로시는 이렇게 순명한다. “아니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추기경이 그렇게 명령한다면, 우리는 성서의 말씀, 성인들의 말씀, 교종들의 회칙에 나온 말들만 인용할 것입니다. 전혀 우리가 한 말이 아니죠.”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뜻대로 행하라”

그러면서도 도로시는 누구도 교회의 권위를 경멸하지 않기를 바랐다. 많은 이들은 도로시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신비’로 여겼다. 확실히 도로시 데이는 더 작은 그리스도교회 안에서 편안히 자리를 잡았다.
도로시 데이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뜻대로 행하라”는 말을 자신의 표어로 삼았다. “이 말씀에는 자유가 숨 쉬고 있었고, 자유는 일찍이 우리와 같은 이상을 품고 시작된 일들을 언제나 도중하차시켰던 세속적 불의의 한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추구한 인류의 이상이었다. 성서와 성인들의 작품을 탐구하면서부터 나는 더 이상 다른 위대한 지성들의 뒷받침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물론 가톨릭일꾼운동을 이해하고 지지했던 주교들도 있었다. 언젠가 캔자스의 오하라 주교가 가톨릭일꾼 공동체를 방문하여 피터 모린에게 “피터씨, 우리(주교)를 이끌어주면 우린 당신이 하는 대로 따라갈 테요”라고 말했다. 피터는 주교의 말뜻을 잘 알고 있었다. 평신도로서 선봉에 나서라는 것이며, 전쟁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평신도가 되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말한다.

“우리는 가능한 방법을 다해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일치를 도모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등,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려 했음은 물론 모든 이들을 신뢰하는 가운데 그러한 선의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며 우리의 단점과 남의 단점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려 노력했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제와 고위 성직자들이 할 수 없었던, 또 하지도 않으려 했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분야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큰 탈은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걸음들을 계속 돌이켜봄으로써 피터를 비롯한 노련한 본질주의자들이 흔히 말하던, 낡은 옛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거듭 반복할 수 있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