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혹은 소명에 대해서는 몇 해 전에 다룬 적이 있습니다. (“성소가 뭐죠?”를 참고하세요.) 성소는 거룩한 부르심이란 뜻으로, 소명은 생명으로 초대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생명, 곧 구원으로 초대받고 있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맥락에서 소명을 성소와 유의어로 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성소라 하면 보통 사제 성소나 수도자 성소를 우선적으로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혼 성소가 있음에도 결혼 성소가 상대적으로 부차적으로 취급되는 것은 사제나 수도자 성소가 그만큼 적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협의의 성소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교회에 어떠한 신분으로 봉사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반면 광의의 성소란, 나를 지으신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이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잘 드러내 보이는가를 묻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소명이란 단어가 가진 좀 더 넓고 일반적인 의미로서 말이죠.

사기를 친다거나 사람을 죽인다거나 하는 것처럼 명백하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가장 행복해 하는 일, 나의 열망과 가장 잘 부합하는 일 등을 찾아내어 그것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소명이고, 그런 일을 통해 나의 존재 이유가 그만큼 잘 드러난다면 그것이 성소를 찾아 살아가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립니다. 노래를 하는 사람은 노래를 하며, 자연 안에 숨겨진 이치를 발견하며 경이로워하는 이들은 탐구합니다. 성소는 이러한 다양한 행위 그 바탕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하느님께 감사하고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느끼는 삶이 되겠습니다.

이제 질문으로 돌아가서, 성소를 찾는 방법은 어떤 기계조작 사용서처럼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지금의 나로서 하느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드릴까?'에 스스로 답을 찾고 그 답에 맞춰 실천을 감행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단순하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는 그런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삶의 항로를 그려 볼까가 더 중요합니다.

성소는 '내가 지금의 나로서 하느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드릴까?'에 스스로 답을 찾고 그 답에 맞춰 실천을 감행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미지 출처 = Pxhere)

저의 내면에서 ‘요한아, 너 어디 있느냐? 내가 너를 포도를 가꾸는 농부로 보내겠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런데 그 소리가 정말이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마냥 의심의 여지가 추호도 없이 뇌리에 꽂혔다면, 저는 의심없이 포도 키우는 법을 배우고 포도밭을 가꿀 것입니다. 이왕이면 어디에 밭을 사라거나 누구를 찾아가면 포도농사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등의 고급정보까지 알려주시면 더 좋겠죠. 하지만, 일단 이렇게 하느님께서 나를 어떤 삶으로 초대하시는지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고, 포도농사를 지으면서 더욱 깊이 하느님이 이 일을 통해 무엇을 계획하고 계신지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방향성은 ‘나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응하는 삶을 살겠다’, ‘나는 사람들과 생명(먹을 것)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 ‘나는 밭에 건물을 세우기보다 그 밭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다’ 등의 내적 다짐과 태도로 드러납니다. 이 방향성에 구체적인 작업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다양하게 직업으로 분류하는 것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사제든, 수도자든, 의사든, 과학자든, 시인이든, 연기자든.... 그 일이 하느님 앞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를 모른다면 성소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을 담아 내 안에 숨겨 놓으신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묻는 이에게 신비로운 끌림이 생길 것입니다. 한번 의사로 불렸다고 의사의 일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하느님을 본받아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싶다’는 방향성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지금 굶고 있는 이웃에게 자신의 빵을 나눠 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의원을 설립하신 선우경식 요셉 박사는 훌륭한 자선가이자 샤를 드 푸코의 영성을 살고자 했던 영성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어떤 방향성을 지니고 살아갈 때 좋아하실까를 여전히 모르시겠다면, 넉넉히 시간을 내서 나는 어떨 때 행복하고 기쁜지 찾아보세요. 하느님께서는 내가 내 모습을 그대로 사랑할 때 뿌듯해 하시고, 내가 행복할 때 함께 행복해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나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실지를 찾게 될 것입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센터장, 인성교육원장,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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