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성찰 - 박기호]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0년 5-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7일간의 외출'이란 연극이 있었다. 교도소 모범수들이 국회의원, 기업체 사장, 인기스타 등 사회 저명 인사로 구성된 후원회원들과 함께 소풍을 떠났는데 여객선이 풍랑에 파선되어 무인도에 도착하게 된다. 잠자리도 먹을 것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 빠진 이들은 웃음을 거두고 권위와 위세를 피우며 모범수들에게 주인처럼 온갖 갑질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맹물로 배를 채우면서 허기에 안달이 난 그들은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모범수들에게 비굴하게 굴면서 대표직을 죄수에게 넘기는 등 갑을의 처지가 뒤바뀐다.

거칠게 살아온 죄수들은 토끼를 잡고 꿩을 잡아 구워 먹으면서 생존의 방식을 찾지만, 돈과 파출부 일꾼이 없이는 무엇 하나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던 그들은 죄수들이 먹다 버린 뼈다귀를 얻으려 애쓰고 미녀 배우는 아양을 부리며 몸을 팔려고도 한다. 죄수들은 그들에게 훈육과 훈계도 하며 서로 돕고 살아가는 규칙도 마련한다. 1주일 후 구조선이 도착해 이들의 무인도 공동체는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고 죄수들은 다시 교도소로 돌아간다.

“우리는 공동 운명체다. 서로 협동으로 기다리자!”

우리는 크고 위대한 성과물을 획득하는 데 치중했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론적 세계관에 갇혀 내 존재가 무엇으로 인해 존재하는지 그 근원을 보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노동, 공존, 협동의 환경 속에서 오늘의 내가 있음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하루 세끼 365일 72년 동안 한 끼도 굶지 않고 밥을 먹고 살아오면서, 내 손으로 쌀 한 줌도 배추 한 포기도 생산하지 않았으면서, 그것은 교환의 정의에 의한 것이므로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안락한 집에서 하루에도 수차례 화장실을 이용하면서도 배설물을 치울 일도 냄새 맡을 필요도 없이 살아오길 수십 년이지만, 누군가의 건설과 노동에 의해서 온 것임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저 주어진 생리적 삶에 몰두해 살아오지 않았던가. 이러한 삶은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 모든 것을 변할 수 없는 일상으로 여겼고, 오늘에 의미를 두고 즐기는 것을 인생관으로 강조하는 강사들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사람은 부모의 희생, 주어진 풍토와 문화 환경, 이웃의 인정, 먼 나라 누군가의 노동을 통해 먹거리와 필수용품을 얻는 협동의 생태계로 이루고 살아가는 관계론적 존재다. 모두 내게 생명과 건강과 기쁨과 지식과 치유로 돌보아 주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들이다. 관계론적 생태계를 떠나서 살아갈 수 없는 공동체적 삶이다. 모든 것에 대해 비용을 지불하고 구입한 교환의 정의에 의해 조금도 고마울 것도 미안할 것도 결례될 것도 없이 나는 나로, 너는 너로, 여기는 순간 하나의 섬사람으로 고독의 삶에 갇히게 된다.

모든 존재는 공감의 힘으로 살아간다. 사람도 소도 개도 민들레도 산수유나무도 모두 주변과의 공감 능력에 의해 번식하는 관계론적 존재다. 유일하게도 우리 시대의 인간들만이 동식물과 달리 공감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관계를 공존과 협동의 존재로 존중하지 않는 이유다. 5.18의 비극도 세월호의 눈물도 모두 공감 능력의 부재가 빚은 참사가 아니던가.

관계하는 삶. (이미지 출처 = Pxhere)

하찮은 존재들의 반란

코로나19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무자본 노동자, 하찮은 존재들의 목소리와 눈물을 대신해 나타난 신의 음성이시다. “작은 것이 하찮아 보이더냐? 더 작은 것의 위력을 보겠느냐?” 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감사함도 존경심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일상의 사람들과 일거리와 무의식의 대상이 자신들의 가치를 작은 눈앞에 들이민 반란이었다.

청소부와 파출부와 택배와 외국인 노동자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언제라도 내가 결정하기만 하면 할 수 있고 바꿀 수 있고 버릴 수 있고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내가 누리는 권위와 자유가 얼마나 부실한 토대 위에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역할인지, ‘부재의 존재가치’를 각성케 하기에 충분했다.

신경정신과에서는 조울증이나 가정불화를 치유하는 프로그램으로 역할극을 활용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마음과 처지를 이해하도록 돕는, 일종의 ‘공감 능력 훈련’이다. '7일간의 외출' 이야기처럼 당연했던 환경에 닥쳐온 삶, 새로운 환경은 바로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저것은 무엇인가?’를 보게 하는 훈육이다.

이를 깨우치지 못한다면, 다시 거리 두기가 해제되고 카페와 경기장의 리그전이 가득 찬들 우리 삶이 무엇 하나 변할 수 있겠는가? 크고 작은 자본주의 고용주들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없고 작고 약한 이들에 대해 돈만 주면 노예처럼 부리고 학대하고 버려도 그것을 ‘경제의 정의’라고 생각하며 작은 자들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해 왔다. 작은 자의 기능이 자신을 살게 하는 방식임을 부정하니 너와 내가, 나와 세계가 모두 존재일체,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원자력의 무사고 안전성도 사고도 폭발도 죽음도 지구의 멸망도 다가오면 순간임을 알지 못 한다.

자동화로 기계의 작은 부품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면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없는 자, 작은 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면서 자신들의 세상을 고수해 왔다. “중국이 ‘차이나 코로나’를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이유로 세계를 감염시켰으니 시진핑에게 책임이 있다”는 트럼프의 생각도 바로 존재일체의 관계론적 세계 원리를 부정하는 태도일 뿐이다.

새로운 신의 권능을 맞이하는 그리스도교

몇 개월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코로나’는 신의 속성을 지니고 신처럼 두려운 모습으로 도래했다. 작은 것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세상에 신께서는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현대 그리스도인을 깨우치러 오셨다. 할배 세대인 필자는 어린 시절 성당에서 달달 외우던 '요리문답'(要理問答)을 기억한다. 가톨릭 교리를 문답식으로 정리해 암기시키던 교리서다.

문: 천주 무량하시뇨?

답: 천주 무량하시니 아니 계신 데 없이 곳곳이 다 계시나이다.

어린 시절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공기’로 배우기도 했다.

수녀님: 바람이나 공기가 보이냐?

아이들: 아니요, 안 보입니다.

수녀님: 보이지 않지만 바람은 바람이고 공기는 공기라고 부르지 않냐? 보이지 않지만 공기가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공기가 어디에나 있듯이 하느님은 곳곳에 계셔서 모든 사람이 목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입자라고 한다. 크기의 기준으로는 존재하지 않을 정도이면서도 너무 큰 두려움으로 천지사방을 자유로운 공기와 함께 서성인다. “아니 계신 데 없이 곳곳에 계시는 코로나”다. 코로나 신은 오만과 독선에 갇힌 현대 종교인들에게 로고스처럼 선포된 신의 메신저로 다가온다.

"코로나도 나의 자녀다. 죽음의 기운을 나르는 심부름꾼이지. 너희는 다만 창조 때부터 생로병사의 몸일 뿐, 심판은 누구도 예외 없듯이 신부건 목사건 피할 수 없다. 교회는 나를 기념하는 제단이고 내 법을 배우는 학교이자 나의 가정이 아니냐? 교회도 세상에서 분리될 수 없는 생태계의 일부고, 그래서 너희는 공동체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다. (이미지 출처 = Pxhere)

교회의 성찰과 거듭남

"나는 너희들의 설교가 역겹구나. 너희가 거룩한 백성인 양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평화는 아랑곳없고 내가 보낸 사자인 양 내 이름을 팔아 장사나 하는 일을 당장 멈춰라! 강도들의 소굴을 폐쇄하라! 복음 정신보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만 고집하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채로는 모임도 하지 말라! 그리고 부정한 헌금에 담그던 손을 씻어라! 돈을 세며 지긋이 짓던 미소가 역겹다. 마스크로 가려라!

나를 따르지 않고 돈과 권력을 우상하며 나아가 스스로 우상이 되고자 신도들을 지배하던 역겨운 거짓 목자의 길로는 다시는 돌아가지 말라. 소금 기둥으로 변하리라! 나는 야훼다. 축복을 파는 장사꾼이 아니다. 제단의 제물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나 야훼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라. 내가 긍휼히 여기는 내 자녀들을 형제로 맞아들이고 추식해의(推食解衣, 밥을 주고 옷을 벗어주다) 하라.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예배다. 너희는 한 형제요 자매요 가족이고 공동체다."

코로나바이러스도 하느님의 은총도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확대경이다. 바이러스는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은총은 성사로 보게 한다. 보이지 않은 은총을 보이게 하는 행적이 '성사'(聖事, Sacramentum)다. 신앙은 성사화를 통한 공감으로 믿는 이들에게 감수된다. 성사인 전례는 하느님과 공감하는 순간이다.

믿음의 사회화

주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4) 하셨다. 하느님의 은총인 성사는 사회화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유훈이시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진화시키는 사회화의 작업 없이는 복음이 무력하다. 복음은 세상의 구원이다. 사람도 바꾸지 못하면서 세상의 이기와 탐욕도 바꾸는 행동이 없다면, 신앙은 무력하고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가 없다.

한국 그리스도교 교회는 코로나 정국에서 사순절 판공성사도 부활절 전례까지도 모두 폐쇄했다. 교리, 경신례, 계율은 종교의 3대 요소인데 예배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된 일이 어디 아무렇지 않은 사태인가? 하느님은 인간으로 오시고, 우리는 세상과 호흡을 맞춘 시간이었다.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곧 복음 정신이기 때문에 생명평화를 위해 세상과 결합한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복음화하지 못함에 대한 회개와 각성의 자책으로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니라,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순종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사순절을 살게 하셨다. 조금도 서운해할 일 없다. 우리가 예배를 강행한 신천지나 일부 교단처럼 권위를 내세우며 미사를 강행한다면, 하느님의 공동체가 아니라는 징표일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국 그리스도교는 신천지 종단의 악취를 경험했다. 필자는 평소 사회적으로 손가락질받는 일부 종단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세속화된 믿음으로 생명 평화의 복음주의를 제쳐 두고 사회적 호흡으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배치된 전쟁조직(군대)에 사제와 목회자를 군종사제나 군목으로 파견하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 젊은이들은 감옥에 가면서도 집총을 거부하고 평화주의를 고수한다. '안식일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대해서도 복음주의적 원리에 충실한 그들의 믿음을 부정할 수 없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들의 신념은 민주화 시대를 맞아 양심적 대체복무로 수용되는 승리를 거두지 않았는가. 그것이 믿음의 사회화인 것이다. 신천지 종단의 선교방식이 공동체 의식을 외피로 한다는 점도 우리에게 각성되기에 충분했다. 소비문화의 고독에 빠진 현대인에게 공동체의 사랑과 형제자매의 정을 나누는 그들의 선교방식에서 현대인이 갈망하는 교회의 본질을 보게 한다. 대형화된 교회 공간에 모여서는 형제자매요, 사업장에서나 정치의식에서는 비루한 군상으로 타락하는 신앙에는 공동체성이 없다. 교회가 일궈 내지 못한 공동체성이 곧 우리 시대인이 갈구하는 기쁜 소식의 실체라는 것을 새겨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우리 시대 교회의 모습은 공동체를 목표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코로나로 미사 없으니까 좋기만 하드만 그래....”

가톨릭 신앙인들의 고해성사 내용의 단골 메뉴는 “주일미사 빼먹었습니다”다. 농경사회가 해체되면서 정주의 삶이 무너져버린 시대는 회유문화와 유동문화의 시대로 바뀌었다. 가족이 함께 유람하는 것을 문화생활로 여기고 자녀와 가정의 화평에 대한 의무로 여기고 있다. 이는 신앙인의 의무로 여겨지는 주일미사 참례와 충돌하게 되어 속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주일이 죄인가? 화목한 가정이 죄인가?

코로나 사태로 인한 미사 폐쇄는 “이렇게 가정에서 기도해도 신앙생활이 되는 거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케 했다. 두 달 이상, 그것도 사순절과 부활 주일에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고 자신은 이제 신앙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신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비록 미사가 재개된다고 하더라도 코로나 정국의 종료와 함께 나타날 폭발적인 가족들의 유람행렬을 막을 방법도 필요성도 여의치 않다.

그래서 생각건대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가정 전례’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사제가 되고 자녀가 독서자와 복사를 하며 함께 기도하고 음식을 나누는 전례양식을 만들고 장려해도 좋겠다. 유대인의 가정이 그렇게 오랜 역사 동안 신앙을 이어 왔지 않았는가. 공기를 숨쉬는 순간에 어디서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가족들 공동으로 경배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한 주간의 생활실천을 봉헌하는 시간을 담는다면 훌륭한 경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일미사에는 나가면서 가족기도 한 번 없이 살아가는 가정보다야 훨씬 훌륭한 신앙생활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본당이 이웃과 함께 기도하며 아픔과 어려움과 기쁨과 경축과 물질을 나누는 시간의 공간으로 진화시킨다면, 우리의 신앙은 더욱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것이 될 수 있다.

어서 빨리 코로나 정국이 종료되어 새로운 일상으로 일어서는 시간과 함께 우리들의 신앙이 더욱 성숙되는 변혁의 결실을 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시간도 방역에 땀 흘리며 종사하는 이름 알지 못하는 모든 의료진에게 감사의 정을 바친다.

박기호

서울대교구 원로 사제. '산위의 마을' 대표. <가톨릭평론>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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